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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테마있는 명소] 공주 공산성②--‘황룡이 춤추는 야경’ 놓칠 수 없는 경치
 (공산성①에서 계속)

[헤럴드경제= 공주] 주말 매 시각 정시에 약 10여분간 행해지는 공산성 수문 교대식은 백제의 병사들이 했던 모습을 재현해 재미있는 병사무술을 선보여 줬다. 많은 관광객들이 매 시각 정시를 노려 이 모습을 즐긴다.

바로 옆에는 백제인들의 의상체험장도 마련돼 있다. 모처럼 1500년 전 역사 속으로 들어왔으니 체험해보는 것도 추억에 남을 일이다. 아름다운 백제 왕과 왕비 의상이 눈길을 끌었다. 필자는 의상을 입어보진 못했지만 백제 왕비 의상을 한 여학생과 기념촬영으로 대리만족을 했다.

백제 왕비가 참 아름답다. 왕비 의상 체험(왼쪽). 공주대 최선 교수와 제자들의 무용 공연(오른쪽).

이날은 마침 금서루 옆 작은 공간에서 공주대학교 최선 교수팀의 무용회가 열렸다. 여행객을 위해 연 부정기 공연이었지만 은은하게 울려퍼지는 음악에 교수와 제자들의 율동을 산성에서 만끽하게 된 것은 뜻밖의 보너스였다.

필자는 주진영 계장님, 안영순 회장님과 함께 성곽길 산책을 나섰다. 서문인 금서루에서 남쪽 성곽길로 나아갔다. 얼마 남지않은 백제의 흔적과 조선시대 건축물 등 볼거리가 있어서다.

아름다운 곡선 성곽길을 걷다보니 저 멀리 ‘공주의 3박’ 중 한 명인 박찬호 선수의 모교 공주중학교가 눈에 들어왔다. 그 산 너머엔 박세리 선수의 모교 금성여고가 있다고 했다. 또 한 명의 박(朴)은 ‘제비 몰러 나간다’의 고(故) 박동진 명창이다.

왕궁 웅진성을 지키는 백제의 병사 모습 재현.

공주에 대해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다보니 넓은 터가 나왔다. 일명 ‘추정 왕궁터’다. 웅진시대 왕궁이 이 곳에 세워졌다고 추정한다는 것인데 지금은 사실 ‘추정’ 보다 ‘확정’이라고 해야 맞다고 안 회장님은 설명했다. 그 만큼 확실한 기록과 몇몇 근거가 나왔기 때문이다.

1985~1986년에 걸친 발굴조사에서 10칸, 20칸 등의 큰 건물터와 연못, 저장시설 등 유적이 확인되었으며, 백제의 연꽃무늬 수막새를 비롯 많은 유물이 출토됐다. 또 삼국사기에는 동성왕 22년(500년) 왕궁 동쪽에 임류각을 짓고 연회를 베풀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 임류각이 여기서 머잖은 곳 숲 속에 있다.

왕궁터 규모는 작았다. 건물 몇 동 정도 들어 설 면적이랄까. 백제 역사를 연구한 일부 사학자는 그래서 웅진은 임시 도읍지 성격이 강했다고 논하기도 한다. 근본적으로 새로운 천도를 미리 계획했다고 하는 주장이 있다.

아무튼 이 자리에 지금은 연꽃을 심었던 인공 연못이 눈으로 볼 수 있는 백제의 흔적이다. 백제가 수도를 이곳으로 옮긴 직후 만든 것으로 추정되는 왕궁지 연못으로 여기선 연꽃무늬와 바람개비무늬 수막새, 벼루, 등잔, 삼족토기 등 백제시대를 대표하는 유물들이 나왔다. 자연석을 정연하게 쌓았는데 바닥면 지름은 4.78cm, 윗부분은 7.3cm로 넓고 깊이는 3m다.

웅진으로 옮겨온 백제 왕궁터(큰 사진). 연꽃 심었던 인공연못(작은 사진 왼쪽)과 쌍수정

이 곳에는 ‘쌍수정(雙樹亭)’이라는 정자도 하나 있는데 이는 조선시대 인조가 1624년 이괄(李适)의 난을 피해 내려와 엿새간 머문 기념으로 훗날 지은 것이다.

