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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스포츠 타타라타] 평창 조직위원장과 인기 대통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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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3월 19대 대통령선거를 앞두고 나온 문재인 대통령의 책 '운명에서 희망으로'.


# 선거를 앞두고 나온 책들이 다 그러하듯 기대 이하였다. 지난 19대 대통령선거를 코앞에 두고 나온 <운명에서 희망으로>이라는 책 얘기다. ‘문재인이 말하고, 심리학자 이나미가 분석하다’는 부제처럼, 선거운동으로 바쁜 문재인은 구술하고, 유명한 심리학자가 이를 정리 분석했다고 하는데 ‘선거용’이라는 딱지만큼이나 실망이 더 크다. 같은 선거용이라 해도 2012년 대선을 앞두고 나온 <문재인의 운명>이 더 낫다. ‘속편’의 마지막 부분에 ‘문재인에게 보내는 고언’에 ‘그는 단호한 사람이다. 그래서’라는 내용이 나온다. 성공한 대통령이 되기 위해서는, 잘 표출되지 않는 단호함을 제대로 발휘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일까? 말수가 적고, 온화한 대통령은 취임 후 각종 정부정책에서 단호한 면을 보여줘 화제가 되고 있다.

# 몇 달 전 평창 동계올림픽조직위원회의 한 직원으로부터 이런 말을 들었다. “조직위 사람들이 서명운동을 하자고 한다. 부디, 최문순 공동위원장을 단독위원장으로 만들어 달라고. 부글부글 끓고 있는 것이다.” 솔직히 처음엔 무슨 말인지 잘 이해하지 못했다. 관료 출신인 이희범 씨가 2016년 5월 12일 조양호 한진그룹 회장의 뒤를 이어 조직위원장으로 취임했고, 2017년 9월 25일 최문순 강원도지사가 공동위원장이 됐다는 사실은 알았지만 그 속내는 몰랐기 때문이다. 이후 지난 11월 중순 다른 평창조직위 사람으로부터 “정말 힘들다. 강원도는 돈이 넘쳐나는데, 조직위는 돈이 없다. 국가적 중요행사가 코앞으로 온 까닭에 뭐라도 제대로 하고 싶은데 정부 눈치보랴, 강원도 눈치보랴 되는 게 없다. 조직위는 돈이 없어 죽겠는데, 강원도는 불꽃놀이 같은 행사에 돈을 펑펑 쓴다”는 푸념을 들었다. 도대체 평창조직위 내에서는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것일까?

# ‘지나고 나니 모두 최순실이었다’는 말처럼 여기에도 최순실 국정농단이 원인이었다. 2014년 7월부터 2018 평창 동계올핌픽조직위원회의 수장을 맡았던 조양호 회장은 2016년 5월 3일 전격 사퇴했다. 조직위는 "조 위원장이 한진그룹의 긴급한 현안 수습을 위해 그룹 경영에 복귀하려고 위원장직 사의를 표명했다"고 발표했지만 이는 빤한 거짓말이다. 최순실 국정농단 수사과정에서 밝혀졌듯이 조양호 회장은 최순실 측이 평창올림픽을 재테크의 수단으로 활용하려는 데 협조하지 않았고, 이에 김종덕 문체부장관으로부터 사퇴 권유를 받자 박차고 나온 것이다. 조 회장은 검찰조사에서 "너무 황당하고 화가 나서 음식도 먹지 않고 바로 나왔다"고 진술했다. 회삿돈 30억 원을 자기 집 인테리어 비용으로 쓰는 재벌오너가 갑자기 최순실 세력에게 항거한 투사로 변하는 웃픈 순간이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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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창 동계올림픽 조직위원회의 이희범 조직위원장. [사진=OSEN]


# 안종범 전 청와대수석의 3월 28일자 업무 수첩에 ‘평창위원장, 조양호→기재부 전관’이라는 메모가 등장한 만큼 조직위원장 교체에는 박근혜 대통령(혹은 최순실)이 개입했다는 의혹이 짙다. 문체부는 조 회장이 사퇴한 지 불과 6시간 만에 새 조직위원장으로 이희범 전 산업자원부 장관을 임명했다. 그리고 이 위원장은 삼성가의 사위인 김재열 제일기획 스포츠사업 총괄사장을 조직위 국제부위원장으로 영입했다. 김 사장은 최 씨가 배후에 있는 한국동계스포츠영재센터에 삼성 측이 16억 2,800만 원을 후원하는 데 핵심 역할을 한 인물이다. 당연히 이희범 위원장도 적폐청산의 대상이 될 법하다. 그런데 5월 들어선 문재인 정부는 이희범을 손대지 않았다. 그리고 이희범도 물러나지 않았다. 이 위원장은 최순실 측에 인사 청탁을 하지 않았고, 되레 거절했다고 밝혔다. ‘시키는 대로 잘하는’ 관료를 좋아하는 박근혜의 눈에 든 것이 잘못인지도 모르겠다. 또 행정고시 수석 출신으로 참여정부 시절 산자부 장관을 지낸 경력(인연)이 새 정부의 판단에 작용했다는 분석도 있다.

