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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해리빅버튼, 팬시함이 부유하는 대중음악계에 벼락처럼 쏟아진 순도 100% ‘남자’ 음악
[헤럴드경제=정진영 기자] 1997년 헤비메탈 밴드 크래쉬가 세 번째 앨범 ‘익스페리멘탈 스테이트 오브 피어(Experimental State Of Fear)’를 발표했다. 크래쉬는 이 앨범을 통해 기존 앨범에서 보여준 세풀투라 식의 스래쉬 메탈(Thrash Metal) 위에 본격적으로 인더스트리얼(Industrial) 요소를 더한 음악을 선보이기 시작했다. 3인조 라인업은 음악의 확장에 따라 트윈기타로 보강돼 4인조로 재편됐다. 패기만만한 젊은 기타리스트가 크래쉬에 새로운 멤버로 합류했다. 그러나 이 기타리스트의 이름은 다음 앨범의 라인업에서 빠져있었다. 사라진 그는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빠르게 잊혀졌다. 그리고 15년 후 그는 중년의 나이로 홀연히 TV에 나타났다. 해리빅버튼이란 밴드를 이끌고.

해리빅버튼의 기타리스트 이성수는 KBS 2TV 밴드 서바이벌 ‘탑밴드2’에 등장해 “15년 동안 밴드 활동을 못해 몸에 병이 났다”며 마이크까지 잡고 포효했다. 전형적인 80년대 풍의 직설적인 기타 리프와 정박에 가까워 단순하지만 강력한 리듬라인, 그리고 ‘말보로’ 몇 갑을 한 자리에서 모두 태운 듯한 지글거리는 마초 보컬… 해리빅버튼이 선보인 음악은 한국 대중음악계에서 사실상 멸종 상태인 하드록(Hard Rock)이었다. 해리빅버튼은 비록 우승권에 다가가지 못하고 서바이벌에서 고배를 마셨지만 수많은 시청자들의 지지를 받았다. ‘탑밴드2’ 제작진이 KBS 시청자 게시판을 통해 벌인 ‘다시 보고 싶은 밴드’ 설문 조사 결과에서도 1위는 해리빅버튼의 차지였다. 여세를 몰아 ‘해리빅버튼’은 지난달 29일 데뷔 앨범 ‘킹스 라이프(King’s Life)’를 발표했다.

앨범은 재킷 아트워크 속 프로복서의 움켜쥔 주먹 같은 고밀도의 하드록 9곡으로 중무장하고 있다. 이성수는 지난 15년 간의 음악적 갈증을 이번 앨범 수록곡 전곡을 직접 작곡하고 프로듀싱 함으로써 풀었다. 심지어 아트워크까지 직접 맡는 정성을 보였다. 모양만 밴드인 가수들이 절대로 흉내 낼 수 없는 땀 냄새 풀풀 나는 순도 100% ‘남자’의 음악이 첫 트랙부터 벼락처럼 쏟아진다. 그루브감이 느껴지는 쫀득한 기타 리프와 보컬이 매력적인 ‘Angry Face’로 포문을 여는 앨범은 정직한 하드록 넘버 ‘Stand For You’, 넘치는 드라이브감과 중독성 강한 후렴구로 헤드뱅잉을 유도하는 ‘King’s Life’, 직설적인 가사로 청자를 도발하는 ‘TV Show’, 어지간한 스래쉬 메탈을 뺨치는 강력한 사운드로 자극하는 ‘Fxxx You Very Much’까지 쉴 새 없이 달린다. 이쯤에서 청자의 숨을 잠시 골라주는 ‘The Road’는 하드록 앨범에 슬로우록을 위해 마련된 자리에 정확히 삽입된 슬로우록이다. 이어 해리빅버튼은 육중한 사운드와 보컬로 청자를 압도하는 이 앨범의 가장 강력한 곡 ‘Desire’, 슈퍼키드 허첵과 장미여관 육중완 등이 코러스로 함께한 ‘Everything is Fine Except Money’로 자신들의 정체성을 다시 한 번 보여준 후 또 다른 슬로우록 ‘어항 속의 고래’로 앨범의 대단원을 맺는다.


4번째 트랙 ‘TV Show’와 9번째 트랙 ‘어항 속의 고래’를 제외하곤 모두 영어 가사이지만 최소한의 독해력만으로도 의미를 파악할 수 있을 정도로 해리빅버튼은 결코 돌려서 음악을 말하지 않는다. 그러나 촌스럽진 않다. 야성미로 가득하지만 잘 빠진 사운드에선 세련미까지 느껴진다. 마치 지프 랭글러 루비콘 최신 모델처럼.

이들이 지난 8월에 발매한 미니앨범 ‘Hard N Loud’와 이번 앨범의 사운드 차이를 미묘하나 확연하게 구분 짓는 것은 마스터링의 차이다. 콘(Korn), 뮤즈(Muse), 그린데이(Green Day) 등 세계 정상급 밴드들의 앨범을 마스터링(Mastering/달리 녹음된 여러 곡의 음색과 소리를 전체적으로 균형 잡히도록 통일해 주는 작업)했던 엔지니어 테드 젠센(Ted Jensen)의 손길은 음악에 세련미를 더해준 일등 공신이다. 오래된 음악으로 추억 팔이 따윈 하지 않겠다는 밴드의 의지가 앨범 곳곳에서 드러난다. 이 같은 의지는 해리빅버튼이 음악 생산자에게 정당한 대가를 제공하지 않는 무제한 스트리밍 서비스와 과도하게 할인된 가격으로 제공되는 다운로드 서비스로 인한 피해를 알리는 캠페인 ‘스톱 덤핑 뮤직(Stop Dumping Music)’에 참여한 것에서도 엿볼 수 있다. 현재 국내 음원 사이트 정액제 가입 고객들은 해리빅버튼의 앨범 음원을 스트리밍으로 감상할 수도 다운로드를 할 수도 없다.

뮤지션은 음악으로 이야기를 한 뒤 대중의 답을 기다려야 하는 존재다. 해리빅버튼은 자신들의 활동에 상당한 타격을 줄 수 있는 중대한 결정을 내렸지만, 이들의 앨범은 초판과 재판이 5일 만에 매진돼 추가 제작에 들어가는 등 좋은 반응을 얻고 있다. 해리빅버튼은 기존 대중음악계에서 한동안 들을 수 없었던 꽤 괜찮은 이야기를 풀어놓은 셈이다.

123@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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