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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영어에 미쳤던 남자, 이제 선플에 미치다…선플본부 이사장 민병철 건국대 교수
[헤럴드경제=신상윤 기자]민병철 건국대 국제학부 교수를 처음 만난 때는 2008년 10월. 탤런트 고(故) 최진실 씨의 자살 사건이 계기가 됐다. 경찰 수사 결과, 톱스타였던 최 씨가 스스로 목숨을 끊게 된 원인은 네티즌들의 악플로 인해 생긴 우울증이었다.

당시 국민들은 ‘시대의 아이콘’을 잃었다는 슬픔과 함께 악플이 사람의 목숨도 앗아갈 수 있는 무서운 것이라는 경각심을 갖기 시작했다. 이 같은 상황에서 독자들에게 악플의 폐해를 다시 한 번 일깨워주는 한편 ‘악플을 달지 말자’는 단순한 캠페인보다 악플을 뛰어넘을 수 있는 무언가를 알려주고 싶었다.

인터넷 등을 찾아 헤매다 발견한 것은 ‘선의의 댓글’이라는 뜻의 선플. 사단법인 선플달기국민운동본부가 ‘선플달기 운동’을 주도하고 있었다. 선플본부 이사장은 민병철 당시 중앙대 교양학부 교수. 사진을 찾아 보니 1980년대 새벽잠도 잊은 직장인들 사이에서 ‘영어 열풍’을 일으켰던 TV 프로그램 ‘MBC 생활영어’의 진행자이자 영어 전문가, 바로 그 사람이었다.

‘선플 운동’ 등 각종 일정으로 바빴던 민 교수를 어렵사리 만났다. 그는 선플에 빠지게 된 계기부터 들려줬다.

“지난해(2007년) 초였을 거예요. 가수 유니(본명 허윤) 씨가 악플에 시달리다 자살했다는 뉴스를 보고 충격을 받았죠. 당장 그 해 1학기부터 제 수업을 듣는 학생들에게 각각 유명인 10명의 개인 홈페이지나 블로그 등을 방문해 선플을 달도록 과제를 부과했죠. 수업을 듣던 학생이 570명이었으니까 1주일 새 인터넷에 선플만 5700개가 새로 달린 거에요. 작지만 큰 변화 아니겠어요.”
 
“꽃처럼 세상 사람들이 온ㆍ오프라인에서 바르고 고운 말만 썼으면 좋겠어요. 그렇게 나온 선플은 실의에 빠진 사람들에게 힘을 주는 추임새가 됩니다.” 민병철 건국대 국제학부 교수(선플달기국민운동본부 이사장)이 서울 화양동 건국대 서울캠퍼스에 활짝 핀 개나리꽃 앞에서 활짝 웃고 있다.                                                        김명섭 기자/msiron@heraldcorp.com

시작은 미약했다. 그러나 그렇게 시작된 선플운동의 기세는 무섭다. 지난 4월 8일 기준으로 전국 청소년들이 선플본부 홈페이지(www.sunfull.or.kr)에 단 선플은 390만개를 넘었다. 6년 새 무려 700배 가깝게 늘어난 수치다.

여기에다 각종 포털 사이트, 홈페이지, 블로그는 물론 페이스북 같은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 등에 모든 네티즌이 단 선플까지 더하면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선플이 인터넷과 모바일 공간에 현재 존재하고 있다. 그 바탕에는 ‘영어 전도사’에서 선플을 통해 사회운동가로 변신한 민 교수의 노력이 있었다. 4년 여만에 그를 다시 만나 이번엔 그의 얘기를 들어봤다.



#스파게티에 미쳤던 소년, 영어에도 미치다



6ㆍ25 전쟁을 거치며 모두가 힘든 시기를 보낼 때였다. 민병철 교수의 부친도 어려움 탓에 정든 고향을 버리고 서울로 올라와 그를 낳았다. 때문에 집안 사정은 넉넉지 않았다. 그가 영어에 빠져든 이유도 배고픔이었다.

“어릴 때 서울 연희동에 있는 한 교회에 다녔어요. 호주 선교사가 있는 곳이었죠. 일요일마다 교회에서 살았는데 종교에 빠져서가 아니라 선교사 부인이 만들어주는 미트볼, 스파게티 같은 음식이 너무 맛있어서였어요. 한창 배고플 때였으니까요. 그 선교사에게 아들이 둘, 딸이 하나 있었어요. 비슷한 또래였는데 주말마다 그 친구들과 만나 대화하고 시간을 보내다 보니 자연스럽게 영어가 늘었어요.”
 
