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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레전드 오브 풋볼] ‘60년대 유로피언컵 3연패’ 바이에른뮌헨의 레전드 3인방
[헤럴드경제 스포츠팀=김유미 기자] 바이에른뮌헨(이하 뮌헨)은 독일 분데스리가를 대표하는 팀이다. 분데스리가 최다 우승을 비롯해 최근 수 년 동안 리그를 독식해왔고, 유럽 최정상급 선수들을 배출하는 명문구단이다.

오늘날 뮌헨이 빅클럽이라는 데에 이견이 없지만 한때 뮌헨은 2부 리그에 있던 별 볼 일 없는 팀이었다. 그랬던 뮌헨을 유럽 정상으로 끌어올린 선수들이 있다. 이들은 유러피언컵(현 챔피언스리그)에서 3연패를 달성했는데, 이는 뮌헨을 비롯해 레알마드리드와 아약스 3팀만이 기록한 레전드다. <레전드 오브 풋볼>은 1960년대 뮌헨의 유로피언컵 3연패 달성을 이끈 공신이자, 바이에른뮌헨의 역대 베스트11에 꼽히는 3인방을 소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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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프 마이어는 올리버 칸, 마누엘 노이어와 비견되는 독일과 바이에른뮌헨의 레전드 골키퍼다. [사진=FIFA 홈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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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프 마이어는 올리버 칸, 마누엘 노이어와 비견되는 독일과 바이에른뮌헨의 레전드 골키퍼다. [사진=FIFA 홈페이지]


제프 마이어 - 뮌헨 ‘골키퍼 황금 계보’의 시초

1944년생인 제프 마이어는 뮌헨의 원클럽맨이자 레전드 골키퍼다. 보도 일그너, 올리버 칸, 마누엘 노이어에 이르는 뮌헨 골키퍼 라인의 ‘조상님’이다. 마이어는 빠른 반사 신경과 그에 따른 순발력으로 ‘안칭(뮌헨의 지역명)의 고양이’라는 별명을 얻었다.

1958년 뮌헨의 유소년 팀에서 축구를 시작한 마이어는 4년 뒤 1군 무대에 데뷔했다. 첫 시즌에 4경기, 다음 시즌에는 23경기에 출장했고, 64-65시즌부터 78-79시즌까지 15시즌 연속 30경기 이상 출장했다. 특히 66-67시즌부터 78-79시즌 사이에는 13경기 연속 전 경기에 출장하면서 422경기 연속 출장 기록을 세웠다. 리그 통산 536경기, 통산 599경기에 출장하면서 ‘철인’이라는 별명도 따라붙었다.

마이어는 1974년부터 76년까지 뮌헨의 유러피언컵 3연속 우승을 이끌었다. 뮌헨에서 뛰는 동안 분데스리가와 DFB포칼 각각 4회, 유러피언컵 3회, 위너스컵과 인터컨티넨탈컵 각각 1회 등 수많은 우승 트로피를 들어 올렸다. 선수생활의 최고 전성기였던 1070년대 중후반(75, 77, 78년) 독일 올해의 선수에 선정됐고, 피파 100인의 선수, 20세기 독일 최고의 골키퍼에도 이름을 올렸다.

마이어는 서독 대표 팀에서도 맹활약을 펼쳤다. 청소년 대표를 거쳐 성인 대표에 발탁된 마이어는 95번이나 A매치에 나섰다. 1966년 잉글랜드 월드컵을 시작으로, 1970년 멕시코 월드컵, 1974년 서독 월드컵, 1978년 아르헨티나 월드컵까지 4연속 출전했다. 멕시코 월드컵에서는 전 경기에 출장했는데, 이때 서독은 준결승에서 이탈리아를 만나 3-4로 패배했다. 고국에서 개최된 서독 대회에서는 고향인 뮌헨에서 치러진 결승전에 출전했다. 당시 서독은 마이어, 게르트 뮐러, 프란츠 베켄바워 등이 포진했는데, 요한 크루이프가 속한 네덜란드를 상대로 2-1로 승리하며 월드컵 우승을 차지했다. 마이어는 이 대회에서 최우수 골키퍼로 선정됐다.

마이어는 유로피언 챔피언십에서는 1972년 우승, 1976년 준우승을 차지하기도 했다. 특히 1976년 대회의 결승전 승부차기에서 체코슬로바키아의 안토닌 파넨카에게 그 유명한 ‘파넨카 킥’을 허용했다(이 장면은 인터넷에서 동영상을 쉽게 찾아 볼 수 있다).

