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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5세 허영호로 돌아가다
3극·7대륙 최고봉을 다 올랐지만…경비행기로 전세계 하늘 길 여행하는‘15세 허영호’…아직도 그는 꿈을 꾼다

15세 소년 말로만 듣던 소백산 첫 등반. 비행사를 꿈꾸던 소년 허영호의 마음 한켠엔‘산’이 40년간 자리잡았다.

2007년 경비행기로 국토대장정을 나섰지만 기체결함으로 청산도 인근 바다에 추락. 실패후 재도전 제주도까지 최초 단독 비행 성공.

울릉도에선 군수가 직접 착륙요청해 방파제에 내렸다. 울릉도에 헬기를 제외한 날개 달린 비행기로는 첫 착륙 주인공.

우리는 늘 새로운 것을 추구하는 사람들. 영석이가 다시 안나푸르나에 오른 것도 숙명…그도 세계일주 비행 꿈 이루려는 숙명을 안고 오늘도…



1969년 충북 제천이 고향이었던 15살 소년은 말로만 듣던 소백산에 올랐다. 7형제 중 막내였던 그는 형과 누나들 꽁무니만 바라보며 등줄기로 땀이 비오듯 쏟아지는 것도 모른 채 쫓아가기 바빴다. 마땅한 등산장비도, 반듯한 등산로도 없던 시절이라 오로지 자신의 두 발과 눈, 귀에 의지해야 했다.

숨이 턱밑까지 차오를 때마다, 입안이 바짝바짝 마를 때마다 뒤돌아 내려가고 싶다는 생각이 수십 번도 더 들었다. 하지만 그는 그 먼 길을 혼자 돌아갈 생각에 무서웠다. 그보다 자기 자신과의 싸움에서 패배한다는 사실이 그를 더욱 붙잡았다. 이 사춘기 소년은 그렇게 소백산에서 마음 속 사투를 벌인 끝에 높이 1493m에 달하는 비로봉에 올랐다.

정상에서 바라 본 세상은 평지와는 차원이 달랐다. 공기도, 하늘도 모두 자신의 힘으로 손에 얻은 것만 같았다. 집으로 돌아온 소년은 이 여운에 못 이겨 일주일 넘게 밤잠을 설쳤다. 산이 그리웠던 그는 이후에도 치악산으로, 설악산으로 뭔가에 홀린 듯 올랐다.

막연하게 비행사가 되고 싶다던 소년의 꿈에는 이때부터 조금씩 ‘산’이라는 숙명이 자리잡기 시작했다. 먼 훗날 3극ㆍ7대륙을 누비는 ‘탐험가’ 숙명이 될 것이라고는 감히 상상조차 못할 정도의 어마어마한 크기였다. 


▶젊은 혈기를 바친 산(山), 그것은 일종의 산내림=허영호 대장(57). 전문산악인과 탐험가로 한 시대를 풍미했던 그에게도 다른 전문산악인들과 마찬가지로 산내림이란 게 있었다. 신내림을 받아 신기(神氣)가 몸에 스며들 듯 그 역시 산기(山氣)에 몸이 빨려들어가는 이른바 산내림을 받았다. 그것도 이제 막 파릇파릇한 청춘이 시작되는 나이에. 그래서인지 허 대장은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군입대를 하기 전인 1973~1975년을 오로지 산에만 바쳤다.

“남들은 대학 진학하고, 취직을 할 때 나는 국내에 높은 산이란 산은 모두 다 올랐지요. 청주대 체육학과 입학은 훨씬 뒤인 80년대 말에 했고요.”

그에게 있어 진학보다 산이 우선순위였던 것이다. 대신 무작정 산을 타기보다는 체계적으로 배웠다. 빙벽, 암벽 등의 전문 등반을 섭렵하며 전문산악인으로서의 출발을 다졌다. 그러다 군 제대 후 그에게도 해외원정이라는 기회가 왔다.

“80년대 초만 해도 해외 높은 산에 오른다는 것 자체가 엄청난 영광이었죠. 그 당시만 해도 히말라야 갔던 선배님들은 많아야 10명 정도 될까. 모두 하늘 같은 분들이라 우리처럼 무경험자들은 우러러봤죠. 그러면서 속으로 나도 꼭 히말라야에 오르리라 생각했고요.”

1982년 세계 5위봉인 히말라야 마칼루봉(8481m)에 오를 원정대를 모집한다는 공고가 났다. 전국에서 내로라하는 등반가 50여명이 몰렸다. 이 가운데 체력 테스트와 신체검사를 통해 10명으로 압축하는 선발과정이 진행됐다. 허 대장은 단내가 나는 훈련에 매진했다.

