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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웃지 말게, 이것이 영화의 미래니까
무성흑백영화의 낭만에 바치는 헌사‘아티스트’…압도적 음악·거대한 스펙터클만이 영화적 쾌감이 아님을…
1927년 10월 6일 미국에서 상업 장편영화로는 최초로 유성영화 ‘재즈 싱어’가 개봉돼 공전의 히트를 쳤다. 유성영화가 가져온 충격파는 배우들에게 더 컸다. 대사가 없으니 과장된 표정과 몸짓으로 관객들을 울리고 웃겼던, 무성영화 시대의 신파적 연기 스타일은 종언을 고했다. 매끄럽고 자연스러운 목소리와 섬세한 동작을 요구하는 ‘사실주의적인 표현’이 각광을 받았다. 이에 따라 거친 억양과 불협화음같은 목소리를 은막 뒤로 숨겼던 무성영화의 스타들은 하나 둘씩 자취를 감춰갔다. 콜린 무어, 글로리아 스완슨, 더글라스 페어뱅크스, 메리 픽포드 등 한 시대를 풍미했던 배우들이 모두 앞서거니 뒤서거니 은막을 떠났다.

영화 ‘아티스트’에서 주인공이자 무성영화의 톱스타였던 조지 발렌타인(장 뒤자르댕 분)은 첫 등장한 유성영화를 보고 실소한다. 그런 조지를 향해 제작자는 “웃지마, 저게 영화의 미래라고”라는 말로 대꾸하고, 조지는 “난 저따위 미래에는 관심 없네, 관객들은 날 보러 오지 내 목소리를 듣기 위해 오는 것이 아니야”라며 짐짓 뻐기지만 영화사는 그와의 재계약을 거부한다.

“사람들은 새 얼굴을 원해, 말을 하는 새 얼굴 말이야”.

극 중 제작자의 말이다. 새롭게 떠오른 유성영화의 스타 여배우는 선배들을 향해 “금붕어처럼 뻐끔거리는 배우들은 한물 갔다”고 한다. 


‘아티스트’는 이처럼 무성영화가 퇴조하고 유성영화가 떠오르던 1920년대 후반~1930년대의 미국 영화계를 배경으로 한 로맨틱 코미디영화다. 음악만 흐르는 무성흑백영화의 형식을 빌어 무성영화의 낭만적이고 아름다웠던 전통에 경배를 보내는 작품이다. 3D와 스펙터클의 시대, 객석에 앉은 관객들은 영화 초반 블랙 화면에 자막으로 삽입된 대사를 보면서 당황할지 모르지만, 곧바로 눈을 뗄 수 없고 딴 생각을 할 수 없는 영화적 매력에 푹 빠지게 될 것이다.

‘아바타’가 “3D야말로 영화의 미래”라는 것을 웅변한 21세기, 그래서 ‘아티스트’를 보는 감흥은 특별하다. 현란한 입체감과 온몸을 휘감는 듯한 압도적인 음향, 눈이 돌아갈 정도로 빠르고 거대한 스펙터클만이 영화적 쾌감의 본질이 아니라는 것을 21세기의 무성흑백영화 ‘아티스트’는 망설임 없이 증명해냈다. 극 중 주인공의 꿈 속에서 물건이 떨어지는 몇 번의 충격음과 마찰음 말고는 목소리와 음향이 전혀 삽입되지 않았지만 세계 영화계는 ‘아티스트’에 연거푸 최고의 영화상을 선사했다. 최근 열린 영국 아카데미영화상 시상식에서 최우수작품상을 비롯한 7개 부문 트로피를 안았고, 미국의 골든 글로브상 시상식에서도 최다인 3개 부문 수상작으로 선정됐다. 오는 26일 열리는 미국 아카데미영화상 시상식에서도 무려 10개 부문 후보작으로 꼽혔다.

영화는 재즈와 클래식 음악이 흐르는 가운데 조지가 무성영화에서 눈부시게 활약하는 장면으로부터 시작한다. 버스터 키튼이나 찰리 채플린처럼 과장되고 우스꽝스러운 무성시대의 연기 스타일을 재현한 신(Scene)들이다. 가는 곳마다 구름 같은 팬들을 몰고 다녔던 조지는 취재진에 둘러싸인 거리에서 포토라인을 뚫고 넘어온 한 여성 팬과 우연히 맞부딪친다. 단역으로 촬영장을 전전하던 무명의 여배우 페피 밀러(베레니즈 베조)다. 운명 같은 만남 후로 페피 밀러는 조지를 향해 열병 같은 짝사랑을 가슴에 품게 된다.

이윽고 유성영화가 등장해 대중들의 사랑을 받고 영화사들은 앞다퉈 무성영화 전면제작 중단을 선언한다. 졸지에 영화사로부터 외면당한 조지는 걷잡을 수 없이 몰락하게 된 반면, 아름다운 목소리와 빼어난 춤실력을 갖춘 페피 밀러는 단역에서 조연으로, 마침내 주연으로 승승장구하며 유성영화 최고의 여배우로 떠오른다. 아무도 돈을 대는 영화사가 없어 조지는 자신이 직접 감독ㆍ주연ㆍ제작을 맡아 무성영화를 다시 한 번 시도하지만 페피 밀러 주연의 유성영화와 같은 날 흥행대결을 벌여 참담한 실패를 하고 만다. 이혼에 파산까지 겹친 조지는 자살을 시도하지만 페피 밀러는 오랫동안 연모해 왔던 옛 스타에게 구원의 손길을 내민다.

감독 미셸 아자나비시우스는 낭만적인 러브스토리와 우아하고 경쾌한 음악, 배우들의 빼어난 연기를 완벽하게 조화시켜냈다. 흑백영화지만 고전의 흥취뿐 아니라 CF 같은 현대적 감각이 공존하는 영상도 매력적이다. 무엇보다 지난해 칸국제영화제 남우주연상을 수상한 장 뒤자르댕의 연기는 압권이다. 16일 개봉. 12세 관람가.

<이형석 기자>/suk@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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