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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언어·빛의 연금술사, 제니 홀저
어둠이 짙게 내려 앉은 도시의 야경 속 낯선 언어들의 유희…빛으로 쓰는 詩, 텍스트 아트의 대모
사회 향한 도발적 메시지

LED 전광판 통해 대중에 전달

언뜻보면 광고같은 착각이…


PROTECT ME FROM…

(내가 원하는 것으로부터 지켜줘)

문장 하나로 일약 스타덤

베니스비엔날레 황금사자상도


한번만 스쳐도 각인되는

강력한 아포리즘

현대인 메마른 감성 자극







도심 대형 건물에 ‘빛으로 시(詩)를 쏘는 작가’ 제니 홀저(Jenny Holzerㆍ61). 세계적인 개념미술가인 그가 한국에 왔다. 한국에서의 두 번째 개인전을 위해서다. 환상적인 푸른 빛을 내뿜는 LED 조각의 마무리 설치가 한창인 지난 6일, 소격동 국제갤러리에서 그를 헤럴드경제가 단독으로 만나봤다.

제니 홀저는 텍스트(문장)를 기반으로 한 공공미술작업으로 이른바 ‘텍스트 아트’의 신기원을 활짝 열어젖힌 작가다. 미국 오하이오 출신으로 대학에서 순수미술을 전공한 홀저는 뉴욕으로 이주한 뒤론 안온한 갤러리에 머물길 거부하고 거리로 뛰쳐나갔다. 그리곤 마치 게릴라처럼 예술을 펼쳤다.

그는 기성세대의 고정관념을 여지없이 비트는 도발적인 문장을 종이에 찍은 뒤, 뉴욕 곳곳에 무단으로 부착하는 퍼포먼스를 시도했다. 이튿날이면 범행현장을 다시 찾는 범인처럼 전단지를 붙였던 곳을 다시 찾아, 사람들이 전단지에 써놓은 댓글 등을 살피곤 했다. 엉뚱한 글이 있으면 너무 좋아 가슴이 뛰던 시절이었다.

7년 만에 열리는 한국에서의 개인전 현장을 찾은 제니 홀저. 위선과 부패로 가득찬 사회를 도발적인 텍스트로 여지없이 비틀지만 작품의 근간에는 인간 존재에 대한 속깊은 애정과 성찰이 도도히 흐른다.                                                                     정희조 기자/checho@heraldcorp.com

그리곤 1980년대 초 뉴욕 한복판 타임스퀘어 전광판에 “PROTECT ME FROM WHAT I WANT(내가 원하는 것으로부터 나를 지켜줘)”같은 문장을 쏘기 시작했다. 친구(작가)가 마침 전광판 관리업체에 근무하고 있어 가능했던 ‘도발’이었다. 광고 사이사이에 등장하는 이 낯선 문장에 시민들은 “저게 뭐지?”하고 고개를 갸웃거렸다. 예술이라 여기는 이들은 거의 없었다.

하지만 그의 범상찮은 실험을 눈여겨본 DIA아트센터, 구겐하임미술관의 초대로 홀저는 이른 나이에 미술관에 모셔(?)졌고, 곧바로 베니스비엔날레(1990년) 미국관 대표작가로 선정돼 그랑프리인 ‘황금사자상’을 거머쥐었다. “여성작가가 어떻게 미국관 대표가 될 수 있나”라는 비판에 보란 듯 일격을 가하며, 나이 마흔에 세계 미술계 정상에 오른 것. 한달음에 유명세를 얻은 뒤로도 작가는 ‘그 누구도 시도하지 않은’ 대규모 라이트(light) 프로젝션 작업 등 혁신적인 실험을 밀어붙였다.

이미 ‘거장’이 된 이 작가는 한없이 도도할 것이라는 예상과는 달리 직접 만나보니 너무나 소탈했다.낡은 블랙진에 회색빛 후드T, 끈도 빼낸 컨버스화. 눈에 도드라지는 것은 가슴께까지 오는 긴 생머리 정도였다.