“국내 산 오르는 거 준비와는 차원이 다르죠. 기술등반이나 동계훈련은 당연히 해야 하는 거고, 눈속에서 침낭 하나로 추운 밤 보내는 것도 의외로 재미있어요.”

그는 특히 달리기를 열심히 했다고 했다. 체력 테스트의 핵심 요소 중 하나가 심폐기능이기 때문이다. 일주일에 서너번은 10㎞를 35분에 주파할 수 있도록 몸을 만들었다.

“6개월 이상 몸을 만든 뒤 우이동 북한산 자락에서 만났죠. 50명 모두 어떤 운동을 했는지 철저히 숨기고 있더라고요. 테스트는 20㎏짜리 배낭을 메고 백운대를 두 번 왕복하는 것이었어요. 기억에 남지 않지만 꽤 우수한 성적이었던 거 같아요.”

허 대장은 마침내 체력 테스트와 신체검사를 통과해 최종 10인에 들었다. 생애 첫 히말라야 고지를 향해 떠난 그의 나이는 29세였다. 15세의 나이에 소백산 정상에 올랐을 때와 비교하면 꼬박 갑절의 시간이 흘렀다.


▶“내 이 길을 두번 다시 안 오리라, 이 길이 나의 길이로다”=마칼루봉 원정대에서 허 대장은 우등생이었다. 제일 활동량이 많았고, 맨 선두에서 가장 중요한 식량장비를 짊어지고 올랐다. 그리고 히말라야 정상에 올랐다. “생각보다 고지대 적응이 잘 됐어요. 산소마스크를 벗고도 오래 있었죠. 그때 내가 산사람 체질이라는 것을 확신했죠.”

이후 그는 세계 7위봉인 마나슬루(8163m)를 단독 등반하고, 1987년 드디어 국내 최초로 세계 최고봉 에베레스트(8848m) 동계 등정에 성공했다. 지금까지 갔던 곳 중 가장 기억에 남는 여정이 바로 이곳이라고 그는 말한다.

“등반탐험가라면 당연히 가야죠. 말 그대로 최고봉인데. 그런데 정말 힘들 때는 두번 다시 오지 않겠다고 천번만번 다짐해요.”

가장 힘든 건 지루하고 외로운 자신과의 싸움이다. 정상은 가야 하는데 자꾸 조바심이 생기고, 높이 올라갈수록 산소부족에 식욕부진까지 겹쳐 탈진하기 일쑤다. 그 역시 죽음의 문턱을 4번이나 왔다갔다 했다.    

“집 생각이 날 때가 고비예요. 그렇게 몸고생, 마음고생 하니까 몸이 말썽이죠. 한 번 갔다오면 10㎏은 그냥 빠지죠. 특히 죽을 고비를 4번이나 넘겼을 때는 정말….”

그래서 산이 죽도록 미워질 때가 있다. 하지만 이것도 잠시. 정상에 오르고 나면 산에 대한 미움, 다시는 오지 않겠다는 굳은 다짐은 거품처럼 사라지고 만다. 자기 자신과의 싸움에서 이기고, 그 누구도 쉽게 달성하기 힘든 성과를 이룩했다는 자부심 때문이다. 정상에서 엉망진창 된 사진 속 얼굴이 자랑스럽고 예뻐보일 수밖에 없는 이유다. 같은 이유로 허 대장은 2007년 에베레스트 등반 20주년 기념으로 다시 한번 정상에 오르기도 했다. 

탐험에 대한 욕심의 대상이 비단 산 만은 아니었다. 최고봉을 밟은 허 대장은 1994년과 1995년 각각 북극, 남극 등 양극 도보원정에도 성공했다. 허 대장에게 남극과 북극은 도전의 대상에 지나지 않았다. 

▶“영석이 같은 프로가 연락이 안 된다는 건…”=허 대장을 인터뷰한 날은 10월 21일이었다. 3일 전 박영석 대장이 히말라야 안나푸르나 등정에 나섰다 실종됐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허 대장은 만나자 마자 박영석 대장 얘기부터 꺼냈다.

“보통 산에 오를 때 무전기와 위성전화를 챙기죠. 긴급상황 때 하나를 잃어버리더라도 연락할 수 있으니까요. 여기에 추가로 헤드램프도 갖고 가요. 둘 다 사용을 못할 경우 밤에 헤드램프라도 비추면 베이스캠프에서 감지하고 찾으러 오니까요.”