.민병철 건국대 국제학부 교수(선플달기국민운동본부 이사장)이 서울 화양동 건국대 서울캠퍼스에서 ‘비즈니스 영어’ 수업을 진행하며 학생들과 웃고 있다. 민 교수는 학생들과 함께 ‘스마트폰 애플리케이션 개발 제안서 만들기’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있다.                                                                                                                                 김명섭 기자/msiron@heraldcorp.com

민병철은 대학(중앙대 경제학과)에 들어갔지만, 학비를 벌어야 하는 형편이었다. 호주 선교사 가족과 실생활에서 배우고 익힌 영어에 자신이 있던 그는 대학 입학 뒤 밤 마다 서울 시내 한 유명 영어학원에서 영어를 가르쳤다. 대학생 강사가 된 것이다. 주독야경(晝讀夜耕)의 생활이 이어졌지만, 학교를 다닐 수 있고 ‘영어’라는 꿈과 가까워져 힘들지 않았다.

대학생 민병철의 수업은 친구 또래인 대학생들 사이에서 곧바로 입소문이 났다. 딱딱한 문법이 아닌 실용 회화 중심이기 때문이었다. 그는 “영화로 영어를 가르친 적이 있다”며 “‘벤허’ 같은 영화가 상영될 때면 극장에 가서 양해를 구하고 대사를 전부 녹음해 강의에 활용했다”고 떠올렸다.

이 같은 유명세를 타고 대학생이던 1973년 당시 서울 남산에 있던 KBS에서 20분짜리 라디오 생활영어 프로그램을 진행했다. ‘민병철 생활영어’의 명성은 이 때 시작됐다.

[사진=김명섭 기자 msiron@heraldcorp.com]


#“한-미 오가며 2년 방송…펑크 안 내”

아직 실력이 부족하다는 생각에 민병철은 대학 졸업 후 미국 시카고로 유학을 갔다. 당시 한국에서 온 이민자 중에는 영어가 안 돼 직장에서 인정 받지 못하는 경우가 많았다. 우리나라에서 약사였던 사람이 나사공장에서, 일류대학 출신 여성이 봉제공장에서 일하던 때였다.

하지만 공부가 많았던 이들 이민자는 공장 쉬는 시간이면 ‘타임’ 같은 시사 주간지를 읽어, 같이 일하던 흑인 조장을 놀라게 했다. 회화가 되지 않는 것이 문제였다. 그는 영어 때문에 푸대접받는 교민들을 보며 어떻게 도와줄 지 궁리했다. 고민 끝에 1977년 책 ‘민병철 생활영어’가 세상에 처음 모습을 드러냈다.

“시카고 인근 트루먼칼리지라는 시립대학에서 외국 이민자를 위한 영어교육 강사로 일했어요. 무료 강습이었지만 대학에서 강의료가 나왔으니 저한테는 직업이었죠. 우리나라는 물론 각 나라 이민자를 상대로 강의를 하다보니 외국인 입장에서 영어를 익힐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은 실용구문 위주 학습이란 생각이 들더군요. 그때부터 책 집필을 계획했죠.”

1980년대 직장인의 알람 시계 역할을 했던 TV 프로그램 ‘MBC 생활영어’. 이 프로그램은 어떻게 시작된 것일까. 역시 교민들을 위한 활동이 인연이 됐다. 민병철은 한국인의 우수성을 알리고 우리 문화를 소개 해야 되겠다는 생각으로 1978년 교민들과 함께 시카고에 한국문화원이란 걸 만들었다.
 
[사진=김명섭 기자 msiron@heraldcorp.com]

그는 “‘한국 문화의 날’을 정하고 시카고시청 앞에서 교민들이 각자 음식을 준비해 포트럭 파티를 하고 태권도, 부채춤을 선보였다”며 “행사 영어 사회를 제가 맡았는데, 당시 취재를 왔던 MBC 기자 한 분이 보고 ‘영어 실력은 물론 진행도 잘 한다’며 나를 초청했다”고 회고했다.

민병철은 1979년 MBC 라디오에서 2년 가까이 생활영어 프로그램을 진행했다. 우리나라와 미국을 오갈 때여서 귀국할 때마다 15분짜리 방송 두 세달치를 녹음하고 미국에 돌아가는 일정을 반복하면서도 한 번도 펑크를 내지 않았다. 이 같은 성실성은 TV 프로그램 진행으로 이어졌다. ‘Good morning everyone. How are you?’라는 인사로 시작되는 ‘MBC 생활영어’는 그렇게 시작됐다.

“1981년이었어요. 월요일부터 토요일까지 매일 아침 6시30분, 하루 30분씩 영어 프로그램을 진행해달라고 하더군요. 겁나서 안 하겠다고 버티다 결국 맡았죠. 작가가 있었겠어요. 직접 대본을 써서 달달 외웠습니다. 그렇게 10년을 방송했죠.”
 
[사진=김명섭 기자 msiron@heraldcorp.com]

하지만 그럼에도 우리 국민의 영어 실력은 아직 탁월한 수준이라고 말할 단계는 아니다. 이에 대해 그는 우리나라 학생들이 너무 부끄러워 한다고 지적했다.

