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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스포츠 타타라타] ‘골프 노마드’ 왕정훈 “학교만큼은 한국체대가 뿌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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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체대 골프연습장에서 왕정훈(오른쪽)이 박영민 교수로부터 실기 지도를 받고 있다. [사진=박건태 기자]


# 한국체육대학교(총장 안용규)는 1976년 몬트리올 올림픽에서 양정모가 건국 후 첫 금메달을 딴 것이 계기가 돼 설립됐다. 양정모와 함께 청와대로 초청된 정동구 코치가 “동독과 같은 나라는 라이프니치 대학과 같은 국립체육대학이 있어 과학적인 훈련을 한다”고 말했고, 이를 들은 박정희 대통령이 그해 12월 30일 대통령령 제8322호로 한국체육대학 설립을 조치했다. 올림픽이 탄생배경인 까닭에 한국체대는 이후 ‘한국 엘리트 스포츠의 요람’이 됐다. 2016년 리우 올림픽에서 꼭 100개의 메달(하계 84개, 동계 16개)를 채웠고, 2018 평창 동계올림픽에서는 13개의 메달을 보탰다.

# 한국체대는 프로종목이 뿌리를 내린 축구 야구 농구 배구 등 인기 구기종목은 육성하지 않는다. 골프는 아시안게임 종목인 까닭에 국가대표급 아마추어 선수를 뽑기는 했어도 큰 열정을 쏟지는 않았다. 그러다 2016년 리우 올림픽부터 골프가 다시 정식종목으로 부활됐고, 한국체대는 2016년 신입생부터 세계적인 선수를 육성한다는 목표 하에 프로선수도 받아들였다. 한국체대 골프부를 맡고 있는 박영민 교수에 따르면 2016학번으로 입학한 프로 왕정훈(95년생)이 이런 변화의 시작이었다.

# 2019년 12월. 왕정훈은 매일 한국체대로 등교해 밀린 수업을 받고 있다. 3년째 유러피언 투어에서 풀시드로 활약하는 까닭에 중간중간 귀국할 때, 그리고 이번처럼 연말에 한국체대 특유의 집중수업제를 통해 밀린 수업을 몰아듣는 것이다. 2016년부터 4년째 애를 쓰고 있지만 학점이 조금 모자라 졸업은 2020년 2월을 넘겨 한두 학기 더 다닌 후가 될 듯싶다. 왕정훈의 매니지먼트를 맡고 있는 김명구 스포츠인텔리전스그룹 대표는 “(왕)정훈이는 학창시절을 한국과 필리핀을 오가며 보냈어요. 골프를 아주 잘 쳤는데, 양쪽에서 모두 이질적인 존재가 들어와서 자기들 성적을 뺏어간다고 항의해서 좀 고생을 했죠. 그래서 프로가 된 후에 적을 둔 학교인 한국체대에는 애정이 아주 강해요. 무슨 일이 있어도 졸업장을 받을 계획입니다”라고 소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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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은 날 오후, 왕정훈이 강의실에서 다른 학생들과 함께 수업을 듣고 있다. [사진=박건태 기자]


# 2016년, 또래보다 2년 늦게 대학생활을 시작한 왕정훈은 바로 이해 ‘유럽투어를 씹어먹었다’는 평가와 함께 일약 스타텀에 올랐다. 이미 2012년 17세에 중국투어 최연소 상금왕, 그리고 2013년 1월 아시안투어 최연소 퀄리파잉 통과 등을 기록했지만 2016년과는 비교가 되지 않는다. 5월 대기순번 3번으로, 출전이 보장되지 않은 상태에서 비행기를 타고 간 북아프리카 모로코의 핫산트로피대회에서 연장 두 홀을 포함해 마지막 3홀에서 기적 같은 연속버디를 잡아내며 동화 같은 우승을 달성했다. 그리고 바로 다음 주 모리셔스 오픈에서 또 정상에 올랐다. 이후 2016 리우 올림픽에 출전했고, 2017년 초 카타르 마스터스에서 유리피안 투어 3승을 수확했다.

