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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스포츠 타타라타] 톨스토이로 본 설연휴 스포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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톨스토이의 <안나 카레니나> 표지.


# 밀란 쿤데라의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에서 토마스를 찾아온 테레사의 손에 들려 있던 소설은 <안나 카레니나>였다. 불륜을 다룬 이 소설은 대작가 쿤데라가 이런 식으로 오마주를 표했을 정도로 톨스토이의 대표작 중 하나이다. 그리고 이 소설의 첫 문장은 이제는 진부하다는 느낌이 들 정도로 유명하다. ‘행복한 가정은 살아가는 모습이 모두 비슷하다. 그러나 불행한 가정은 불행한 이유가 제각기 다르다.’ 이어 안나의 가정은 사랑이 불행의 요소였다며 ‘두괄식’으로 이야기가 시작된다.

# 이 시작이 얼마나 유명하냐면, ‘안나 카레니나 법칙’이 나올 정도다. 역시 세계적으로 유명하고, 한국에서는 서울대도서관 대출 1위라는 정말 석연찮은 이유로 더 유명한 <총, 균, 쇠>의 저자 재러드 다이아몬드가 이 법칙을 명명했다(톨스토이의 주장에 격하게 동의했다고 추정). 성공의 이유는 한 가지가 아니라, 수많은 실패요인이 없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다이아몬드는 야생동식물을 예로 들어, 한 가지 조건이라도 충족되지 않으면 가축·작물이 되지 못하고 야생으로 남는다고 했다. 이게 ‘안나 카레니나 법칙’이다.

# 지난 2016년 설 연휴 기간 동안 눈길을 끄는 국내외 스포츠경기가 있었다. 먼저 국내 프로배구에서 현대캐피탈이 2월 9일 선두 OK저축은행을 3-0으로 셧아웃시키고 파죽의 12연승을 기록했다(한 시즌 역대 최다, 복수시즌은 2006년 삼성화재의 17연승). 그러자 선수는 물론 최태웅 감독이 찬사를 받았다. ‘스피드 배구’, ‘최태웅 매직’ 등 단정한 표현을 넘어 스승인 신치용 전 삼성화재감독의 별명(코트의 제갈공명)도 언론을 통해 전수됐다. 심지어 “유능제강(柔能制剛·부드러운 것이 강한 것을 이긴다)과 과유불급(過猶不及·지나친 것은 미치지 못하는 것과 같다)”, “코트를 놀이터라고 생각해라”, “여기 있는 모든 사람들이 너희를 응원한다”는 등의 작전지시가 ‘어록’으로 화제가 되기도 했다. 책을 한 권 낼 정도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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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죽의 12연승으로 '어록'이 나올 정도로 화제가 된 최태웅 현대캐피탈 감독.


# 같은 날 남자프로농구에서는 추승균 KCC 감독이 화제였다. KCC가 창원 원정경기에서 홈팀 LG를 85-80으로 꺾으며, 이날 부산kt에 패한 울산모비스를 제치고 선두로 등극했기 때문이다. ‘초보감독 이러다 일 내겠네’, ‘구성원의 성과를 향상시키는 리더-추승균’, ‘명장이 새로 탄생하는가’, ‘역시 소리 없이 강했다(‘소리 없이 강한 남자’는 추승균의 선수시절 별명)’ 등의 호평이 쏟아졌다. 그 비결로는 추 감독이 행하고 있는 칭찬 릴레이라는 분석도 나왔다.

