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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당신의 여가 ‘몇級’ 입니까?
특정 어종만 잡는 낚시마니아…프로급 아마추어 야구선수…일년치 휴가 봉사활동에 올인하는 직장인…성취감 위한 ‘진지한 여가’ 바람
우리는 특정한 사람을 파악하기 위해 “어떤 일 하세요?”라는 질문을 던지곤 한다. 그러면 상대는 명함을 건네는 경우가 많다. 그 사람을 알기 위해 “어떻게 노세요?”라거나 “당신의 여가는 무엇인가요?”라고는 잘 묻지 않는다. 하지만 이제 여가생활도 개인의 삶을 규정짓는 큰 잣대가 되고 있다. 이미 일부 개인의 삶 속에는 여가가 중심적인 위치로 들어오고 있다. 서유럽 사람들은 여행을 가기 위해 회사에 사표를 내는 사람도 적지 않다. 물론 노동 시장이 우리보다 유연한 나라이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지만, 여가가 삶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매우 높다는 말이다.

우리도 자신의 일에 따라 여가가 결정된다는 기존의 생각이 바뀌면서 여가 때문에 사람의 직업이 바뀔 수도 있고, 삶 전체가 변화되는 현상이 목격되기도 한다. 특히 여가에 깊이 빠져 있는 ‘진지한 여가(Serious Leisure)’일수록 삶의 질과 자아정체성은 밀접히 연관돼 있다. 세계적인 여가학자이자 캐나다 캘거리대의 석좌교수로 재직 중인 로버트 스테빈스(74) 교수는 여가를 ‘일상적 여가(Casual Leisure)’와 ‘프로젝트형 여가’ ‘진지한 여가’ 세 가지로 구분하면서 ‘진지한 여가’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다.

▶일상적 여가, 프로젝트형 여가, 진지한 여가=‘일상적 여가’란 즐기기 위해 어떤 특수한 훈련을 받을 필요가 없으면서 직접적이고 내재적인 보상이 따르는, 상대적으로 짧고 즐거운 핵심 활동이다. TV 보기, 낮잠, 섹스, 친구와의 사교적인 대화, 아름다운 경치 감상, 술 마시기 등이다. ‘프로젝트형 여가’는 자유시간에 자주는 아니지만 짧은 기간에 어느 정도 복잡하게, 일회적 또는 일시적인 창조적 수행을 말한다. 생일파티, 결혼식, 환갑잔치, 박물관 특별 전시 가이드 등이 프로젝트형 여가에 해당한다. ‘진지한 여가’는 특수한 기술ㆍ지식ㆍ경험을 획득하고 표출하는, 충분히 본질적이고 재미있고 참여자가 경력을 쌓아가는, 성취감 있는 체계적인 활동이다. 돈과 시간도 적지 않게 투자해야 하는 경우가 많고, 몰입의 정도가 높다. 또 진지한 여가는 세부적으로 ‘아마추어형’ ‘취미활동형’ ‘자원봉사형’ 등 세 가지로 분류된다.

여가에 깊이 빠져 있는 ‘진지한 여가’라는 용어가 조금 낯설다면 ‘전문화된 여가’ 또는 ‘레저 마니아’ 정도로 이해하면 된다. 접사 카메라를 들고 야생화 탐사를 다니거나 탐조활동을 하기도 하고, 동남아로 스킨스쿠버 투어를 떠나는 사람, 마라톤, 인라인스케이트, 댄스스포츠, 플라이낚시, 해외 봉사활동 등도 진지한 여가에 해당한다. ‘진지한’과 ‘여가’가 합쳐진 단어는 언뜻 모순적인 조합 같다. 노는 건데 그냥 놀면 되지, 무슨 진지함이냐는 항변이 나올 수 있다. 하지만 다음 케이스들을 보면 여가에서의 진지함에 대해 고개를 끄덕일 것이다.


▶진지한 여가를 추구하는 자=시내 유명 음식점 대표인 조성일(47) 사장은 아침 일찍부터 전일 매출과 음식 재료 등을 점검한 다음, 여느 때처럼 골프연습장으로 향한다. 그는 세 차례나 전국 아마추어 골프대회에서 우승했다. 골프는 단순한 취미를 넘어, 그의 삶이 됐다. 주변 사람들도 그를 ‘조 프로’라고 부른다. 프로골퍼들과도 자주 라운딩을 하고, 새로운 골프 클럽이 출시되면 대리점 사장에게서 전화가 온다.