그의 첫마디는 이랬다. “도시 곳곳의 전광판을 반짝반짝 물들이는 뉴스며 주식시세, 아름답지 않은가요? 광고는 어떻고요? 예술만이 꼭 아름답다곤 생각지 않아요. 제 작업이 뉴스인지, 예술작품인지 구분이 잘 안됐으면 합니다. 모호하고 알쏭달쏭한 게 더 매력적이니까요.”

홀저는 예술만이 높은 권좌에 앉아있는 걸 마땅찮아한다. 이 같은 저항적 성향으로 인해 남들이 모두 시도하는 회화라든가 조각작업이 아닌, 언어를 기반으로 사회적ㆍ정치적 이슈를 부각시키는 공공미술에 빠져든 것.

“당신의 출몰로 텍스트 기반의 개념미술이 비로소 시작됐다”고 하자 “이미 중세에도 문자가 그림에 등장했고, 큐비즘 다다도 있었다. 나는 그들에게 많은 도움을 받았다”고 밝혔다. 또 “후배들에게, 또 도도히 흐르는 예술의 물줄기에 훼방이나 놓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답할 정도다. 지금 이 순간에도 세계 곳곳에서 그를 추종하는 많은 작가들이 온갖 실험을 펼치고 있음에도 말이다.

그의 작품은 돈 많은 상류층 마나님의 안방을 장식할 그림도, 조각도 아니다. 대부분이 건축물에 투사되거나 발광다이오드(LED) 전광판을 이용해 문장을 번쩍이게 투사하는 작업이다. 

보라와 녹색빛을 발하는 LED조각을 코너에 겹쳐서 설치한 제니 홀저의 ‘Green Purple Cross’. 
                         [사진=국제갤러리]

홀저는 도시의 열린 광장, 이를 테면 록펠러센터 같은 공공장소에서 판을 벌이는 게 너무 좋다고 했다. “많은 대중들이 오가다가 내가 벽에 투사한 문장을 보고 발길을 멈추고 이를 천천히 읽고 있는 걸 보면 참 좋다. 그 고요함을 사랑한다”고 밝혔다. 그는 ‘제니 홀저’라는 이름을 기억해주길 바라지도 않는다. 작가가 무슨 대수냐는 듯한 태도다. 그저 저들의 삶에, 그 발길에 잠깐 그 텍스트와 마주치며 이런저런 생각을 하다가 지나치면 족하다는 것.

지난 1996년 이래 미국은 물론 런던 베를린 베니스 등 전 세계 곳곳에서 프로젝션 작업을 해왔기에 그는 건축물에 관심이 많다. 낡은 고건축을 사랑하고, 현대건축물도 좋아한다. 이들 건물에 디지털 방식으로 작가가 투사하는 글은 통찰력 있고 도전적이다. 때론 코믹한 경구도 등장한다.“I AM AWAKE IN THE PLACE WHERE WOMAN DIE(나는 여성이 죽은 곳에서 깨어난다)” “I SMELL YOU UNDER MY SKIN(내 피부에서 당신의 냄새를 맡는다)” 등이 그 예. 대중과의 의사소통을 위해 가장 힘 있고, 효과적인 방법이 무엇인지 알고 있는 작가는 권력과 제도의 모순을 꼬집고, 각성을 촉구하지만 그 중심에는 언제나 ‘인간’이 있는 것이 특징이다.

어느새 60대에 접어든 그에겐 장성한 딸이 한 명 있다. 컬럼비아대학원에서 저널리즘을 전공 중이며 신문기자가 꿈이다. “어머니를 취재할 수도 있겠다”고 하자 “딸은 전쟁이며 사회 이슈에 관심이 많다. 나를 닮은 모양”이라고 답했다.

이영란 선임기자/ yrlee@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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