# 하루 앞선 한국시간 8일 EPL의 첼시는 25라운드 경기에서 맨유를 상대로 1-1로 비겼다. 문제아였다가 히딩크 감독 부임 후 ‘범생이’가 된 디에고 코스타가 막판 극적인 동점골을 넣어 명승부를 완성했다. 히딩크는 지난해 12월 시즌 중 경질된 조세 무리뉴 감독을 대신해 임시로 첼시의 지휘봉을 잡았다. 당시 첼시는 강등권과 불과 승점 1 차이로 16위였다. 그런데 히딩크 감독 부임 후 첼시는 리그에서 3승 6무로 9경기째 패배를 모른다(순위는 13위로 상승). 코스타를 비롯, 태업 의혹까지 샀던 오스카와 에당 아자르가 히딩크 밑에서 환골탈태했다. 히딩크는 2008~09시즌에도 첼시를 위기로부터 구해내며 프리미어리그 3위, 챔피언스리그 4강, FA컵 우승이라는 성과물을 만든 바 있다. 현재 첼시는 한국 호주 영국 등에서 이미 검증된 히딩크 매직의 최신 버전인 셈이다. 이러니 11일에는 영국언론에서 ‘히딩크 감독이 다음 시즌에도 첼시를 맡을 수 있다’는 보도까지 나왔다.

# 다시 톨스토이. 안나는 사랑 때문에, 그리고 어떤 가정은 가난이나, 건강 때문에 불행할 수 있다. 불행의 이유는 참 다양하다. 하지만 화목한 가정은 대개 비슷해 보인다. 그런데 위의 설연휴 스포츠경기에서 확인했듯이 이 말은 어쩌면 가정보다 스포츠에 더 잘 어울리지도 모른다. 잘 되는 팀은 멋진 지도자에 선수들이 의기투합하며 하나가 되는 모습이 비슷하다. 반면 안 되는 팀은 부상, 불화, 불운 등 참 그 이유도 가지각색이다. 이쯤이면 갖다붙인 셈 치고는 제법 그럴 듯하다(첫 번째 논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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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키백과에 실려 있는 톨스토이의 사진.


# 여기서 사족(혹은 반전)이 하나. 성인급 반열에 오른 대문호와 세계적인 석학이 그렇다고 하니 ‘안나 카레니나 법칙’에 저항하기가 쉽지 않다. ‘권위에의 호소’가 세도 너무 세다. 그런데 세계인이 감동하는 이 <안나 카레니나>의 첫 문장은 문학의 영역을 넘어 논리로 따져보면 사실 허술하다. 이는 간단히 뒤집어 생각하면 이해가 쉽다. 즉, ‘불행한 가정은 그 모습이 대개 비슷하지만, 행복한 가정은 제 나름의 이유가 있다’라고 하자. 이것도 말이 안 될 이유가 없다. 우리의 대문호가 살짝 이중잣대를 썼고, 논리적으로 ‘결과지상주의’에 기대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사실 스포츠야말로 결과를 가장 중시하는 영역이다. 그래서 톨스토이가 여기까지는 생각하지 못했겠지만 안나 카레니나 법칙은 ‘가정’보다는 ‘스포츠’에 더 잘 어울린다(두 번째 논증).

# 끝으로 불필요한 욕을 먹기 싫어서 하는 말인데 유시민이 <청춘의 독서>에서 극권하고, 작가 김별아가 자신의 산문집 제목을 <톨스토이처럼 죽고 싶다>고 한 위대한 작가 톨스토이를 ‘디스’할 능력이나 의도는 없다. 인간의 속성을 그만큼 그려낸 작가가 또 있을까 싶다. 개인적으로 젊었을 때는 <전쟁과 평화>가, 나이가 들면서는 <안나 카레니나>가, 그리고 최근에는 <이반 일리치의 죽음>에 끌렸고, 조만간 <부활>을 다시 읽지 않을까 싶다. 그러니까 그의 삶 순서대로, 연대기식으로까지 톨스토이를 존경한다. 다만 예전에는 그렇게 울림이 컸던 <안나 카레니나>의 첫 문장을 스포츠 영역에서 냉정하게 평가해봤을 뿐이다. 가족이 모이는 설 연휴에 말이다. [헤럴드스포츠=유병철 편집장 einer6623@unicon.kr]


sports@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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