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의 침실 밖에 버티고 선 내시가 하나 하나 이르면 방안 벗은 몸으로 누운 왕과 중전이 합궁한다. 진기한 풍경이다.
야하고 뜨겁고 아름다웠다. 남녀 배우들이 실오라기 하나 남기지 않고 벗은 몸은 카메라 앞에서 수줍음 없이 엉켜들었고, 구중궁궐 속 권력과 음모의 드라마는 반전과 비틀림을 거듭하며 거침없이 진전했다. 결국 남자들의 권력은 헛되고 헛됐으며 마지막에 웃은 것은 어미의 본능이었다.
21일 서울의 한 극장에서 언론시사회를 통해 처음 공개된 ‘후궁-제왕의 첩’(감독 김대승)이 관능적인 영상과 격정적인 드라마로 여름 극장가의 화제를 예고했다. 오해와 반목, 배신과 음모의 활극을 펼치는 인물들은 죄책감과 권력욕, 살해욕, 성적 욕망 등 어둡고 불길한 컴플렉스에 사로잡혀 있었다. 셰익스피어의 비극 어느 한 편에서 튀어나와 우리 전통 복식으로 갈아입고 궁궐로 찾아든 듯했다.
조선왕조의 어느 한 때가 배경이다. 재임 중인 왕(정찬)의 이복동생인 성원대군(김동욱)은 궁내 어지러운 권력투쟁을 피해 장안을 떠돌다 신참판의 딸 화연(조여정)을 만나 첫 눈에 운명적인 사랑에 빠져든다. 하지만 화연은 이미 아버지가 아들처럼 거둬 기른 뿌리없는 사내 권유(김민준)와 사랑하는 사이. 현재 왕을 내쫓고 아들인 성원대군을 왕위에 올려 가문을 일으키려는 데 혈안이 된 대비(박지영)는 후사없던 왕의 왕비로 화연을 간택해 입궐시키고, 성원대군과 권유는 사랑을 잃고 좌절한다. 그리고 5년 후, 왕은 독살이 의심되는 죽음을 맞고, 성원대군이 드디어 곤룡포를 입게 된다. 권력의 주인이 바뀌고 궁중에는 거센 피바람이 부는 가운데 성원대군은 죽은 왕이자 이복형의 부인인 화연을 향한 불같은 욕정에 괴로워하고, 가문을 득세시킨 대비는 훗날의 걱정을 없애고자 화연과 화연이 낳은 상왕의 아들을 없애려고 한다. 화연과 결별하며 남자로서의 모든 것을 잃었던 권유는 내시로 다시 나타나 권력의 소용돌이에 휩쓸린다.
이복형을 죽음으로 내몰고 조카의 자리를 빼앗았다는 죄책감과 형수를 향한 금지된 욕망에 괴로워하는 성원대군 역 김동욱과 어미의 본능으로 권력을 지키려는 대비 역의 박지영, 옛 남자 권유를 향한 지고한 사랑과 상왕에 대한 책임감뿐 아니라 자신의 씨를 목숨걸고 보호하려는 화연 역의 조여정, 자신을 ‘거세’시킨 세상을 향한 복수심과 운명의 여인 화연을 향한 순정 속에 갈등하는 권유 역 김민준 등 모든 배우들의 앙상블이 거미줄같이 얽힌 어지러운 권력과 욕망의 그물을 완성한다. 욕망의 절정에선 달콤하거나 폭력적이거나 황폐한 정사가 펼쳐져 관능적인 살색의 향연이 스크린을 채운다. 광기에 찬 왕이 내시의 ‘거세된 남성’을 확인하는 파격적인 장면도 여과없이 그대로 담겼다. 수십년간 궁에서 ‘보이지 않는 눈과 들리지 않는 입’이 됐던 내시와 상궁이 주고받는 밀담은 권력의 허망함을 함축적으로 보여준다. 만인천하의 화려한 보위부터 ‘성은’을 입고 버려지거나 씨앗싸움에서 패한 궁궐의 여자들이 유령처럼 기거하는 비밀 감옥(미궁)까지 미술과 세트도 눈길을 사로잡는다.
이형석 기자/suk@heraldcorp.co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