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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형석의 상상력 사전> 고문 기술자도 킬러도 알고보면 회사원…먹고살려니 참…
회사원, 그들은 누구인가
‘살인’빼고는 평범한 월급쟁이
회사서 시키니깐…돈 벌려면…
경직된 조직에 흔들리는 양심

영화 ‘회사원’속에 고스란히 담겨


고문을 하는 자도, 사람을 죽이는 킬러도 모두 ‘회사원’이다. 영화 ‘남영동 1985’는 고(故) 김근태 전 민주통합당 상임고문이 1985년 서울 남영동 치안본부 대공분실에 끌려가 받았던 참혹한 고문을 그린 영화다. 정치적ㆍ사회적 의미가 큰 작품이다. 고문 피해자를 통해 극악했던 독재시대의 폭력을 고발한 작품이지만, 엄청난 부조리의 또 다른 한편인 가해자의 행태 면면도 흥미롭게 묘사된다. 이 영화에서 주로 등장하는 고문 가해자들은 대략 7명이다. 말단형사 3명(이천희 서동수 김중기 분)과 중간 관리자(김의성 분), 고위 간부(명계남 분), 그리고 총책임자(문성근 분)로 이뤄졌으며, 여기에 고문 전문 기술자 이두한(이경영 분)이 가세한다. 이두한은 고문경감으로 악명이 높았던 실존 인물 이근안을 기초로 만들어진 인물이다.

이들은 서로를 ‘직원’이라고 부르며, 호칭도 일반 기업이나 기관의 체계 그대로를 따른다. 평사원 위에 계장이 있고, 그 위에 과장-전무-사장으로 올라간다. 이두한은 다른 지사로부터 파견 나온 전문가다. ‘고문’이라는 특수한 ‘업무’를 빼놓는다면 이들의 직업적 일상과 성격은 일반 직장인과 다를 바 없다. ‘평사원’들은 아직 아마추어를 벗어나지 못했지만 능력을 인정받기 위해 위에서 시키는 일은 군말하지 않고 열정적으로 수행한다. 그 와중에도 승진에 목숨 거는 인물도 있고, ‘여기 아니면 받아줄 직장이 없는’ 학벌 콤플렉스의 소유자도 있다. 계장이라는 사람은 무능력하고 상사의 명령에 헛다리 짚기 일쑤지만 충직하다.
 
영화 ‘회사원’은 흥미로운 발상을 담았다. 영화 속 주인공이 가진 직함은 ‘금속 제조회사의 영업2부 과장’이지만, 실상 업무는 청부 암살이다. ‘살인’이라는 특수한 업무만 빼면 이 회사의 직원들은 모두 보통의 ‘월급쟁이’와 똑같다.

과장은 이제 조직의 생리를 알 만큼 알고, 일도 할 만큼 해온 사람이다. ‘판단 정지, 명령 복종, 복지부동’의 자세로 일관한다. 문제없이, 말썽 없이 자리 보전하는 게 유일한 소망이다. 과잉 충성할 일도 없고, 책임 회피할 생각도 없다. 그저 시키는 대로만 한다.

임원급이 되면 다르다. 전무는 ‘실적’에 가장 적극적인 인물이다. 사장과 현장을 오가며 간첩단 조작을 주도한다. 전무가 ‘실적’으로 말한다면, 사장은 ‘이데올로기’다. 주인공에게 “광주 사태, 미국문화원 점거가 민주화 운동이냐”며 “박정희 정권 시절에 경제 발전을 이뤘다. 다소의 불편함을 감수해야 한다”고 역설한다. 주인공의 민주화 운동이 북괴가 시킨 일이며, 김일성이 사주한 국가 변란 시도라는, 철석같은 믿음을 가지고 있다.

이두한은 일종의 ‘테크노크라트(전문기술을 가진 관료)’다. 그가 고문을 하는 과정은 마치 지휘자가 오케스트라를 이끌거나 장인이 명품을 만드는 모습을 닮았다. “반정부 인사를 고문해 회개시키는 것이 애국”이라며 자신의 휘두르는 극악한 폭력을 윤리적으로 정당화한다. 정지영 감독은 고문 가해자들을 통해 거대한 관료제의 일면을 압축해 보여준다. 독재와 불의, 폭력이 어떻게 관료제를 통해 구현되는가, 개인이 거대한 부조리 체계 속 기능적 부품이 돼가는가, 집단의 이데올로기를 한 개인이 어떻게 내면화하는가를 적나라하게 드러낸다. 


11일 개봉한 소지섭 주연의 액션영화 ‘회사원’도 흥미로운 발상을 담았다. 일반 기업처럼 운영되는 청부살인 조직 속 한 남자가 주인공이다. ‘금속 제조회사의 영업2부과장’이 그가 가진 직함이지만, 실상 업무는 청부 암살이다. ‘살인’이라는 특수한 업무만 빼면 이 회사의 직원들은 모두 보통의 ‘월급쟁이’와 똑같다. 밥 먹듯 하는 야근과 잔업으로 피곤함에 절어 있다. 때로 실무 경험 없는 ‘낙하산 임원’ 때문에 열 받는 일도 있다. “일이 좋아서 하는 사람이 어딨느냐, 일이니까 하는 거지”라는 말을 입버릇처럼 달고 다닌다. 모든 회사원의 꿈이 남의 눈칫밥 안 먹고 내 사업하며 사는 것이듯 이들도 돈 모아서 카페나 할까, 장사를 할까 궁리하며 산다. 그래도 ‘대학 다니는 자식들이 있어’ 일을 그만두지 못한다. 청부살인 조직이지만 일반 기업체처럼 출장 다니고 야근하며 총이나 흉기도 ‘비품관리부서’에서 결재받아 출반납한다.

‘고문을 하는 형사도, 사람을 죽이는 청부살인업자도 모두 본질적으로는 회사원이었고, 월급쟁이였다.’ 한국 영화가 착안한 이 기발한 발상은 사회의 불의와 비리, 범죄가 관료제를 통해 어떻게 구현되는지 잘 보여준다. 또 선한 개인이라도 윤리와 도덕적 판단을 중지하고 언제든 기계 부품처럼 자신의 양심에 반하는 행동을 할 수 있게 만드는 것이 관료제의 속성임을 보여준다. 그 한편에선 모든 직장인이 느끼는 고단함이 작품의 또 다른 정서적 바탕이 된다.

그러니까, 회사원, 참 피곤하다.

suk@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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