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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해지는 천수만은 보라색 도화지…새들은 검은 점을 그리고…
[서산=박동미 기자]“아유, 그렇게 달려가도 소용없어요.”

미동도 않는 새를 향해 달려보려고 했건만, 동행한 문화해설사가 만류한다. 이른 아침과 저녁 무렵 그리고 식사시간이 되면 어김없이 날아오르는 생물이니 참고 기다려보라고 한다. 시베리아에서부터 3박4일을 쉬지 않고 날아온 기러기떼는 지금 우리 땅에서 쉬고 있다. 잔뜩 에너지를 소비한 새에게 예정에 없는 ‘비상’은 스트레스일 뿐이다. 이곳 사람은 이미 새와 공존하는 법에 익숙하다. 부르지도 쫓지도 말아야 한다. 천수만(충청남도 서산시 부석면ㆍ고북면 일대) 인근에 터를 잡고 사는 숙명이다.

이곳엔 4700만평 간척지가 펼쳐진다.

해설사는 “5000만 전국민이 누울 수 있을 크기”라며 명쾌하게 설명한다. 

해지는 천수만의 하늘이 보라빛으로 물들면, 기러기떼들이 안식처를 찾아 호수 위 모래섬으로 날아든다. 
                                                                                                                                                                                 [사진=서산시 제공]

이 광대한 평야 곳곳에 그리고 하늘빛이 곱게 물드는 간월호 모래톱 위에 검은 점이 촘촘하다. 1980년대 초 고 정주영 현대그룹 회장이 ‘불도저’처럼 밀어붙인 간척사업 이후 볼 수 있게 된 신(新)풍경이다. 천수만 일대에 방조제가 세워지면서 간월호ㆍ부남호 두 개의 인공 담수호가 생겼고, 갯벌을 메워 만든 대단위 농경지와 함께 이곳은 겨울철 200여종 30여만마리의 새가 찾아오는 세계적 철새 도래지가 되었다. 특히 가창오리는 전 세계 무리의 90% 이상이 이곳에서 관찰될 정도라고 한다.

“운이 좋으면 오늘 흑두루미와 황새도 볼수 있어요. 아, 가끔 꼬리만 까만 흰기러기도 있죠. 검은 기러기 무리에 도도하게 혼자 끼어 있는 녀석인데, 우리나라엔 100여마리밖에 오지 않는다네요.”

아무래도 운이 좋지 못한 것 같다. 흑두루미와 황새는커녕 일몰시간이 다가오는데, 활공하는 기러기떼도 보기 힘들었다. 게다가 올해는 가창오리의 방문도 늦다. 최근 바뀐 영농법은 가창오리가 좋아하는 낱알을 많이 남기지 않기 때문이다. 더욱이 추수가 끝나면 볏짚을 깨끗이 수거해 소 먹이로 주니 철새의 발길이 뜸해질 수밖에. 하지만 볏짚 수거로 농가소득도 올리고, 이를 먹고 소가 구제역 파동 때도 굳건히 버틴 고품질 서산한우가 된다고 하니 “철새를 돌아오게 하라”며 마냥 떼를 쓸 수도 없는 노릇이다. 

천수만에 밤이오면, 가창오리는 먹이를 찾아 논으로 가고, 간월호 모래톱 위는 기러기떼들의 안식처가 된다. 
                                                                                                                                                       박동미 기자/pdm@heraldcorp.com

안면도를 마주하고 있는 천수만은 일반인의 철새 탐조뿐만 아니라 사진작가도 많이 찾는 곳. 촬영을 위한 ‘연출’은 엄격히 금하고 있다. ‘군무’를 보기 위해선 기다리는 수밖에 없다. 해가 뉘엇뉘엇 지기 시작하고 바람이 세어진다. 사람 마음은 바빠지는데 새는 느긋하다. 파란 하늘이 회색 빛이 되는 듯 싶더니 이내 붉게 물든다. 구름 있던 자리는 신비로운 보랏빛마저 감돈다. 형용할 수 없이 아름다운 낙조에 ‘군무는 다음 기회에’하며 마음을 비우는데, 일행 중 한 명이 “우와”하고 소리친다.

머리 뒤편 저 멀리 논에 웅크리고 있던 수만마리 기러기가 ‘퍼드득 퍼드득’ 날갯짓을 시작한다. 간절히 바라도 소용없고, 어설픈 연출에도 꿈쩍 않던 새가 이미 수백편대를 꾸렸다. 저들의 목적지는 호수 위 모래섬. 가창오리가 밤에 먹이를 찾아 논으로 가는 것과 반대로, 기러기는 일과를 마치고 취침을 위해 호수 위로 이동한다. 회오리바람처럼 머리 위를 스친 수만마리 기러기떼가 호수 위에서 춤을 춘다. 어느새 보랏빛은 사라지고 하늘은 검붉다. 새는 날갯짓과 활상(날개를 펼친 채로 미끄러지듯이 나는 방법)을 거듭한다. 흡사 몸부림이다. 난다는 것은 그 자체로 공기의 저항을 이겨야 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누가 가르치지도, 시키지도 않았는데 일사불란한 그 모습에 감탄을 넘어 경외감마저 든다.

천수만은 신년 일출 여행지로도 인기가 높다. 가을엔 지는 해를 보고, 겨울엔 뜨는 해를 보는 것도 좋다. 그 어느 때나 새는 함께한다.
 
pdm@heraldcorp.com 

천수만 철새도래지는 일반인들 뿐만 아니라, 수많은 사진작가들이 철새들의 군무를 보기 위해 찾아오는 곳이다. 촬영을 위한 연출은 삼가고, 새들이 날아오르는 새벽녘이나 낙조 시간에 맞춰 조용히 기다려야 한다. 
                                                                                                                                                      박동미 기자//pdm@heraldcorp.com
일사불란하게 편대를 조직해 날아오르는 철새들의 군무를 보면 놀라움을 넘어 경외감 마저 든다. [사진=헤럴드경제DB]
검붉은 하늘이 내려앉으면 새들은 어느새 점이 되어 까마득히 멀어진다.                                             [사진=헤럴드경제D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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