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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직자에서 금융맨으로 화려하게 변신…3개월 수습딱지 뗀 신동규 농협금융지주 회장의 ‘不狂不及’ 스토리
1997년 주미 대사관 재경관 시절 외환위기 터져…세계은행서 70억弗 차입 정부 대신 사인해 ‘우리나라 최대 빚쟁이’ 되기도

2001년 8월 국제금융국장으로 IMF 조기졸업에 기여 큰 보람…S&P와 48시간 마라톤협상 끝 국가신용등급 상향조정 이끌어내

금융위기 등 고비마다 미친듯이 일에 몰두…수출입은행 경영 혁신·서민금융상품 ‘새희망홀씨’·코픽스 도입 등 굵직한 이슈 주도

“난 좋은 시절 여유롭게 지내는 팔자 아냐” 지난 6월 농협금융에 첫발…공직 떠나보니 공직자 甲 아니면서 甲인척 산다는 생각들어


“미쳐라.”

농협금융지주 회장 취임 3개월을 맞은 신동규 회장은 농협금융 집을 짓는 데 미쳐 있다. 그러면서 ‘불광불급(不狂不及ㆍ미치지 않으면 아무것도 이룰 수 없다)’을 강조한다.

화려하게 잘 지어진 집에서 살 수도 있었지만, 다시 새집 짓기에 나서면서 ‘불광불급’을 꺼내든 신 회장. 그는 왜 또 미쳐야만 했을까.

30년간 몸담은 공직의 옷을 벗어던지고 금융맨으로 화려하게 변신한 신동규. 그러나 그 화려함 뒤에는 미치게 일할 수밖에 없었던 또 다른 신동규가 있었다.

눈물겨운 육지 생활을 경험한 경상남도 거제도 촌놈, 형제와 생이별의 아픔을 달래야만 했던 젊은이, 외환위기 당시 우리나라 최대 빚쟁이가 돼버린 공무원, 전 세계를 상대로 미치게 일했던 국책은행장, 2008년 가을 글로벌 금융위기 극복의 최전선에 선 은행연합회장 신동규. 미칠 수밖에 없었던, 미쳐야만 했던 신 회장의 ‘불광불급’ 스토리 속으로 들어가 봤다.







“뱅크런을 막아라”

1974년 행정고시에 합격한 신동규. 당시 사무관 시보(試補)는 대부분 새마을 담당 부군수 보좌관이었다. 진짜 공무원으로서 신 사무관이 처음 발령받은 곳은 국가안보회의였다. 행시에 합격하더라도 지금처럼 재경, 행정 등으로 분야가 나뉘지 않았던 시절, 그의 공직생활 시작은 짧으나마 전공과 다른 비경제부처였다.

경제에 밝은 신 사무관은 이내 재무부에서 일하게 됐다. 재무부 첫 근무지는 국고국. 관료 시절 우리나라 최대 빚쟁이가 된 신동규의 인생 2막이 올랐다.


1979~81년 관료생활 중 틈을 내 영국 웨일스대 대학원 금융경제 석사학위를 받은 데 이어, 1985~88년 아시아개발은행(ADB)에서 국제금융 및 개발금융 기법을 연마한 신동규는 재무부 국제조세과장을 거쳐 증권발행과장에 이르게 된다. 증권발행과장 시절 그의 업무는 투자신탁업계의 정상화였다.

당시 정부는 증시가 불안하면 고객이 맡긴 투신사 돈을 끌어다 증시에 쏟아부었다. 투신사들은 정부의 은행 역할을 톡톡히 했다. 지금 같으면 상상도 못할 일이 벌어지고 있었다. 1992년 초 투신업계의 부실은 이미 예고됐다.

“시간을 벌어주는 것밖에 방법이 없었습니다. 그래도 방안이 하나 있었는데, 한은 특별융자(중앙은행이 긴급한 상황이 발생했을 때 저리로 금융기관에 돈을 빌려주는 것)였어요.”

신 회장은 “당시 이용만 재무부 장관이 금융통화위원장을 겸임했는데, 한은의 사무실에서 저를 불렀습니다. 제가 ‘한은 특융밖에 없다’고 하자, 장관은 ‘그럼 그렇게 하자’고 결단을 내렸습니다.” 한은은 발권력을 동원하는 것이나 다름없는 특융에 반대했다.