# 산이 높으면 계곡도 깊다고 했다. 왕정훈은 정점인 리우 올림픽에서 역설적으로 위기의 시작을 맞았다. “4년에 한 번 열리는 올림픽인 까닭에 욕심을 부렸죠. 유럽에서 뛰다가 한국으로 와서 예방주사를 5대나 맞고 전지훈련지인 미국으로 갔는데, 컨디션이 급격히 떨어졌고 결국 바이러스성 뇌수막염에 걸렸어요. 올림픽 부진(43위)은 말할 것도 없고, 귀국 후 두 달간 병원신세를 졌지요.” 72kg이던 체중이 62kg까지 빠졌고, 몸상태가 변하면서 한 번의 슬럼프도 없던 스윙이 망가졌다. 카타르에서 우승컵을 추가한 것은 그 전에 닦아놓은 기량에 운이 따르면서 걸린 것이고, 이후 왕정훈의 샷은 좀처럼 회복되지 않았다. 2017년은 1승으로 버텼고, 2018년도 시드를 유지하기에 급급했다.

# 위기의 바닥은 2019년이었다. 왕정훈은 시즌 종료를 한달여 앞둔 9월 중순까지 유럽투어 랭킹(Race to Dubai)이 200위권 밖으로 밀려나며 115위까지 주어지는 2020시즌 풀시드를 확보하기 어렵게 됐다. 바닥까지 내려갔으니 유러피안 투어는 물론이고, 아시안투어까지 퀄리파잉을 치르겠다는 마음까지 먹었다. 그런데 9월 마지막 주 알프레드 던힐 링크스 챔피언십부터 대반전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이 대회에서 5위를 차지한 왕정훈은 이후 4개 대회에서 82위-10위-48위-6위를 기록하며 올시즌을 마쳤다. 마지막 5개 대회에서 올시즌 기록한 톱10 3번을 모두 만들어낸 ‘기적의 10월’이었다. 최종 103위. 한국인 최초로 유러피언 투어 풀시드를 4년 연속 유지하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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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정훈의 2019시즌 유러피언투어 순위 변화표. 200위권 밖으로 밀렸던 순위를 마지막 5개회에서(최종적으로는 마지막 대회에서) 풀시드 유지 커트라인인 115위(가로선) 위로 끌어올렸다. [이미지=유러피언투어]


# “제 골프인생은 한 번도 내리막이 없었어요. 그런데 올림픽 때 크게 욕심을 한 번 냈더니 크게 망가졌죠. 정말 고생 많았죠. 그런데 가만히 생각하면 올해 바닥을 친 게 오히려 큰 도움이 됐다고 생각해요. 슬럼프를 극복하기 위해 체력훈련, 멘탈트레이닝, 심지어 먹는 것까지 안 해본 것이 없을 정도로 많은 노력을 했어요. 이 과정에서 그동안 등한시 했던 체력운동을 열심히 하게 됐고, 먹는 것까지 신경 쓸 정도로 몸의 소중함도 깨달았어요. 그리고 무엇보다 심리적으로 아주 강해졌습니다. 이제는 더 이상 준비가 덜 된 상태에서 무리하게 욕심을 부리는 일은 없을 것이고, 착실하게 제 골프를 발전시켜 나갈 자신이 있습니다.”

# 중앙일보의 정영재 기자는 한국-필리핀-중국-유럽과 중동을 돌아다니는 왕정훈에게 ‘골프 노마드’라는 별명을 붙인 바 있다. 무척 어울린다. 왕정훈은 2016년 이후 지금까지 나홀로 투어생활을 한다. 유럽에 집도 마련하지 않았고, 그냥 호텔생활이다. “언제 어디서라도 20분 안에 짐을 쌀 수 있어요(미소)”라는 말 그대로다. 지구에서 안식처를 뽑으라면 서울 근교의 집과 한국체대, 2곳이다. 이중 2020년에는 한국체대도 졸업생으로 떠난다. 그리고 새해 1월부터 제2의 골프 노마드 도전에 나선다. 유러피언투어를 누비는 것은 물론, 최종목표인 미PGA투어 진출까지 겨냥하고 있다. 예로부터 유목민은 여러 위기 속에서 강한 생존력과 전투력을 키워왔다. 또 이런 유전자를 가진 이들이 한곳에 정착해 뭔가를 하려고 하면 아주 무섭다고 한다. 다시 왕정훈에 대해 기대를 할 만한 시점이다. [헤럴드경제 스포츠팀=유병철 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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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 웃지 않는 왕정훈(왼쪽)이 박영민 교수와 함께 함박웃음을 지으며 파이팅을 외치고 있다. 박영민 교수는 "왕정훈 선수는 실력도 실력이지만 자신만의 확실한 골프철학과 타인에 대한 배려 등 인성이 아주 좋다"고 칭찬했다. [사진=박건태 기자]




sports@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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