인조는 공산성으로 일시 파천(播遷)해 아래쪽 영은사에 머물며 이 왕궁터에서 바람을 쐬곤 했는데 당시 인조가 난리가 빨리 평정되기를 기원하며 몸을 기댔던 두 그루의 나무(雙樹)가 있었다. 인조는 5박6일 공산성에 머물게 됐는데 이괄의 난이 진압돼 그의 목이 인조 앞에 도착하자 하늘에 제를 올리고 임금이 매고 있던 허리띠를 풀어 이 쌍수에 둘러주며 통훈대부(通訓大夫) 정삼품의 벼슬을 내렸다.

이제 그 나무들은 고사했고 후손 나무들이 자라고 있는데 이를 안타깝게 여겨 1734년 충청도 관찰사 이수항이 쌍수정을 지어 위로했다. 이 공산성 역시 쌍수산성으로 불렸다.

옆에는 인조가 머물렀던 엿새간의 행적, 이괄의 난, 공산성의 모습 등을 기록한 사적비가 있다. 1708년(숙종 34)에 세웠으며 인조 때 영의정을 지낸 신흠이 비문을 짓고, 숙종 때 영의정을 지낸 남구만이 글씨를 썼다. 비는 거북 모양의 받침 위에 비몸을 세우고, 목조 건축의 지붕을 모방한 머릿돌을 갖춘 조선시대의 일반적인 양식이다.

그 아래로 내려오니 남쪽문인 진남루(鎭南樓)가 있었다. 산책 나온 사람들이 누각 위에 올라 쉬고 있었다. 진남루는 토성이던 이 산성을 조선시대 석성으로 쌓으면서 건립한 건물로 삼남(三南)의 관문이었다. 문화재자료 제48호다.

잘 정비된 넓은 숲 속 산책길을 걷다보면 곳곳 건물터가 있고 분지 처럼 생긴 곳에 멋진 2층의 임류각(臨流閣)이 자리하고 있다. 동성왕이 지어 신하들과 연회 장소로 쓰던 건물로 1991~1993년 복원했다. 그 옆엔 아름다운 느티나무와 함께 명국삼장비(明國三將碑)라는 작은 비각이 있다. 명나라 장수 3명의 송덕비가 무슨 사유로 여기에 세워졌을까. 정유재란 때 충주에서 왜적을 막고 선정을 베풀어 주민들로부터 민심을 얻은 이공(李公), 임제(林濟), 남방위(藍芳威)를 추모하는 비였다.

공산성의 남문인 진남루, 임류각, 성곽길에서 본 금강과 공주의 강북시가지, 광복루(사진 위 왼쪽부터 시계방향)

가까운 곳에 4개의 성문 중 동쪽 문인 동문루(東門樓)와 광복루(光復樓)가 있었다. 동문루는 기록에 따라 2층 3칸의 누각으로 복원했다. 광복루는 원래 공북루 옆에 있던 군부대 지휘 문이었는데 일제시대 이쪽으로 옮겨 웅심각(雄心閣)으로 부르다 해방 후 백범 김구 선생이 이곳을 찾아 광복루라고 이름을 고쳐 오늘에 이르게 됐다. 소박한 누각이다.

다시 성곽길을 걸어 내리막으로 내려오니 경치좋은 금강 가에 멋진 누각이 운치를 자아내고 있었다. 만하루(挽河樓)다. 연지(蓮池)라고 하는 연못과 금강 사이에 서로 바짝 붙어 있다. 이 연지는 네모나게 석축한 것으로 금강 물과 서로 통하게 만들어 적에 노출됨이 없이 강물을 이용할 수 있게 만들었다. 통로도 적이 못보게 참호 처럼 만들어 놓은게 눈길을 끌었다.

만하루와 연지.

옆에는 작은 절 영은사(靈隱寺)가 있다. 공산성 내 유일한 사찰로 세조 4년(1458년)에 지어 임진왜란 때 승병의 합숙소로, 광해군 때는 승장을 둬 전국 사찰을 관리케 한 의미있는 절이었다.

