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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프리즘> 어느 중산층 가장의 하우스푸어 전락기(轉落記).
[헤럴드경제=양춘병 기자]대기업 간부로 있는 지인으로부터 밥이나 먹자며 연락이 왔다. 바쁘다는 핑계로 통 얼굴을 보지 못했던 터라 반가운 마음에 약속 장소로 갔지만 그의 낯빛은 전에 없이 어두웠다.

식사를 하는 둥 마는 둥 마친 그가 기자에게 털어놓은 건 ‘하우스푸어 전락기(轉落記)’.

그는 지난 2005년 아내의 재촉에 못이겨 대출을 얻어 새집을 샀다. 5억원에 샀던 집 값이 불과 몇 년 새 8억~9억원을 호가하자, ‘아, 내가 너무 멍청하게 살았구나’ 하는 생각이 퍼뜩 들더란다.

즐거운 마음도 잠시, 무리한 대출 탓에 원리금 상환 압박이 몰려왔다. 집을 팔아 대출금을 깨끗이 정리했다면 문제는 달라졌겠지만, 자고 나면 가격이 오르는 집을 차마 팔 생각을 못했다.

추가대출이 어려웠던 그의 아내는 지인 몰래 저축은행을 찾았고, 그곳에서는 사업자 대출이라는 편법을 통해 6억여원의 목돈을 빌려줬다. 시중은행 대출을 모두 갚고도 돈이 남은 아내는 서울 인근에 조그마한 아파트를 추가로 매입했다.

집값이 조금만 더 오르면 처분해서 대출금을 갚을 요량이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집값은 거짓말처럼 곤두박질쳤다. 9억원이 8억원으로, 다시 7억원으로, 최근에는 매입가에도 못 미치는 급매물들이 주변에서 쏟아졌다.

설상가상으로 올 초부터는 저축은행으로부터 원금을 갚으라는 독촉 전화가 밀려왔다. 집을 팔려고 내놓았지만 사겠다는 사람이 없었다. 방법이 없었다. 자신도 모르게 연대보증인이 된 지인은 월급을 차압당했고, 그의 자녀들도 빚을 내 돈을 보탰지만 역부족이었다. 결국 온 가족을 빚쟁이로 만든 채 집은 경매에 넘어갈 위기에 처했다.

그저 남들처럼 살고자 했던 평범한 중산층 가정이 불과 7년 만에 풍비박산 난 것이다.

지인은 “애초부터 무리한 대출을 한 내가 잘못”이라면서도 “편법대출이 횡행했던 당시에는 정부가 뒷짐만 지고 있다가 이제 와서는 투자자 책임 원칙을 들먹이는 게 속상하다”고 하소연했다.

비단 이 지인만의 문제가 아니다. 하우스푸어는 한국 경제의 시한폭탄이라는 가계부채 문제를 피부로 느끼게 하는 구체적 증상이다.

현대경제연구원에 따르면 소득의 40% 이상을 대출금 상환에 쓰는 하우스푸어가 전국에 108만가구나 된다고 한다. 10가구 중 1가구꼴로 고통의 터널에 갇혀 옴짝달싹 못하고 있다.

‘투자자 책임 원칙’이라는 말은 듣기 편한 결과론일 뿐, 이들의 고통은 엄연한 ‘현재진행형’이다. 지인의 잘못된 선택이 99%의 원죄라 해도, 이를 수수방관한 정치권과 금융당국, 시중은행들 역시 책임에서 자유로울 수는 없다. 그럼에도 민ㆍ관ㆍ정은 오늘 이 시간까지 하우스푸어 대책을 놓고 갑론을박만 되풀이하고 있다.

대선을 앞둔 정치권은 나라 곳간은 안중에도 없는 듯 선심성 공약만 쏟아내고 있다. 당연히 실효성과 실현 가능성이 떨어진다. 금융당국은 시중은행에 책임을 전가하고, 시중은행은 당국의 눈치를 보며 혼선을 부채질하고 있다.

무엇보다 빚은 시간과의 싸움이다. 집값이 갑작스레 오르거나 소득이 크게 늘어나지 않는 한 하우스푸어는 늘어날 수밖에 없다. 더 많은 중산ㆍ서민층이 고통의 터널로 진입하기 전에 지금이라도 민ㆍ관ㆍ정은 대책 마련을 위해 머리를 맞대야 한다.

yang@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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