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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연극, 시대의 얼룩을 닦다
‘모범생들’ ‘푸르른 날에’ ‘칠수와 만수’ 잇달아 막올라…때로는 비틀고 때로는 비웃으며 우리시대 자화상 그려
상위 3% 위해 경쟁하는 무서운 ‘모범생들’…자살·왕따문제 등 그대로 담아내

‘푸르른 날에’ 고문장면 등 생생히 묘사…잊혀져 가는 그날의 함성 5·18민주화 운동 기록

30년 지나도 같은 이야기인 ‘칠수와 만수’ 빈부격차·소통의 부재 등 오늘날 한국 사회 풍자


영화 ‘왕의 남자’에 나오는 춤패 공길은 탈을 쓰고 줄을 타며 세상을 조롱했다. 하나의 스토리로 누군가를 대신 조롱해주는 모습을 보며 카타르시스를 느끼는 관객이 있었고, 탈춤은 이런 대리만족의 도구였다.

탈춤과 타령, 연극은 형태를 달리하긴 했지만 각각의 공연예술은 비웃고 비틀고 때론 진지하게 관객들의 세상에 대한 욕구불만을 해소해왔다. 과거로부터 연극에는 대중의 요구로 인해 사회비판적 요소가 들어갈 수밖에 없었고, 지금도 다양한 연극이 세상에 대한 신랄한 비판을 듣고자 하는 관객들을 기다리고 있다. 전통극에 세상을 비꼰 탈춤이 있었다면, 근대의 유명한 풍자극으로는 ‘품바’가 있다. ‘품바’는 각설이타령과 마당극이 결합된 무대극 형식이다. 연극연출가 김시라가 지난 1981년 전남 무안군 일로읍 월암리 공회당에서 연출하고 초연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일제강점기와 광복 이후 사회를 신랄하게 묘사하고 있는 이 1인극은 걸인 행세를 하며 살아야 했던 당시 사회를 천박하지만 희화해 그렸다.

이런 연극들은 사회비판 역할도 하지만 동시에 민중의 심리적 탈출구가 되기도 한다. 내가 표현하지 못한 말과 행동들, 즉 불만을 많은 사람들에게 공개적으로 시원하게 쏟아내는 것이다. 분명 이런 연극에는 동시대의 사회상을 반영하고 있고, 과거를 다룬 연극들도 당시의 모습을 보여준다. 요즘 막을 올린 작품 중에도 우리 사회의 자화상을 다룬 연극들이 있어 눈길을 끈다.

최근 이슈가 됐던 왕따 문제, 중학생 자살 사건, 내신성적 향상을 위한 부정행위 등의 내용을 담고 있는 연극‘ 모범생들’의 한 장면.                                        [사진제공=이다엔터테인먼트]

▶연극 ‘모범생들’, 상위 3%를 위해 경쟁하는 무서운 아이들= 3개월간의 ‘시즌 1’ 공연을 성공리에 마치고 지난 4일부터 ‘시즌 2’를 시작한 연극 ‘모범생들’은 학교 내에서 벌어지는 각종 문제와 어른으로 성장하는 모습을 그린 작품이다.

최근 이슈가 됐던 왕따 문제, 중학생 자살 사건, 내신성적 향상을 위한 부정행위 등의 내용을 담고 있는 ‘모범생들’은 ‘학창 시절에 정말 저런 아이가 있었어’라는 생각이 들 만큼 생생하고 현실적인 계층별 인간 군상을 그렸다.

명문 외고 3학년 명준은 내신성적을 비관해 자살을 시도하지만 실패하고, 이기적이고 야무진 같은 반 수환과 함께 ‘커닝’을 시도한다. 성적에 전혀 관심 없고 힘세고 착하기만 한 건달 종태는 커닝 모의를 들킨 두 사람의 꾐에 넘어가 부정행위를 공모한다. 상위 3%의 얄미운 반장 민영은 돈을 주고 답안지를 산다는 의혹을 받는 인물. 답을 공개하라며 세 사람으로부터 구타와 가혹행위, 왕따를 당한다. 연극은 등장인물을 통해 대한민국 상위 3%로 진입하기 위한 욕망 때문에 비참해지고 치열해지는 모습을 관객들에게 보여준다. 극 중에서는 배우들에 따라 연출이 달라지기도 한다. 출석을 부르는 장면에서 민영은 친구들의 이름을 관객들도 눈치채지 못하게 정치인의 이름으로 바꿔 부르기도 한다.

모범생들은 연극을 통해 사회문제적 현상에 대한 대안을 제시하지 않는다. 작가는 단순히 보여줌으로써 관객의 가슴이 먹먹할 정도로 현실을 절감하도록 유도한다.

▶5ㆍ18 민주화운동의 그날을 잊지 않게… 연극 ‘푸르른 날에’= 오는 20일까지 서울 남산예술센터 드라마센터에서 공연되는 연극 ‘푸르른 날에<작은 사진>’는 5ㆍ18 민주화운동을 기록한 연극이다. 5ㆍ18 당시 군부의 고문 장면을 생생하게 묘사한 이 작품은 당시의 사회상을 지금의 우리가 느낄 수 있도록 몇 가지 장치를 준비했다.

특히 극 중간에 무대 2층에서 포로들이 속옷만 입고 개천으로 끌려가는 장면이나 고문받는 장면들은 실제 당시의 사진을 직접 참조했다. 도청 앞에 모여서 무기를 들고 쳐들어가는 장면 역시 영화만큼 생생하게 표현했다. 배경음악인 폴 앙카의 ‘다이애나(Diana)’와 비틀스의 ‘렛 잇 비(Let It Be)’ 역시 당시 대학생들이 자주 들었던 팝송을 통해 시대상을 반영하고자 했다.


▶‘칠수와 만수’, 30년이 지나도 같은 이야기들= 연극 ‘칠수와 만수’는 원래 대만의 소설가 황춘밍(黃春明)의 ‘두 페인트공’을 오종우가 1986년 희곡으로 만들어 국내 무대에 올린 작품이다. 당시 관객들에게 큰 호응을 얻어 88년에는 영화로 만들어져 배우 안성기와 박중훈 콤비가 출연하기도 했다.

동시대에 맞게 작품을 각색해 2012년 새로운 ‘칠수와 만수’를 보여주겠다고 나선 극단 연우의 유연수 연출은 “원작이 급속한 산업화로 물질문명으로 소외돼가는 인간 군상을 보여줬다면, 한국으로 넘어오면서 우리 사회 속 불합리나 빈부 격차, 가난의 대물림, 가족의 해체, 소통의 부재 등을 전체적으로 풍자했다”고 자평했다.

여러 세월이 지났음에도 작품은 그 당시 이슈인 빈부 격차, 가족의 해체 등의 요소를 그대로 가져왔다. 광화문의 FTA 반대 시위대가 경찰과 대치하는 장면, 주인공의 직업이 복서에서 가수 지망생으로 변한 것을 제외하곤 공감도는 오히려 더 높아졌다.

문영규 기자/ygmoon@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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