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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태지의 혁명적 음악에 매료…‘아이들’ 마저도 영광이었다
23일 데뷔 20주년…양현석·이주노가 말하는 ‘서태지와 아이들’
양현석
성공장담 못했던 록·힙합 접목
세상 놀래키겠다 마음먹고 도전
아직도 YG이끄는 원동력으로
부·명예 뒤로한 은퇴 후회없지만
인기 즐기지 못했던 건 아쉬움으로

이주노
당대최고 춤꾼이었던 나
백업멤버 흔쾌히 수락한건
온전히 음악이 준 감성때문
해보고 싶던것 원없이 했던
영원히 잊지못할 1992년

그리고 서태지는 없었다. 오는 23일이면 서태지와 아이들 1집 앨범 ‘난 알아요’가 세상에 나온 지 꼭 20주년을 맞는다. 데뷔 이후 서태지와 아이들은 한국 대중음악사와 문화ㆍ세대의 지형을 거대하게 뒤흔들었지만 주인공인 서태지는 지난 2009년 7월 8집 앨범 ‘아토모스’ 이후 잠행 중이다. 서태지컴퍼니는 “1년째 미국에서 음악 작업 중”이라고 했다. 

지난해 뒤늦게 탤런트 이지아와의 결혼 사실이 공개된 후 이혼 관련 법정의 당사자 정현철이 ‘미소년의 문화대통령’ 자리를 대신했고, 한류의 최전선에 선 아이돌 그룹은 ‘한국 대중문화의 혁명아’로서 서태지의 이름을 망각 속으로 떠밀었다. 


서태지의 습관처럼 여전히 깜짝쇼의 가능성이 없지 않지만 오는 23일은 서태지 없는 ‘서태지와 아이들 20주년 기념일’이 될 가능성이 크다. 그래도 그들이 일으킨 ‘혁명’은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다. 또 다른 주인공 양현석과 이주노를 만나 ‘아이들’의 20년을 들었다.


20년 전 힙합음악과 댄스에 빠져 있던 양현석(43) YG엔터테인먼트 대표 프로듀서는 ‘시나위’ 해체 후 솔로음반을 준비하던 서태지를 만났다. 자유와 도전정신이 전 재산이었던 이들은 전 세계 어디에도 없는 힙합과 록이라는 이종결합으로 서태지와 아이들을 탄생시켰고, 민주화ㆍ세계화로 격변을 겪고 있던 한국 사회에 큰 충격과 파장을 일으켰다. 양 대표의 현재 모습은 K-팝(Pop) 붐을 이끈 ‘성공한 제작자’이지만, ‘포스트 서태지와 아이들’의 전령임을 자처하며 데뷔 20주년의 의미를 되새겼다.



-1992년 서태지와 아이들은 ‘10대들의 대통령’이라 불리며 가히 신드롬이라 할 수 있는 인기를 얻은 한편, 국회에서 퇴폐 논란으로 문화부 장관이 질의를 받는 해프닝을 겪었을 만큼 사회문화적 파장을 일으켰다. 멤버로 한창 활동할 때, 20년 후의 모습을 그려본 적이 있나.

▶당시 문화 후진국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기성세대와 신세대 간 문화 격차가 컸다. 서태지와 아이들 음악은 젊은이들의 자유와 저항정신을 담았다. 기성세대에게는 외국 장르인 랩이라든지 팝에 가까운 음악이 불편했을 것이다. 당시의 배타적인 성향이나 보수성은 지금도 크게 다르지 않다. K-팝이 세계로 뻗어나간다는 소식을 접하면 ‘애국자’, 외국 문화를 수입하면 ‘매국노’라는 식이다. 서태지와 아이들은 이런 벽을 허물었고, 현재의 K-팝이 세계화하는 데 기여했다고 생각한다. 20년 전, 현재보다 모든 부분에서 더 나아질 것이라고 믿었다. 내 좌우명이 “오늘보다 더 나은 내일을 위해 노력한다”는 것이다. 내일을 위해 최선을 다해 왔다.

-서태지는 내성적이고 사교적인 편이 아니라고 알려져 있는데 어떻게 처음 만났나.