“자신감이 없는 것이 문제죠. 대학수학능력시험을 통해 듣기 능력이 많이 향상됐다고 하지만, 현재 영어 교육을 말하기 위주로 바꿔야 합니다. 취업할 때도 대화를 통해 영어 말하기 능력을 봐아죠. 그러기 위해서는 영어 교육과정도 바뀌어야 합니다.”



#“선플은 영혼을 위해 주는 수분”

앞서 밝힌 대로 민병철 교수는 가수 유니 씨의 자살을 계기로 ‘선플 운동’에 뒤어들었다. 영어 전문가였던 그가 왜 선플을 달자고 사람들에게 외쳐대는 것일까. 그는 “영어와 네티켓은 어릴 때부터 습관처럼 몸에 익혀야 자기 것이 되는 공통점이 있다”고 했다.

“영어나 선풀은 똑같이 소통의 도구입니다. ‘영어’란 도구를 활용해 세계 무대에서 자신의 역량을 유감없이 발휘할 수 있도록 돕는 거나 ‘선플’이란 수단을 통해 세상 사람들과 좀 더 긍정적이고 원만한 관계를 유지할 수 있도록 돕는 게 다르지 않습니다. 반복학습으로 영어가 입에 붙도록 하는 것과 ‘선플 과제’를 통해 선플 달기를 생활화하도록 하는 것이 차이가 없는 것처럼요.”

하지만 그를 비롯한 여러 사람의 노력에도 악플은 쉽사리 사라지지 않고 있다. 2011년 오디션 프로그램 ‘슈퍼스타K3’에서 우승한 그룹 울랄라세션의 리더 임윤택 씨가 위암으로 투병하다 지난 2월 세상을 떠났다.

하지만 포털을 비롯한 몇몇 웹사이트는 임씨의 죽음을 두고 차마 입에 담기조차 힘든 악플이 달렸었다. 그뿐만이 아니다. ‘국제 가수’ 싸이는 물론 지난해 런던올림픽에서 메달을 딴 선수들 등 악플의 폐해는 대상을 가리지 않고 점점 퍼져나가는 실정이다.

민 교수는 “악플의 폐해는 연예인, 정치인뿐만 아니라 심지어는 일반인에게까지 심각한 수준에 이르고 있다”며 “악플은 소리 없는 총과 같다”고 경고했다.

날이 갈수록 심해지는 학교폭력의 원인 중 하나도 악플이었다. 지난해 교육과학기술부(현 교육부)에서 실시한 ‘전국 학교폭력 실태조사’에 따르면 응답자 중 무려 13%가 인터넷 채팅, 이메일, 휴대전화로 욕설과 비방 등 언어폭력을 경험했다고 답했다. 심지어는 이른바 ‘왕따카페’를 만들어 학생 한 명을 여러명의 가해 학생이 욕설을 퍼붓는 등 괴롭히는 경우도 나오고 있다. 


이에 대해 민 교수는 대학 입시에 인성교육을 강화하는 방안을 제안했다. “수능 등 대입 때 인성교육에 가산점을 주는 방안을 도입해야 합니다. 가산점을 주는 거죠. 이런 방향으로 근본적으로 대입 제도를 개혁해야 학교폭력이 사라집니다. 지금은 어쩔 수 없어요. 국민 인성을 바꾸려면 인성교육에 보상을 줘야 하는 겁니다. 취업 때에는 봉사 학점이나 마일리지를 쌓은 지원자에게 기업이 가산점을, 국가가 세제 혜택을 주면 됩니다.“

민 교수는 본인도 일상생활에서 선플 달기를 실천하고 있다고 했다. 그는 “며느리(이혜승 SBS 아나운서)에게도 방송에서 볼 때마다 수시로 격려 문자를 보내고, 학생들에게도 개인 블로그를 찾아거나 문자로 ‘선플 답장’을 보낸다”고 했다.

“사람들이 나를 보고 동안(童顔)이라고 합니다(웃음). 얼굴 등에 스킨로션 등을 발라 촉촉하게 해서 피부에 수분을 주는 것이 비결입니다. 선플도 영혼에 수분을 주는 거라고 생각합니다. 선플로 다른 사람을 격려해주는 것은 남의 하루를 즐겁게 하고, 자신의 인생에도 ‘영양’을 주는 겁니다.”

마침 민 교수가 사진을 찍으러 서울 화양동 건국대 교정에 핀 개나리꽃 앞에서 포즈를 취할 때였다. “개나리를 보세요. 저 예쁜 꽃 앞에서 우리가 감히 나쁜 말을 하기 쉽지 않겠죠. 우리가 꽃을 볼 때처럼 온ㆍ오프라인에서 아름다고 고운 말만 썼으면 좋겠는데…. 어려울까요.”

신상윤 기자/ken@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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