그러던 중 전남 목포에서 “투신사가 망한다”는 악성 루머가 돌았다. 루머는 호남선을 타고 빠른 속도로 수도권에 진입했다. ‘뱅크런’이 곳곳에서 일어났다.

한은도 두 손을 들 수밖에 없었다. 결국 2조9000억원을 저리로 투신사에 지원하기로 했다. 1992년 5월 ‘투자신탁업계 회생을 위한 특융 조치’는 젊은 신 과장의 작품이었다. 그가 왜 미치도록 일할 수밖에 없었는지 고개가 저절로 끄덕여졌다.



DJ, 활짝 웃다

외환위기는 신동규를 또 시험대에 올렸다. 그는 1997년 여름 주미 한국대사관 재정경제참사관으로 발령나 미국 워싱턴행 비행기에 오른다. 그해 가을 외환위기가 터졌다. 그는 최전방에서 우리나라와 국제통화기금(IMF)ㆍ세계은행(World Bank)ㆍ미 재무부 간 전령 역할을 했다.

신 회장은 “워싱턴에 IMF, 세계은행, 미 재무부가 다 있지 않습니까. 티머시 가이트너 현 재무장관이 당시 차관보였는데, 그에게서 ‘본부(한국)에 연락해 개혁을 빨리 하라고 해라’고 꾸지람을 듣기도 했다”고 소개했다.

당시 차관 계약서 원본에 차입자(대한민국 정부)를 대신해 사인한 사람이 신 회장이다. 우리 정부의 세계은행 차입금은 70억달러였다. 그는 “당시 제가 우리나라에서 가장 많은 빚을 진 사람이었다”는 말로 부도 위기에 몰렸던 한국을 안타까워했다.

외환위기 졸업 때 실무책임자도 그였다. 한국은 2001년 8월 IMF와 세계은행 차입금을 조기상환하게 된다. 신 회장은 당시 담당국장인 재정경제부 국제금융국장. 돈을 빌렸던 그가 결국 빚을 갚은 셈이다. 신 회장은 “IMF 조기졸업을 실무적으로 뒷받침한 것이 가장 보람 있는 일 중 하나”라고 말한다.


같은 해 11월 S&P는 우리나라 신용등급을 상향조정(BBB→BBB+)했다. 이는 국가신용등급이 외환위기 직전 등급(A)에 접근한 의미 있는 사건이었다.

신 회장은 “진념 경제부총리에게 신용등급 상향 소식을 긴급 보고했고, 진 부총리가 당시 국책사업 행사에 참석 중이던 김대중 대통령에게 보고했더니 대통령이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고 전했다.

그는 신용등급 상향 여부를 결정하는 S&P와의 싱가포르 협상 전 워싱턴으로 날아갔다. 국제기구를 먼저 접촉해 사전 정지작업을 하는 게 유리하다는 생각에서다. 이어 싱가포르로 날아간 신 회장은 S&P와 48시간 마라톤 협상을 벌인 끝에 신용등급 상향조정이란 낭보를 국민들에게 전할 수 있었다. 며칠 만에 지구를 한 바퀴 돈 신 회장이었다. “감개무량하데.” 경상도 사나이의 입에서 사투리가 절로 나왔다.

30년간 공직생활을 한 신 회장에게 공직 후배들에게 해줄 조언을 구하자 “공직에 있는 후배들은 죽을 때까지 공직에 있을 줄 안다. 언젠가는 옷 벗고 나간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언젠가는 을(乙)이 되는데, 갑(甲)이 아니면서도 갑인 척 폼 잡고 살고 있다는 질책이다.

신동규는 2002년 금융정보분석원(FIU) 초대 원장을 거쳐 재경부 기획관리실장을 역임한 뒤 2003년 한국수출입은행장으로 변신한다.



“내 욕 많이 했을 거야”

수출입은행은 국책은행이기에 본전만 하면 된다고 생각할 수도 있을 터. 그러나 신 행장에겐 용납되지 않았다.

