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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화산도, 비극의 사무라이도…그 섬에 살아 있다
‘일본의 나폴리’가고시마…메이지유신 이끈 사이고 다카모리의 고향, 영화같은 스토리가 숨쉬는 곳
코발트빛 태평양에 말걸고
온천욕 즐기며 자연 만끽

임란때 끌려간 도공의 후예
심수관家 15대째 예술혼 피워


일본 규슈(九州)의 최남단에 위치한 가고시마 현은 아름다운 항구도시다. 느낌은 다르지만 통영이 ‘한국의 나폴리’라면 가고시마는 ‘일본의 나폴리’로 불린다. 코발트 빛 태평양이 오히려 잔잔하게 느껴지는 곳이다.

일본이 지진과 후쿠시마 원전사고로 요즘 규슈 여행객이 늘어나고 있는 가운데 규슈의 최남단 가고시마도 인기 여행지로 각광받고 있다.

가고시마에서는 일본의 웬만한 시골처럼 한적하게 여행을 하며 여유롭게 온천욕을 즐기고 싱싱한 바다회를 맛볼 수 있고, 바쿠후(幕府) 시절과 메이지(明治) 유신 시기의 흔적을 접할 수 있다. 다른 지방과 차별화된 볼거리는 지금도 화산 활동으로 연기를 내뿜고 있는 사쿠라지마 활화산 정도다.

그런데 작은 고장인 가고시마가 일본을 근대화시킨 메이지 유신 3걸 중 사이고 다카모리(西鄕隆盛)와 그의 친구 오쿠보 도시미치(大久保利通) 등 무려 2명의 고향이라는 사실을 알면 조금 다른 느낌으로 다가온다. 일본의 근대화는 대륙 침략, 한반도 침략 정책과도 연계돼 있기 때문이다. 사이고는 정한론(征韓論)을 주창하기도 했다.

하급 무사 출신인 사이고는 1868년 메이지 유신을 성공시킨 일등공신이다. 막부 시대에는 중앙집권국가를 만들지 못하고 막부로부터 영지를 인정받아 자치권을 행사하는 수많은 다이묘(大名)들의 지배하에 있었다. 사이고 등이 봉건적인 막부 체제를 종식시키고 근대의 시작인 왕 중심의 새로운 통일정권을 탄생시켰다. 그래서 사이고는 일본에서는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와 맞먹는 영웅으로 추앙받는다.

가고시마 지역의 영주였던 시마즈 마쓰히사가 지은 별장이자 정원으로서의 명소인 ‘센간엔’. 바다 건너편의 사쿠라지마를 석가산(石假山)으로, 앞의 긴코만을 연못으로 삼을 수 있다. 이렇게 정원이 확장되면서 웅대한 경치를 감상할 수 있다

가고시마 현 곳곳에는 사이고의 동상과 유적이 있다. 도쿄 우에노 공원에도 개를 끌고나온 모습의 사이고 동상이 있지만, 가고시마에는 사이고의 이야기를 빼면 뭔가 허전할 정도다.

사이고는 일본 남자의 평균 신장이 145㎝ 정도였던 당시 180㎝가 넘는 거구였으며 부리부리한 눈이 범상치 않음을 느끼게 한다. 영화 ‘라스트 사무라이’에서 와타나베 켄이 연기한 사무라이 대장 가쓰모토 영주는 사이고를 염두에 두고 쓰여졌다고 한다. 그가 중앙정부와 맞서 싸운 세이난 전쟁에서 자살로 생을 마감했다고 하는 시로야마(城山) 언덕의 동굴은 일본인에겐 성지와 같은 곳이다. 특히 ‘비극의 히어로’라는 스토리텔링을 유난히 좋아하는 일본인에게 사이고는 적당한 ‘다크 아이돌’이다.