▶91년 봄 서태지가 ‘시나위’ 해체 후 이태원의 한 호텔에서 잠시 김종서와 밴드로 일할 때였다. 혼자 음반을 내려고 준비 중이었던 서태지가 춤을 배우겠다고 해서 만났다. 얼마 뒤 군대에 갔는데, 심장이 좋지 않아 일찍 제대하게 됐다. 다시 만난 서태지가 그동안 만든 음악을 들려줬는데, 파격적이었다. 음악을 듣고 팀을 만들자고 제안했고 주노(이주노) 형을 영입하면서 서태지와 아이들이 결성됐다. 활동하는 동안 내 의견을 존중해준 서태지에게 고맙게 생각한다.


-지금은 수천억원대의 주식부자로 주목받으며 성공을 이뤘지만, 96년 최고의 인기를 누리던 중 은퇴 결정을 하면서 아쉬움이나 미래에 대한 불안감은 없었나.

▶4집 만들기 직전에 상의해 은퇴를 결정했다. 당시 어마어마한 수입과 인기를 얻고 있었는데, 세 명이 모두 흔쾌히 은퇴를 결정하고 각자의 길을 걸어왔다는 것이 대견스럽다. 아쉬운 점이 있다면, 즐거웠든 고생스러웠든 서태지와 아이들의 멤버로 활동하는 동안 그 시간들을 즐기지 못한 것이다. 은퇴 후 힙합을 알린다고 노력과 시간, 그동안 번 수입까지 모두 쏟아부었다. 힙합은 단순한 음악 장르가 아니다. 낡은 관습에 저항하는 음악이자 도전과 창의성을 무한하게 표현할 수 있는 문화다. YG를 대형기획사라고 하면 부담스러운 이유도 거기에 있다. YG 소속 가수, 프로듀서, 코디네이터들 대부분이 처음부터 ‘스타’하고는 거리가 먼 ‘언더그라운드’ 출신이다. 재능을 발견하고 맡겼더니 모두 책임감을 갖고 노력해줬고 YG의 얼굴이 됐다. 죽을 때까지 서태지와 아이들답게 살아야겠다고 은퇴 때부터 다짐했다. 은퇴 후 좋아하는 일을 계속하다 보니 현재의 위치까지 오게 됐다.

서병기 선임기자ㆍ장연주 기자/yeonjoo7@heraldcorp.com




“당시 제 이름값만 놓고 보면 신인가수의 백업 멤버로 나올 수준은 아니었어요. 솔로가수 제의도 받았는데, 선뜻 같이 하자고 결정한 것은 음악에서 나오는 감도가 대단했거든요.”

최근 신사동의 한 카페에서 만난 이주노(본명 이상우ㆍ45)는 서태지와 아이들에 합류하게 된 계기를 이렇게 회고했다. 그러면서 서태지와 아이들로 데뷔한 1992년을 “쇼킹하고 벅찼던 시기”라고 정의했다. 그 기간의 모든 것이 다 기억에 남을 정도로 인상 깊었다는 얘기다.

“서태지가 데모 테이프를 들려주면서 3인조 팀 결성을 요청했어요. 춤추는 입장에서 같이 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죠. 이런 퍼포먼스를 한다는 것 자체가 상당히 의미 있는 일이었어요.”

룰라, 듀스, ‘현진영과 와와’ 등 댄스그룹이 전성기를 맞은 1990년대 초반, 춤꾼으로 이름을 날리던 이주노는 ‘댄서 이상우’에서 ‘서태지와 아이들의 이주노’로 과감히 변신을 감행했다. 이름을 바꿀 정도로 서태지와 아이들은 그에게 큰 의미를 갖는다.

“‘주노(juno)’란 이름이 그리스 신화에서 ‘질투’를 상징한다는 말을 들었어요. 이주노란 이름이 왠지 색깔이 있어 보였고, 서태지와 아이들에서 제 이미지가 가장 어두웠으니 팀의 콘셉트와도 잘 맞았죠.”

하지만 1996년 1월 22일 서태지와 아이들 은퇴 후 이주노의 생활은 평탄하지 않았다. 1996년 영턱스클럽을 데뷔시키며 일찌감치 음반제작자로 성공하는 듯 보였지만, 이후 무리한 사업투자 등으로 생활고가 이어졌다.

이주노는 “서태지와 아이들 데뷔 전 ‘댄서 이상우’로서 행복했던 10년을 보냈다면, 데뷔 후 5년간은 이주노로서 영광스러운 시간이었다”며 앞으로는 자신의 경험과 노하우를 살려 신인가수 육성에 적극 나서겠다고 했다. 올 6월에는 남자 솔로가수를 데뷔시킬 생각이다.

장연주 기자/yeonjoo7@heraldcorp.com

사진=안훈 기자/rosedale@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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