마지막 한 고개 넘으니 공북루(拱北樓)다. 공산성의 북문으로 금강 변에 위치해 있고 앞쪽은 넓은 광장이다. 선조 36년(1603년) 옛 망북루 터에 신축한 것으로 조선시대 문루(門樓) 건축의 대표적인 예가 되는 아름다운 누각이라고 한다. 옛날에는 이곳이 공주의 강남과 강북을 오가는 관문 역할을 했다.

공산성의 북문 공북루. 아름다운 조선시대 누각으로 꼽힌다

이렇게 한 바퀴 돌아보니 백제와 조선시대 흔적들을 일부분 즐기며 배울 수 있는 시간이 됐다. 무엇보다 숲 속 길을 걸으며 발 아래 금강을 굽어보고 강 건너 휘황찬란하게 발전하고 있는 ‘공주의 강북’ 시가지를 바라보는 즐거움도 잊을 수 없다.

그러나 공산성 여행은 이것으로 끝이 아니다. 밤 풍경도 봐야 마침표를 찍을 수 있다. 필자 역시 이를 빠뜨릴 수 없었다. 전날 저녁 카메라 들고 이 멋진 야경을 먼저 ‘탐’했다. 가족, 친구, 연인 등 모두 손잡고 산책 나온 사람들로 꽉 찼다. 혼자인 사람은 필자 뿐이었다.

금서루를 비추는 야경과 강 가를 따라 굽이쳐 솟는 듯한, 황룡 같은 성곽 둘레 불빛이 장관이다. 금강에 반사되는 불빛경치도 봐야 한다. 금서루를 지나 희미한 성곽길을 걸으니 초여름밤의 풀냄새와 신선한 공기에 저절로 힐링되는 기분이다. 단, 혼자 걷는 외로움만 이겨낼 수 있다면.

공산성의 야경. 빠뜨릴 수 없는 멋진 경치다.

공산성 여행에서 맛집도 빼놓을 수 없다. 금서루쪽 아래 찻길 건너편에는 음식문화 시범거리가 있다. 백제의 맛, 여러가지 맛있는 음식이란 뜻의 ‘백미(百味)’라는 말을 써서 ‘공산성백미고을’이라고 부르는 식당촌이 형성돼 있다. 즐거운 여행과 함께 공주의 다양한 맛을 즐길 수 있다.

공산성 앞에 있는 식당가. 다양한 공주의 맛을 즐길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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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절미는 공주 떡 : 오늘날에도 즐겨먹는 인절미는 공주 떡이다. 1624년 조선 인조임금이 이괄의 난을 피해 공주 공산성에 와서 머물 때 한 백성이 이 떡을 진상했는데 임금이 먹어보고 너무나 맛있어 신하들에게 떡이름을 물으니 아는 자가 없었다. 다만, 임씨 성을 가진 사람이 쌀로 만든 떡을 썰어(切米) 가져왔다고 하자 임금은 “이거 과연 절미(絶味)로구나” 라며 맛있게 먹었다고 한다.

그래서 붙은 이름이 임씨 성을 따와 ‘임절미’라 지었고 발음이 어려워 ‘인절미’로 불려지게 됐다고 한다.


■ 이괄의 난 : 이괄은 조선 제 16대 임금 인조가 광해군을 몰아내고 왕위에 오르는 인조반정에 대장을 맡아 혁혁한 공을 세운 사람이다.

그럼에도 논공행상 때 일등공신이 아닌 이등공신으로 대접받는데 이어 관서지방에 여진족 침략이 있으니 평안도로 가라는 명을 받자 불만을 갖게 됐다.

정권을 잡은 서인들이 이를 눈치채고 이괄이 아들 이전과 반란을 도모했다고 인조에게 아뢰었다. 반면 이괄은 조정에서 의금부도사가 자신을 체포하러 떠났다는 소문을 듣고 본격적으로 반란을 일으킨다. 1624년의 일이다.

이괄은 반란군 1만여명을 이끌고 평양, 개성으로 파죽지세 진격하자 인조는 공주 공산성으로 몽진했다.

직후 한양까지 점령한 이괄은 1624년 2월11일 선조의 아들 흥안군을 왕으로 추대했지만 그날 밤 급습을 당해 반란군이 대패했다. 이괄은 경기도 이천으로 도주하던 중 부하 기익헌과 이수백에 의해 목이 날아가면서 반란은 평정됐다.

글ㆍ사진=남민 기자/suntopia@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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