# 문제는 다음이다. 악독한 전임자가 뽑아놓은 중역이 있다고 치자. 사정이야 어떻든 새 사장(대통령)은 그를 내보내지 못했다. 그렇다면 ‘일’을 위해 그를 밀어주든지, 아니면 식물상태로 무력화시키는 두 갈래의 길이 있다. 문재인 정부는 ‘평창이 중요하다’고 누차 강조하면서 후자의 방법을 택하고 있다. 그러니 이 ‘중역’이 맡고 있는 조직위는 활력을 잃는 것이다. 평창동계올림픽의 세 주체는 조직위, 문체부, 강원도다. 마침 강원도는 집권여당의 사람(최문순)이 도지사를 맡고 있다. 코드가 맞는 문체부와 강원도는 협력이 잘 되는 반면 조직위는 문체부의 눈치를 보거나, 강원도에 돈을 타내기에 바쁜 것이다. 오죽하면 조직위의 실무진들이 ‘최문순 공동위원장을 단독위원장으로 만들어달라’고 얘기하겠는가? 실무진들은 최순실 사태와 관련이 없다. 그들은 업무가 안 되고, 국가적 행사가 잘못될까 걱정이 돼 분통을 터트리는 것이다.

# 그렇지 않다고? 부디 위정자들이 평창 동계올림픽 조직위원회의 내부사정을 애써 무시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직원 몇 명만 만나 진득하게 얘기를 들으면 쉽게 알 수 있다. 또 겉으로 드러나 사례만 면밀히 봐도 식물 조직위원장의 분위기는 쉽게 감지된다. 먼저 돈 문제부터 보자. 이희범 조직위원장은 지난 3월 기자회견에서 민간기업의 스폰서 충당금이 목표액까지 약 500억 원이 모자란다고 밝혔다. 그리고 문재인 정부는 지난 7월 557억 원의 평창올림픽 지원예산을 국회에서 통과시켰다. 국내외 홍보(230억원), 도시경관 개선(35억원), 문화올림픽 붐업(152억원), 손님맞이 숙식 개선(9억원) 등으로 짜인 이 추경예산은 강원도가 올린 것으로, 당연히 집행도 강원도가 한다. 심지어 문체부는 지난달 20일부터 노태강 2차관을 평창으로 보내 현장에서 올림픽 업무를 진두지휘하도록 했다. 노 차관은 박근혜 대통령으로부터 정유라를 돕지 않는다고 나쁜 사람으로 찍혀 한직으로 물러났던 사람이다. 이희범 조직위원장, 최문순 강원도지사, 노태강 차관의 3자 협력? 그냥 ‘식물 위원장’이 맞고, 조직위 직원들이 고생할 뿐이다.

# 안타까운 건 체육과 관련된 진보정권의 실기(失期)다. 국가적 행사인 2018 평창 동계올림픽은 이념을 떠나 성공적 개최를 위해 국가적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그렇다면 그 중심인 조직위원회는 힘을 실어줘야 한다. 조직위원장이 마음에 안 들면 진작 바꿔야지, 그대로 세워둔 채 문체부와 강원도가 조직위를 압도하니 크고 작은 문제가 계속되는 것이다. 원래 진보는 스포츠에 좀 무관심하다. ‘3S’로 치부하는 옛 습성이 남아 있는 듯싶다. 따지고 보니 <운명에서 희망으로>에도 여러 국가정책을 언급하면서 체육에 대한 얘기는 거의 없다. 청와대에 체육 전문 비서관도 없다고 한다. 무슨 일이든 관심이 없으면 기회를 놓치고, 실수가 나오는 법이다. 인기가 높은 대통령이 이런 ‘사소한’ 것도 알아줬으면 한다. 참, 원래 어제가 대통령선거일이었다. [헤럴드경제 스포츠팀=유병철 편집장]
sports@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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