정소희(38ㆍ여) 씨는 퇴근 후 책상에 앉아서 라오스 시골 마을의 여름학교에서 사용할 교재 목록을 작성하고 있다. 올해 벌써 15년째다. 무역 관련 업무를 담당하는 그녀는 라오스 여름학교 참가를 위해 일 년치 휴가를 7월 한 달에 모두 사용한다. 매년 7월에는 그녀가 회사에 없다는 사실을 회사, 동료 그리고 바이어들까지 모두 알고 있다.

어떤 아마추어 야구 선수가 “우리 수준은 교회 리그 따위와는 비교가 되지 않는다. 프로구단이 우리를 스카우트했으면 좋겠다”고 말하고, 어떤 아마추어 연기자가 “우리 커뮤니티 극장은 수준 높은 드라마를 원한다. 고교생이나 대학 연극반과는 차원이 다르다. 우리는 연기를 진지하게 생각하고 각자의 파트를 완벽하게 수행하려고 한다”고 말한 데서 진지한 여가라는 용어가 1970년대 중반에 생겨났다.

일본에는 은어나 산천어ㆍ감성돔 등 특정한 어종만 잡는 낚시 마니아가 적지 않다. 우리처럼 한 사람이 바다ㆍ저수지ㆍ계류 낚시 전부를 다 하는 문화와는 다르다. 이들은 한국의 하동 섬진강이나 울진 왕피천으로 은어를 잡으러 원정을 오기도 한다. 어종마다 최고의 고수는 명인(名人)으로 인정받는다. 이들은 물고기가 수질의 척도라는 점에서 환경 보존 운동에도 앞장선다. 일본의 레저 마니아는 한 가지에 미친 듯이 몰두하는 ‘오타쿠 문화’와 신제품이 출시되면 가장 먼저 구입해 제품 기능을 파악하는 ‘얼리 어댑터’ 문화와도 연관된다.

▶진지한 여가가 제공하는 성취와 보상, 비직업적 열정에 대한 진지함=하지만 이렇게 진지한 여가를 경험하는 사람이 과연 몇 명이나 되겠냐고 할지 모르지만 숫자보다는 여가의 속성상 우리의 삶 속에 중요하게 다뤄야 할 성질의 것이 돼가고 있음은 부인하기 어렵다.

이들은 모두 ‘비직업적 열정에 대한 진지함’을 강조한다. 단순히 ‘좋은 시간’이라고만 말하는 기존의 여가 개념으로부터 분명한 거리를 두고 있다. 이들은 이런 활동 속에서 부수적으로 따라오는 여가 경력을 발견하고, 자아실현과 성취감 등의 혜택과 보상을 받는다. 실제로 사람들은 일보다는 진지한 여가활동에서 더 강한 정체성을 확인한다. 그래서 일을 할 때는 ‘도대체 지금 내가 뭘 하고 있는 거지?’라는 생각을 종종 하지만, 진지한 여가를 할 때는 시간이 가는 줄 모른다.

일상적 여가가 제공하는 보상이 유쾌함과 즐거움이라면, 진지한 여가를 통해서는 성취와 보상ㆍ자아실현 등을 얻을 수 있다. 특히 진지한 여가는 장애인에게 자기존중과 자부심을 줄 수 있고, 공동체 승인과 사회 통합으로 이어질 수 있다는 연구도 있다. 따라서 진지한 여가는 가족관계, 여가교육, 은퇴와 실업, 관광, 조직, 공동체 민족, 젠더, 장애, 성인교육 등과 관련해 많은 연구를 필요로 한다.

스테빈스 교수는 “공부를 하고 일을 하는 것만으로는 자아를 계발하고 개성을 발휘할 수 없다. 진지한 여가를 통해서 자신을 계발하고 나만의 인성을 만들어 가야만 한다. 한국 사회는 여태까지 공부하고 일만 해왔으니 이제는 진지한 여가를 할 때”라면서 “행복의 열쇠인 최적의 여가 라이프스타일을 추구하기 위해서는 진지한 여가를 비롯한 세 가지 형태의 여가를 잘 결합해 자신에게 맞는 최적의 구성을 만들어내 행복지수를 높여야 한다”고 조언한다. 여가시간이 증대하니 오히려 주말에 다른 일을 해야 하는 ‘투잡족’ ‘스리잡족’이 늘어나 여가의 양극화가 초래되고 있는 한국 사회가 귀 기울어야 할 말이다. 

서병기 선임기자/wp@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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