사이고가 지방에서 아무리 힘이 있는 무사라 해도 도쿠가와 막부 체제를 무너뜨리기는 쉽지 않았다. 그래서 ‘유신 3걸’ 중 또 한 사람인 야마구치 현의 쟁쟁한 무사 기도 다카요시(木戶孝允)와 동맹을 맺어 힘을 합쳐 막부를 공격했다. 둘은 사이가 좋지 않았다. 이들을 연합시키는 일은 사카모토 료마(板本龍馬)가 맡았다. 사카모토가 일본 근대화의 영웅으로 일컬어지게 된 이유다. 또 전후 최고의 소설가로 인정받는 시바 료타로의 소설 ‘료마가 간다’의 주인공이 돼 NHK에서 집중 조명받을 수 있었다.

사카모토는 일본에서 온천으로 신혼여행을 간 첫 번째 인물이라고 알려져 있다. 19세기 중엽 그가 신혼여행을 갔던 기리시마 온천이 가고시마에 있다. 사카모토는 이곳에서 사이고를 만나 두 무사를 중재했다. 막부 시절에는 행정구역이 지금의 현(縣)이 아니라 제후가 통치하는 영지를 말하는 번(藩)으로 불렸다. 가고시마는 사쓰마번, 야마구치는 조슈번으로 각각 불렸으며 사카모토가 주선한 이들 간의 동맹을 ‘샷조동맹’이라 한다.

메이지 유신 3걸은 모두 메이지 신정부의 요직에서 일하다 40대의 나이로 정적에 의해 제거되거나 자결로 생을 마감한다. 조슈번의 수장인 기도 다카요시에 이어 조슈번의 실권을 장악했던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가 유신 2기의 실세로 부상, 일본의 초대 내각대신으로서 조선강제합병을 무리하게 추진하다 안중근 의사에게 저격당한 사실은 한국인이라면 누구나 아는 역사다.


그런데 일본은 기껏해야 국가도 통일하지 못하고 수백명의 다이묘들이 싸우던 시절이 불과 얼마전인데 어떻게 조선을 강제 침탈할 수 있었을까? 18세기 영ㆍ정조 시대만 해도 조선이 더 근대화된 국가가 아니었나?

여행지에서 해답 하나가 나왔다. 가고시마는 인근의 나가사키와 함께 무역과 상업이 크게 발달한 교역의 거점이었다. 왜구의 본거지기도 하다. 왜구나 북유럽의 바이킹이 성업했다는 사실은 상선의 왕래가 잦았음을 의미한다. 외국의 문물을 적극 받아들이는 ‘오픈 마인드’ 정신도 지니고 있다. 당시 오쿠보와 이토 히로부미 등은 토목, 건축, 행정, 화폐제도 등 신문물을 익히기 위해 구미로 시찰을 나가 배워왔다. 구미 열강들이 식민지 개척을 위해 동양으로 향하던 때이기도 한 그 당시 조선은 폐쇄적인 정책을 썼으니 세상 물정에 어두울 수밖에 없었다.

임진왜란기에 끌려온 도공 박평의와 심수관도 가고시마에서 자리를 잡았다. 박평의의 후손인 박무덕은 조선총독부 청사의 설계자문을 맡은 게오르그 라란데의 부인이었던 에디타를 만나 결혼했다. 일본이 독일의 제도를 받아들이게 하는 데 결정적으로 기여하고, 2차 세계대전 때는 외무대신을 지내며 전쟁외교를 담당해 전범으로 구금됐다. 그의 생가에 가면 이상한 기분이 든다.

심수관은 15대째 이어져 오며 여전히 예술혼을 불태우고 있다. 세계적인 ‘사츠마야키(燒)’를 만들어낸 심수관가(家)에 가면 20여명의 도공이 지금도 명품 도자기를 빚고 있다. 한국인의 피가 섞여 있다고 말하는 15대 심수관은 선조의 고향인 전북 남원에도 가끔 온다고 한다. 

가고시마=서병기 선임기자/wp@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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