마이어는 1979년 갑작스러운 교통사고로 시즌 아웃되며 은퇴 수순을 밟았다. 바로 직전 시즌까지 전 경기에 출전했기에 아쉬운 마무리였다. 은퇴 후 마이어는 1988년부터 2004년까지 독일 대표팀의 골키퍼 코치를 역임했다. 동시에 1994년부터 2008년 은퇴할 때까지 뮌헨의 골키퍼 코치로 올리버 칸 등을 가르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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놀라운 득점력으로 700골 이상 대기록을 작성한 게르트 밀러.[사진=분데스리가 홈페이지]놀라운 득점력으로 700골 이상 대기록을 작성한 게르트 밀러. [사진=분데스리가 홈페이지]


게르트 뮐러 - 경기 평균 1골, 뮌헨 폭격기

마이어보다 1살 어린 게르트 뮐러(1945년생)는 전설적인 스트라이커다. 1963년 독일 7부 리그였던 뇌르틀링겐에서 데뷔했다. 데뷔 첫 시즌부터 주전으로 출전해 31경기에서 51골이라는 믿기 힘든 활약을 펼쳤다. 이때 그의 나이는 고작 18세. 탁월한 득점감각으로 ‘폭격기’라는 별명이 붙었다. 데뷔 시즌의 활약으로 뮐러는 곧바로 뮌헨 유니폼을 입었다.

당시 뮌헨은 독일 최고 클럽이 아니었다. 1860뮌헨, 보루시아 도르트문트, 쾰른 등이 더 많은 인기를 누렸고, 성적도 좋았다. 이즈음 독일 1부 리그는 분데스리가라는 타이틀을 달고 새롭게 출범했다. 하지만 이 시절에는 같은 연고지를 둔 팀은 1부 리그에 함께 속할 수 없다는 조항이 있었고, 1860뮌헨에 밀린 바이에른뮌헨은 2부 리그에서 출발했다. 곧 뮌헨은 게르트 뮐러와 베켄바워의 합류로 독일 최강 클럽으로 거듭나기 시작했다. 뮐러는 뮌헨 데뷔 시즌에서 26경기 33골로 뮌헨을 대표하는 스타로 떠올랐다.

뮌헨이 분데스리가로 승격한 65-66시즌부터 뮐러의 가치가 더욱 상승했다. 분데스리가 첫 시즌에 33경기 15골을 기록했다. 리그 우승은 놓쳤지만 DFB포칼 우승을 견인했고, 뮌헨은 이후 이 대회 3연패를 달성했다.

68-69시즌 뮌헨의 약진이 시작됐다. 분데스리가와 DFB포칼 더블 우승을 달성했고, 뮐러는 30경기 30골로 리그 득점왕에 올랐다. 73-74시즌에는 유러피언컵에서 10경기 8골을 터트리며 팀 역사상 최초 빅이어를 들어 올렸고 이후 3연속 우승의 금자탑을 쌓았다.

뮐러는 국가대표로도 대단한 커리어를 쌓았다. 1966년부터 약 8년 동안 활약했는데, 62경기에서 68골을 기록했다. 그의 마지막 A매치는 1974년 서독 월드컵이었다. 이 대회 결승전에서 결승골을 터트리며 국가대표 마지막 경기를 화려하게 장식했다. 뮐러는 월드컵 통산 14골로 20세기 내내 월드컵 최다 득점 기록을 보유하기도 했다. 이는 2006년 브라질의 호나우두(15골)와 2014년 독일의 클로제(16골)에 의해 경신됐다.

뮐러는 뮌헨에 몸담는 동안 리그와 DFB포칼 4회, 유러피언컵 3회, 인터컨티넨탈컵 1회 우승 등 14개의 트로피를 수집했고, 국가대표 유니폼을 입고 유로와 월드컵 우승을 맛봤다. 개인 수상도 엄청났다. 1970년 발롱도르 수상을 시작으로 독일 올해의 선수상 2회, 분데스리가 득점왕 7회, 골든슈 2회, 월드컵 골든부츠 1회, 유러피언컵 득점왕 4회 등을 거머쥐었다.

뮐러는 선수생활 내내 771경기에 출전해 723골을 뽑아내며 진정한 스트라이커의 면모를 뽐냈다. 1972년에는 한 시즌에만 85골을 넣으며 최다 득점 기록을 세웠다. 영원히 깨지지 않을 것 같던 이 기록은 2012년 한 시즌 91골을 터트린 리오넬 메시(바르셀로나)에 의해 경신됐다.

은퇴 후 뮐러는 알코올 중독에 시달렸다. 재활치료 치료 후 뮐러는 잠시 뮌헨의 2군 팀을 지도했다. 70세 생일을 앞둔 2015년 그의 알츠하이머 투병 소식이 알려졌고, 알코올 중독이 그 요인 중 하나로 꼽히며 축구 팬들의 가슴을 아프게 만들기도 했다.

<사진_베켄바워>
프란츠 베켄바워 - 리베로의 창시자

3인방 중 가장 널리 알려진 프란츠 베켄바워(1945년생)는 리베로의 창시자다. 축구 역사상 처음으로 경기를 지배하는 수비수였고, 수비수지만 플레이메이커 역할을 수행한 전대 미문의 플레이어로 극찬을 받았다.

