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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남매가 건네받은 엄마의 유언장엔…
전쟁의 광기가 비틀어 놓은 가족사 ‘그을린 사랑’…아버지·형 찾아나서며 깨닫게 되는 인간성 묘사 탁월
“내 시신은 세상을 등질 수 있도록 엎어놓아라. 약속을 어긴 자는 비문이 필요없다. 잔느, 너는 아버지에게 편지를 전하거라. 시몽은 형을 찾아 편지를 주도록 해라. 편지가 모두 전달되면 너희에게도 편지를 줄게. 침묵이 깨지고 약속이 지켜지면 비석을 세우고 내 이름을 새겨도 된다. 햇빛 아래에.”

캐나다에 사는 20대 초반쯤의 쌍둥이 남매 잔느(멜리사 메소르모)와 시몽(막심 고데트)은 공증인으로부터 어머니가 남긴 수수께끼 같은 유언과 함께 두 통의 편지를 받는다. 아버지는 전쟁 중에 죽었다고 알고 있었고, 형이라곤 존재조차 몰랐던 쌍둥이 남매는 혼돈에 휩싸인다. 영화 ‘그을린 사랑’은 아버지와 형을 찾아가는 이 쌍둥이 남매의 여정과 생전 어머니의 파란만장한 삶의 궤적을 그린다. 마침내 긴 여정의 끝, 고통과 충격 속에서 삶의 판도라 상자를 열어버린 남매에게 어머니의 목소리는 말한다.

“너희 이야기의 시작은 약속이란다. 분노의 흐름을 끊어내는 약속. 덕분에 마침내 약속을 지켜냈구나. 흐름은 끊어진 거야. 너희를 달랠 시간을 드디어 갖게 됐어. 자장가를 부르며 위로해줄 시간을…. 함께 있다는 건 멋진 일이란다.”

두 메시지의 사이에는 어머니의 시대가 있었다. 민족 간, 종파 간 학살이 끊이지 않고 내전이 계속되는 중동지역의 어느 마을. 쌍둥이 남매의 어머니가 되기 전 젊은 ‘나왈’(루브나 아자발)은 한 청년을 사랑하는 평범한 여인이었다. 그러나 종교가 다르다는 이유만으로 연인은 죽임을 당하고 생전 그와의 사이에서 새 생명을 잉태한 여인은 출산 후 아이를 고아원으로 떠나보낸다. 어머니의 사진 한 장만을 아버지를 찾아낼 유일한 단서로 들고 갖던 잔느는 사진 속 배경이 악명 높은 정치범 수용소였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기독교와 회교도의 분쟁 사이에서 비극적인 죽음을 맞았던 연인을 대신해 나왈은 자신의 종족과 종교의 가르침을 어기고 기독교 민병대 대장을 암살한 후 투옥된 것이다.

남매는 수용소 감금 당시 어머니 나왈이 어떤 폭력과 고문에도 굴하지 않았던 ‘노래하는 여인’이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그리고 그녀가 고향인 중동을 등지고 캐나다로 이주해 쌍둥이의 어머니가 되기까지 충격적인 진실을 목도하게 된다. 거기에 아버지와 형의 존재가 놓여 있었다. 


수용소에서 머리를 삭발당하며 분노와 체념이 섞인 눈빛으로 카메라를 정면으로 응시하는 소년들의 모습, 그 위로 흐르는 영국 록밴드 라디오헤드의 곡 ‘유 앤 후즈 아미(You and Whose Army)’로 시작되는 ‘그을린 사랑’은 첫 장면부터 관객들을 강렬한 소리와 이미지로 사로잡는다. 그리스 비극을 보는 듯 신화적이고 문학적인 이야기, 전쟁의 광기가 비틀어 놓은 인간성을 묘사하는 냉정하고 건조한 시선, 그 속에서도 삶의 경이와 아름다움을 길어올리는 빼어난 연출과 카메라워크는 이 영화를 보기드문 수작의 반열에 올려놓기에 충분하다. 관객의 입장으로서도 감당하기 어려운 비밀을 무심한 듯 흐르는 카메라로 보여주는 후반부 결말 장면은 오래도록 잊혀지기 어려울 것이다.

진실을 망각하거나 봉인함으로써가 아니라 비극적 운명과 상처를 정면으로 마주함으로써 새로운 세대의 노래를 시작한다는 여주인공의 목소리이자 이 영화의 테마가 돋보이는 작품이다.

프랑스와 캐나다에서 활동하는 레바논계 극작가이자 연출가인 와이디 무아와드의 유명 연극 ‘그을린(Incendies)’을 원작으로 했으며 캐나다의 젊은 거장, 천재감독이라는 찬사를 받는 드니 빌뇌브가 연출했다. 나왈 역의 여배우 루브나 아자발의 연기가 뛰어나다. 21일 개봉. 청소년 관람불가. 

이형석 기자/suk@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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