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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천일의 약속’, ‘이 죽일 놈의 사랑’
한 남자가 있다. 남자에겐 20년을 한결같이 만나온 여자가 있다. 친구같고 동생같고 누나같던 여자. 남자와 여자는 가족이라는 이름으로 미래를 약속한다. 어느날 남자는 또 다른 여자를 만난다. 친구의 사촌동생인 오래 알던 '어떤 여자'다. 약혼녀때문에 등져야 했던 그 여자. 폭풍처럼 운명처럼 두 사람은 사랑을 한다. ‘기한이 정해진 사랑’, 그리고 이별. 드라마는 거기에서 시작한다.

이것은 김수현표 정통멜로다. 사극 광풍이 휘몰아친 브라운관에 10월 중순 새로운 현대극 한 편이 첫 선을 보였다. 대한민국 안방을 수년간 지배해온 김수현 작가, 정을영 감독 콤비가 빚어낸 멜로이자 ‘내 남자의 여자’ 이후 4년 만에 찾은 미니시리즈다.

드라마는 14.7%의 시청률로 안방에 입성하더니 방영 2회 만에 17.3%의 전국 시청률을 기록하며 월화 안방의 1위 자리를 꿰차며 김수현표 멜로의 위엄을 드러냈다. 또 방영 6회차인 1일 방송분은 17.2%(AGB닐슨미디어리서치)의 전국시청률을 기록하며 20% 돌파를 목전에 두고 있다.

이별로 시작한 드라마는 이별의 후유증이 몰고 온 감정의 잔재들과 ‘잊으며 살 수밖에 없는’ 무너지는 여자와 또 다른 이별의 상처를 감내하는 미련한 여자의 이야기가 뒤엉켜 전개되고 있다.

숨소리와 걸음소리마저 이야기가 되는 이 드라마에 진짜 주옥같은 이야기는 장황하면서도 함축적인 이중적 특성을 가진 김수현 작가의 대사들을 통해 전해진다. 세 남녀는 자신의 감정을 온몸으로 드러내면서도 입으로 전할 때만큼은 단어 하나하나를 곱씹듯 담담하고 단호하게 사랑과 이별을 말한다. 끔찍하게 지독한 사랑인 탓에 그 안에 수반되는 고통은 그러나 ‘각자의 몫’이 되고 마는 사랑이야기다.

▶ 20년의 만남ㆍ단호한 이별=유약하고 무책임한 남자의 이별은 단호했다. 미련한 여자는 그것을 받아들이기가 쉽지 않다.

지형(김래원)과 향기(정유미)는 결혼을 이틀 앞두고 있다. 장소는 한적한 레스토랑. 마주앉은 남녀는 이제 본격적인 대화를 시작한다.

“네가 상상도 할 수 없었던 악몽이 될 얘기를 해야 한다. 이게 말이 안되는 소린지 아는데 너와는 결혼 못하겠다“는 것이 시작이다.

여자는 뻔한 이야기를 한다. “오빠 유학 4년째 여름부터 내가 미국 가서 밥 해먹고 여행, 연주회, 뮤지컬도 보고 잠도 같이 잤는데 우리 5년을 여름마다 그렇게 지냈는데 그런 어이없는 말이 어디있냐“고.

이별을 위한 남자의 결심엔 다른 그림자가 있었기에 ‘시간의 역사’에 쉽사리 흔들릴리 만무했다.

남자는 ”너를 사랑하지 않아. 너를 좋아해. 그건 사랑하고 다른 감정이야. 일찍부터 익숙해진 편안함. 아둔하게 그거를 사랑인줄 알았다“고 한다. 다른 사람이 생겼다고 끝끝내 뱉어낸다.

드라마는 이 착하고 미련한 여자에게 집중한다. 눈물을 삼키다 토해내고 위경련, 아니 입덧까지 하고 마는 여자. 웨딩드레스를 매만지며 남자의 과거와 현재를 지켜주려는 여자. 기다리겠다는 여자다. 부잣집 외동딸인 여자는 너무 착하고 사랑스러워 더 아프다. 무엇을 간절히 원할 필요가 없는 환경에서 자라 무엇도 잃어본 적 없을 여자는 처음으로 가장 소중한 것을 잃는다. 하지만 여자는 참아야 하는 사람이 된다. 사랑의 고통을 혼자 감내해야 하는 것이다.

▶ 두 번의 이별, 그리고 또다시 만남=이미 다른 사람을 곁에 둔 남자, 모든 것을 가지고 있어 늘 잃을 것이 두려운 남자에게 나타난 여자는 친구의 동생이다.

서연(수애)의 삶은 비루하다. 겨우 여섯 살에 부모님을 잃은 서연은 늘 쫓기듯 살았다. 빚에 쫓기고 사람의 시선에 쫓기고 현실에 쫓겨 자기가 아닌 자기로 살았다. 아무 것도 가진 것이 없어 잃을 것도 없는 여자에게 나타난 그 남자, 지형과의 만남은 꿈이고 환상이었다. 그것이 비록 기한이 정해진 만남이었대도. 아니 기한이 정해진 만남이었기에 더욱 그렇다. 하지만 지나친 행복은 신마저 질투한다. 정해진 이별의 시간, 그리고 이제 그녀는 기억을 지울 준비를 해야한다. 비루하기 짝이 없는 여자는 이제 남자에게 영원히 ‘지워져야 하는 여자’로 남는다. 그보다 더 묵직하게 치밀어오르는 것은 자신에게도 지워져야하는 사람이라는 것이다.

만남은 여기에서 다시 시작이다. 이별의 문턱에서 남자는 여자의 기억이 사라지고 있다는 걸 알게 된다. 알츠하이머, 겨우 서른에 찾아온 가장 슬픈 병. 이제 남자는 긴 시간 곁에 둔 여자에게 이별을 고하고 아픈 여자에게 가려한다. 하지만 여자는 한없이 비겁했던 그 남자에게 말한다. 착한 남자인 척 그만하고 꺼지라고. 하지만 그것은 또다시 만남의 시작이었다.

드라마는 너무 다른 삶을 사는 사람들의 현실을 말하고 그들 각자의 삶의 이야기와 사랑을 향한 욕망과 고통을 담는다. 6회 방송분이 전파를 탄 지금 욕망을 향한 사랑과 이별의 이야기를 몰아치듯 쓸어간 절반과 ‘알츠하이머’ 병을 앓고 있는 수애를 중심으로 한 인물들의 감정과 상황 변화들이 주를 이룬 절반은 김수현 작가 특유의 화법에 실려 탄탄한 스토리 안에 묻어나고 있다. 회차를 거듭할수록 김수현 작가의 말맛이 깊게 울리고 ‘눈물의 여왕’ 수애의 단단한 내면 연기가 돋보여 시청자들의 호평도 줄을 잇고 있는 상황, 때문에 남아 있는 14회가 끌어갈 그 ‘지독한 천일간의 사랑’에도 더 큰 기대가 모아지고 있다.

<고승희 기자 @seungheez> shee@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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