베켄바워는 1945년 독일 뮌헨에서 태어났다. 1959년 뮌헨 유스팀에 입단한 그는 5년 뒤 1군에 데뷔했다. 2부 리그 소속이었던 뮌헨은 베켄바워의 데뷔와 동시에 승격에 성공했다. 그리고 뮌헨은 앞서 소개된 선수들과 함께 최강의 조합을 자랑하는 팀이 됐다.

뮌헨은 1966년 DFB포칼 우승 후 베켄바워의 파트너인 한스 게오르크 슈바르첸벡을 유스 팀에서 데려와 최강의 중앙 수비 조합을 완성시켰다. 이후 뮌헨은 DFB포칼과 UEFA 위너스컵을 제패하며 승승장구했다. 1970년 베켄바워는 베르너 올크의 뒤를 이어 뮌헨의 주장이 됐고 1977년 제프 마이어가 완장을 넘겨받기 전까지 뮌헨의 캡틴으로 활약했다. 또 뮌헨에서 뛰는 동안 수많은 우승 트로피를 팀에 선사했다.

1977년 베켄바워는 뮌헨을 떠나 축구 불모지였던 미국에 진출했다. 뉴욕 코스모스에 입단해 네 시즌 동안 3회 우승을 달성했다. 1980년 다시 독일로 복귀했고 행선지는 함부르크였다. 함부르크에서도 분데스리가 우승을 차지했고, 1983년 뉴욕으로 돌아가 은퇴를 선언했다.

1966년 잉글랜드 월드컵을 시작으로 국가대표 커리어를 시작한 베켄바워는 이 대회 결승에서 잉글랜드와 맞붙었고, 당시 최고의 공격형 미드필더였던 보비 찰튼를 상대로 멋진 플레이를 펼치기도 했다. 또 수비수로 출장했지만 4골을 터트려 대회 득점 3위에 올랐다.

잉글랜드와의 인연은 다음 월드컵에서도 계속됐다. 1970년 멕시코 월드컵 8강에서 잉글랜드를 만났는데, 0-2로 처져있던 독일은 3-2 역전승을 거두며 준결승에 진출했다. 이탈리아와 결승의 문턱에서 혈투를 벌였지만 결국 3-4로 패배했다. 이 경기에서 베켄바워는 쇄골이 부러지는 부상에도 90분 풀타임에 연장 전후반까지 소화하는 투혼을 발휘했다.

베켄바워는 유로 1972에서 소속팀 파트너인 슈바르첸벡과 함께 호흡을 맞추며 우승을 거뒀고, 1974년에는 서독 월드컵에서 네덜란드를 꺾고 월드컵 우승컵을 차지했다. 베켄바워는 모든 클럽에서 우승을 경험했고, 모든 국가 대항전과 유럽 대항전에서 우승컵을 들어 올리는 영광을 얻었다.

베켄바워는 지도자로서도 성공적인 커리어를 쌓았다. 1983년 현역에서 은퇴한 그는 이듬해 독일 국가대표 사령탑에 올랐다. 감독으로 참가한 첫 대회인 1986년 멕시코 월드컵에서는 결승에서 아르헨티나에 패배해 준우승을 차지했고, 4년 뒤 1990년 이탈리아 월드컵 결승에서도 다시 아르헨티나를 만나 설욕에 성공하면서 독일의 역대 세 번째 월드컵 우승이자, 서독의 마지막 월드컵 우승을 이뤘다. 물론 선수와 지도자로 월드컵에서 우승한 첫 주인공이 됐다.

베켄바워는 1994년 뮌헨 회장직에 올랐다. 잠시 감독을 맡아 분데스리가와 UEFA컵 1회 우승을 달성하기도 했다. 95-96 시즌에는 특이한 경험을 했는데, 당시 감독이었던 오토 레하겔이 구단과 갈등을 일으킨 끝에 해고를 당하면서 UEFA컵 결승전에서 베켄바워가 지휘봉을 잡은 일이었다. 베켄바워는 단 한 경기만 팀을 맡았는데, 뮌헨이 UEFA컵 우승을 차지하면서 UEFA컵 우승 경력을 갖게 됐다. 현재 베켄바워는 바이에른뮌헨의 명예회장이자 국제축구연맹(FIFA)의 집행위원으로 활동 중이다.

1960년대 유로피언컵 3연패를 달성한 바이에른뮌헨 레전드 3인방에 대해서는 ‘축덕들이 만드는 팟캐스트 해축야화 41화’를 통해 자세히 들을 수 있다. 해축야화는 매주 금요일에 1부가, 토요일에 2부가 업로드 되며, 팟캐스트 어플 ‘팟빵’을 통해 들을 수 있다.

* 레전드 오브 풋볼은 축구 팟캐스트 ‘해축야화’의 한 코너입니다. 아래 URL을 클릭하면 바로 방송을 청취할 수 있습니다.

http://www.podbbang.com/ch/10698

sports@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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