하지만 당시 박 대장은 4일째 되도록 소식이 들리지 않았다. 허 대장은 이미 안 좋은 결과를 직감하고 있었다. “영석이야 프로 중의 프로죠. 안나푸르나도 이미 고지에 올라봤고. 뉴스보다는 네팔서 정확히 들려오는 얘기를 보니 대형 눈사태에 실종됐다고 봐야 해요. (안타깝지만) 이제 못찾죠.”

박영석 대장은 허 대장에 비하면 7~8년 후배뻘이다. 함께 산을 오른 적은 없지만, 같은 베이스캠프에서 식사도 같이 하면서 인연을 키워왔다. 허 대장이 북극 원정에 성공한 뒤 박 대장도 똑같이 성공해 보였다. 지난 2007년 에베레스트를 오를 때는 두 사람이 같은 시기에 등반하기도 했다. 당시 박 대장은 두 명의 대원을 잃었다.

“지금은 영석이나 (엄)홍길이 시대인데, 나보다 더 큰 업적을 세울 수 있는 친구가 그런 일을 당했으니 안타까워요.”

하지만 그는 박 대장의 도전은 탐험가로선 당연할 수밖에 없다고 설명했다.

“우리는 늘 새로운 것을 추구해야 하는 사람들이니까요. 남들이 안 간 길을, 불가능을 가능하게 만드는 작업을 계속해야죠. 그래서 영석이가 작년에 실패한 길을 이번에 다시 도전한 것이죠.”

같은 의미로 히말라야 14좌 완등에 도전했던 산악인 오은선씨 얘기도 했다. 오씨는 2009년 당시 13좌 정상 등반을 두고 진위 논란이 일었다. 여성 산악인이 걸린 시간이 전문 남성 산악인보다 빨랐다는 것은 상식에 맞지 않는다는 것. 허 대장도 당시 이 논리로 의혹을 제기했다.

“전문산악인이라면 정확한 데이터를 줘야 해요. 어디가 정상인지 명확히 얘기해야 하는데, 얼마 전 만난 오씨는 재입증하겠다는 얘기는 없네요.”

▶거대한 자연에 맞서는 것과 밥벌이는 별개=자신의 한계를 극복하고 새로운 가치를 만드는 탐험가에게도 일상과 현실이 있는 법. 허 대장은 탐험은 절대 프로페셔널한 직업이 아니라고 잘라 말한다.

“철저히 무상의 대가입니다. 기업 스폰서로 원정 가지만 초과로 비용 발생하기 부지기수죠. 다른 밥벌이를 해서 생활하고 조금씩 원정 비용을 모으는 수밖에요.”

그래서 그가 선택한 길이 강연이다. 기업에서 ‘극기’라는 주제로 강연을 시작한 지 올해로 벌써 20년이 넘었다. 매년 15만~20만명이 그의 강의를 듣는다고 한다.

“산만 탄 사람이 처음에 무슨 말을 잘하겠어요. 거기다 성격은 내성적인데. 그래도 20년 넘게 할 수 있다는 건 그만큼 인정 받는 콘텐츠가 있다는 의미죠. 이래봬도 제가 대한민국 여기 안에 들어가는데(웃음)”

그가 넌지시 손가락 세 개를 펼쳐 보였다. 허 대장이 말하는 콘텐츠는 그 누구도 해보지 못한 경험이다. 목표 도전, 고난 극복, 정상 탈환, 성취감 등 모두 기업에서 강조하는 키워드들이다. 여기에 허 대장의 경험들이 딱 맞아떨어진다는 것이다.

“오늘은 에베레스트, 내일은 북극, 모레는 남극 등 남들이 복제 못하는 주제들이죠. 여기에 기승전결 구조로 이야기하면 사람들 눈빛이 초롱초롱해집니다.”

그의 이야기는 기업체 섭외 1순위가 됐다. 제천→설악산→김포→부산→제주도→서울. 얼마전 그가 1박2일 동안 다녀온 강연코스가 그의 인기를 말해준다.

“산은 나 혼자 오르는 일이었는데 이건 교감이라는 게 있더라고요. 많은 사람들 눈빛을 읽어야 하니까요. 청중에게 내가 겪은 보람을 전달하고 용기를 심어주는 것도 의미 있지요.”

▶“땅에서 할 수 있는 거 다 했으니 3차원으로 가겠다”=3극, 7대륙 최고봉을 오른 허 대장은 이렇게 강의를 하면서 편안한 노후를 준비하고 있을까. 혹시나 하는 생각은 역시나 뒤집어졌다. 허 대장은 다시 15살 이전의 소년으로 돌아가 있었다. 소백산 정상에 오르기 전 비행사를 꿈꾸던 소년의 포부는 아직 그대로 남아 있었다.

“1995년 7대륙 최고봉까지 하고 나니 비행기를 타야겠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바로 비행기 조종 공부를 하고 자격증을 땄죠.”

