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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인세 골프소설 20] 골프광이 된 메리 여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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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초의 여성 골퍼인 스코틀랜드 메리 여왕.


[헤럴드경제 스포츠팀] 메리가 18세 되던 1561년의 어느 날 에딘버러 궁전에서 여왕은 시중을 드는 집사장인 메리세턴에게 ‘날씨도 좋으니 필드에 나가서 지난번 잃었던 돈을 도로 찾아야겠다’면서 골프장에 갈 차비를 하라고 일렀다. 집사장 세턴은 여왕과 자주 골프를 즐겼고 둘은 한 번씩 이기고 지는 엇비슷한 실력을 가지고 있었다.

두 사람은 궁전 인근에 위치한 왕실 전용 코스인 글래스고골프장으로 나갔고, 여왕의 티오프로 골프를 치기 시작했다. 메리는 거의 매일같이 광적이라 불릴 정도로 골프를 즐기는 여왕이었다. 여왕이 혹여 게임에 질 때는 상대방에게 고가의 목걸이를 상품으로 줄 정도로 내기도 즐겼다.

16세기 중엽의 스코틀랜드는 가난하고 있는 것이라곤 말 그대로 척박한 땅 뿐이었다. 왕궁에서 소유하고 있던 재산이라고 해야 고작 양떼 뿐이었다. 반면 지방 호족과 귀족들은 호의호식하며 왕권보다 강한 영주의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지방 호족들은 수가 틀리면 왕도 갈아치울 수 있을 정도로 강한 권력을 지니고 있었다. 왕위에 오른 메리가 물려받은 왕권이라고는 가난과 절망, 어두운 나라의 앞날 뿐이었다.

젊은 여인을 여왕으로 앉힌 스코틀랜드를 지켜보면서 잉글랜드는 회심의 미소를 짓고 있었다. 헨리 8세는 스코틀랜드를 차지하기 위해 메리 여왕을 그의 아들 에드워드와 결혼시켜 며느리로 삼으려고 정략결혼 획책을 쓰기 시작했다. 헨리 8세의 누이가 메리의 할아버지인 제임스 4세의 왕비였으니 제임스 5세는 헨리 8세의 조카였고 메리는 조카 손녀의 관계였다. 그렇게 하면 스코틀랜드도 헨리의 손에 들어올 수 있다는 판단에서였다. 게다가 헨리 8세처럼 메리는 튜터가의 혈통이었으니 그보다 좋은 명분은 없었다.

프랑스의 귀족 출신인 메리의 어머니이자 죽은 제임스 5세의 부인인 마리 왕비는 이를 거부했다. 차라리 스코틀랜드를 프랑스에게 맞겼지 잉글랜드의 헨리 8세는 아니라고 생각했다. 독실한 카톨린 신자였던 마리는 헨리 8세가 카톨릭을 탄압한 것에 대해서 누구보다 생생히 알고있었다. 마리는 몰래 프랑스 함대에 메리를 승선시켜 프랑스로 탈출시켰다. 1548년 가을, 6살도 채 안된 어린 메리 여왕은 그렇게 프랑스로 보내졌다.

16세기 중엽의 프랑스는 유럽에서 부국이었다. 프랑스의 앙리 2세 왕은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 프랑스 등 3개국의 정통 왕실의 피를 이어받은, 그야말로 로얄 금수저인 메리를 반겼다. 어린 메리의 눈에 들어온 프랑스는 춥고 헐벗은 스코틀랜드와는 비교도 안될 만큼 별천지였다. 프랑스에서의 13년간 메리는 왕족들이 배워야 할 모든 것을 배우면서 누가 보아도 탐이 날 정도의 재원으로 성장했다.

1560년대의 파리는 이탈리아에서 시작된 르네상스가 프랑스로 전파돼 한창 꽂을 피우고 있을 무렵이었다. 18살의 메리는 사교계의 신데렐라였으며 왕족으로서, 또한 최고 지성인으로서의 모든 것을 접했다. 라틴어는 물론, 그리스어, 스페인어, 이태리어, 영어, 프랑스어까지 모든 언어에 능통했다.

16세 때 그녀는 이미 178센티미터의 늘씬한 키를 자랑했다. 얼굴은 작아 주먹만 했으며 목은 가늘고 길었다. 머리통은 높았고 머리카락은 적갈색이었다. 눈동자는 헤이즐 브라운색이었으며 눈썹은 가늘고 짙었다.

16세기 시대의 풍만해야 했던 미인의 기준과는 많은 차이가 있었지만 누구든지 그녀를 처음 보면 반할 만큼 놀랄만한 지성과 미를 겸비한 여왕이었다. 오히려 메리로 인해 사회에서 여성을 보는 미의 기준이 변하는 계기가 될 정도였다.

메리는 사교계에서 전 유럽의 미를 대표할 만큼 남성들에게 선망의 대상이었다. 이를 지켜 보던 프랑스 국왕인 앙리 2세 역시 완벽했던 메리를 며느리로 삼고싶어했다. 메리로 하여금 스코틀랜드와 프랑스 두 나라를 함께 통치하길 앙리 2세는 원한 것이었다. 결국 왕은 아들인 프랑수아 2세 왕자와 메리를 결혼시켰다. 정치적으로 두 나라 간의 정략결혼은 분명한 사실이었지만 사춘기였던 두 사람은 수줍기만 했다.

프랑수아 왕자는 메리에 비해 상대적으로 너무 키가 작았으나 준수한 용모에 학식을 갖추었다. 17세의 메리와 15세의 프랑수아는 첫사랑을 불태울 수 있는 사춘기의 한창 나이였다. 둘은 골프를 치면서 골프장에서의 사랑을 속삭였다. 프랑스에서의 골프 데이트는 사랑을 이루는 촉매제가 되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프랑스에는 스코틀랜드식 골프는 아직 없었다. 골프장도 메리의 요청에 의해 시아버지가 조성해 놓은 것이었다.

프랑스 사람들은 초원에서 라운드하는 메리와 프랑스와의 모습이 무척 신기해 보였다. 왕족과 귀족들을 시작으로 하나둘씩 따라하면서 너도나도 골프에 매료되기 시작했다. 프랑스 국민들에게 골프를 전파한 주인공은 바로 메리 여왕이었다.

* 필자 이인세 씨는 미주 중앙일보 출신의 골프 역사학자로 1998년 US여자오픈에서 박세리 우승을 현장 취재하는 등 오랜 세월 미국 골프 대회를 경험했으며 수많은 골프 기사를 썼고, 미국 앤틱골프협회 회원으로 남양주에 골프박물관을 세우기도 했다. 저서로는 <그린에서 세계를 품다>, <골프 600년의 비밀>이 있다.
sports@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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