신 행장은 수출입은행을 서비스 정신으로 무장시킨다. 고객중심 경영 혁신을 추진하면서 프로젝트파이낸싱이나 구조화 금융 등 선진화한 수출금융서비스 지원 체계를 구축하고 플랜트 수출을 촉진했다.

신 회장은 “낡은 틀을 바꿔야 했다. 우리 수출을 지원하는 수출금융기관으로서 제대로 역할을 할 수 있는 틀을 만들어야 했다”고 강조했다.

그러기 위해선 유능한 인재가 필요했다. 국책은행으로서 지방 인재 육성이란 책임도 함께 했다. “재임 3년 동안 젊고 유능한 인재 200여명을 뽑았어요. 지방대 출신 할당제와 국어 실력이 모자라 낙방의 고배를 마시는 유학생을 위한 쿼터제를 도입했고요.”

신 행장은 뛰어다녔다. 행장 재임 시절 다닌 해외출장을 거리로 따지면 지구 15바퀴 정도. 앉아서 장사하는 수출입은행은 이제 일어서서 고객을 맞게 됐다.

행장을 마친 신 회장은 2년 정도 자신을 돌아보는 시간을 갖게 된다. 하지만 그의 열정을 아는 사람들은 그를 가만히 놔두지 않았다.

은행연합회장으로 금융계에 복귀한 신 회장은 글로벌 금융위기와 싸우면서 뒤를 돌아봤다. 남들보다 더 많이 뛰는데도 뒤처진 사람들이 눈에 들어왔다. 그는 은행권이 자율적으로 서민을 지원하는 서민금융상품인 ‘새희망홀씨’를 내놓게 된다.

미국발 금융위기가 확산되면서 우리나라 금융기관 등의 채권도 부실화하자 이를 통합적으로 관리하는 민간 전문기관을 만들자는 취지로 부실채권 처리기관인 유암코(연합자산관리)를 설립했다.

또 주택담보대출의 기준금리로 CD금리가 그 유용성을 잃자 새로운 대안으로 시중은행의 자금조달 비용을 가중 평균한 코픽스(COFIX)를 창안한다. 그는 “내가 일 좀 하지 않았어요?”라고 되물었다.


신동규가 변했다

지난 6월 농협금융에 첫발을 디딘 신 회장은 “(회장직 제의에) 응할까 말까 고민했다”면서 “새집을 지으려면 정부나 금융감독당국, 금융권, 언론, 국회 등의 협조가 필요하다. 아무래도 새집을 많이 지어본 내가 필요하지 않았겠나”고 말했다. 그러면서 “난 좋은 시절에 여유롭게 지내는 팔자와 거리가 먼 사람”이라면서 자신을 다시 한번 다잡았다.

그가 농협금융에서 제일 먼저 한 일은 노조 사무실 찾기. 연합회장 시절 은행노조들의 상급단체인 금융노조와의 협상에서도 할 말은 다 한 그였다.

신동규가 변했을까. “내가 난리법석을 떨 줄 알았나 봅니다.” 그의 저돌적 추진력을 금융인이라면 모를 리 없을 터. 그러나 신 회장은 “‘이제 나를 따르라’ 시대는 지났다”고 강조한다.

신 회장이 요즘 직원들에게 가장 많이 하는 말은 ‘소통’이다. 그는 최근 경영혁신을 위한 과제를 선정하고 그 방향을 11월쯤 발표할 예정이다. 이를 위해 간부급을 모아놓고 토론회를 연 데 이어, 과장급과 끝장토론회도 열었다. 직급별 대표선수를 모아 경영혁신 태스크포스(TF)도 만들었다.

그는 농협금융 하면 떠오르는 대표 상품이 없는 것을 안타까워하고 있다. 조만간 은행, 보험, 카드 등에서 대표 상품을 내놓겠다고 했다. 또 새로운 농협금융 문화를 만들어 나가겠다고도 강조했다.

이제 확실한 민간 영역에 들어선 신 회장. 그러나 사정은 녹록지 않다. 대내외 경제여건 악화로 대부분 금융회사의 실적이 부진하다.

하지만 위기 때 빛을 내는 불광불급의 신 회장. 3개월 수습을 갓 뗀 그를 금융권이 주목하고 있다.

정리=조동석 기자/dscho@heraldcorp.com

사진=박해묵 기자/mook@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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