바로 여주~제주 경비행기 종단으로 이어졌다. 산에 오르는 것 이상으로 준비도 열심히 했다. 2007년 초 단독으로 경비행기를 몰고 1100㎞ 거리의 국토대장정에 나섰다. 야심차게 시도한 도전은 실패로 돌아갔다. 기체 결함으로 그는 청산도 인근 바다에 빠졌다.

“방향타가 생각대로 움직이지 않더라고요. 바다에 빠졌을 때 무서웠냐고요? 전혀요. 드라이슈트 입고 있었고 모든 서바이벌 장비가 있어 어디에 떨어져도 최대 3일간 버틸 수 있었어요.”

숱하게 죽을 고비를 넘긴 이답게 그의 대답은 쿨했다. 또 작은 소품 하나라도 10중으로 철두철미하게 준비하는 그의 꼼꼼한 성격이 비행에서도 드러나는 대목이었다.

허 대장은 실패 후 바로 재도전에 나섰다. 성공이었다. 경비행기로 제주도까지 단독 비행은 자신이 최초라고 밝혔다. 같은 해 갔다 온 독도 역시 마찬가지였다.

“울릉도 군수가 내가 비행한다는 얘기 듣고 울릉도에 꼭 한 번 내려달라고 부탁했죠. 울릉도엔 헬기 말고 날개 달린 비행기가 내린 역사가 없다네요. 그래서 방파제에 착륙했죠.”

이처럼 허 대장은 비행운전 역시 등반탐험처럼 도전의 연속으로 수행하고 있었다. 완주는 마치 등정과 같은 성취감이 있다는 것이다. 때문에 그의 꿈은 에베레스트만큼 클 수밖에 없다. 허 대장은 경비행기로 전 세계를 일주하겠다는 원대한 목표를 향해 이미 달려가고 있다.

“경비행기로 지구 두 바퀴를 돌 겁니다. 누구도 성공한 적이 없으니까요. 땅에서 할 거 다 했으니 이제 3차원으로 가야죠.”

허 대장의 사무실에 걸린 세계 전도에는 20~30개에 달하는 지점들이 스티커들로 채워져 있었다. 모두 그가 지나게 될 경로들이다. 예상 기간은 1년6개월에서 2년 정도. 이미 자비로 경비행기 두 대를 사두었다. 각각 7000만원, 2억3000만원이다. 강연비로 독일서 직접 제작한 것이다.

“내가 먼저 준비해야죠. 그래야 스폰서가 붙죠. 어서 스폰서가 정해져야 할텐데. 산 오를 때도 그랬지만 스폰서 구하는 게 모든 도전의 출발이에요.”

▶20년 전 마신 고배, 이번엔 부자가 축배를 들다=지난달 말 허 대장은 영화시사회장에 섰다. 지난해 아들과 에베레스트 등정에 성공한 과정을 담은 다큐멘터리 영화가 상영됐던 것. 제목은 ‘20년 전의 약속’이다.

“20년 전에 6살 난 아들과 에베레스트를 올랐죠. 너무 어렸던지 5000m 지점서 중단해야 했어요. 그래서 약속했죠. 20년 뒤 재도전하자고요.”

실제 그는 아들과 작년 에베레스트 등정에 성공했다. 아들의 친구가 함께 동행해 이 장면을 카메라로 담았고, 올 5월 KBS에서 다큐멘터리로 방영됐다. 반응은 폭발적이었다. 두 부자가 에베레스트를 오른다는 콘셉트가 감동을 불러왔다. 

“생각보다 반응이 괜찮아서 이걸 영화로 만들기로 했어요. 일종의 휴먼다큐인 셈이죠. 사운드 보충하고 편집 다듬으니 60분짜리 다큐영화가 완성되더라고요.” 20년 전의 약속은 최근 개막된 KBS 다큐멘터리 걸작선에서 2회 상영됐다.

영화 속 두 부자는 함께 산을 오르며 무슨 말을 했을까. “특별히 말을 많이 하진 않았어요. 서로 가슴으로 교감했으니까요. 재석(아들)이도 내가 열마디 해주는 말보다 직접 자연 상하질서 움직이는 것을 눈으로 보는 게 더 많은 공부가 됐을 거예요.”

인터뷰 말미에 또 에베레스트를 갈 건지 물었다. 그는 주저없이 40주년에 가겠다고 답했다. 그때는 고희가 넘은 나이다. “참, 그 전에 비행기로 세계 일주부터 달성해야죠(웃음).”  

정태일 기자/killpass@heraldcorp.com
사진=안훈 기자/rosedale@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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