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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조영섭의 링사이드산책] (8) 유명우에 앞섰던 ‘천재복서’ 황동룡
오늘의 주인공은 아마추어 플라이급 국가대표 상비군이었던 황동룡이라는 복서입니다. 그는 1962년 6월 8일 전북 군산 태생으로 지긋지긋한 가난 때문에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상경, 일찌감치 험난한 세파와 맞부딪히며 고단한 유년기를 보냈습니다. 처음 복싱을 배웠던 체육관은 당시 성북구청에 있던, 박태식 씨(74 테헤란 아시안게임 은메달리스트, 79년도 세계 주니어선수권 금메달리스트 박기철의 삼촌)가 운영하던 오뚜기체육관이었습니다. 이곳에서 황동룡은 1979년 32회 전국 신인대회 코크급에서 우승하며 성장 가능성을 보여주었고, 이듬해 박태식 씨가 태릉선수촌에 코치로 입촌하자 곧바로 고향으로 낙향하여 군산에서 제2의 복싱인생을 펼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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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추어 국가대표 상비군 시절의 황동룡.


황동룡은 1981년 제62회 전국체육대회 플라이급 결승에서 경기도 대표인 인도네시아 대통령배 최우수 복서 출신인 박재석(63년생 경기도 화성)과 치열한 접전 끝에 판정승을 거두고 금메달을 차지했습니다. 이어 이듬해 1982년도 대통령배 플라이급 결승에서 대구 대산체육관의 윤석환(62년생)을 꺾고 우승했습니다. 그해 뉴델리 아시안게임 최종선발전에서 국가대표 권채오(60년생 동양 밴텀급 챔피언 권창재의 친형)에게 근소한 차로 판정으로 패했지만 그해 12월 전국선수권대회에서 판정으로 설욕하며 1승 1패로 균형을 맞췄습니다.

또한 1983년 로마 월드컵 2차선발전에서 후에 국제대회 5관왕에 빛나는 서정수(운봉공고 홍익대)와 성광배(순천금단고-한국체대 현 아마추어 연맹 중앙심판)를 각각 2라운드 RSC로 물리치고 우승하는 등 발군의 실력을 보였습니다. 그해 베네수엘라에서 벌어진 볼리바르컵 대회에 국가대표로 출전해 8강에서 우세한 경기를 벌이고도 억울하게 패해 탈락했지만 국제적으로도 그 가능성을 인정받았습니다. 볼리바르컵은 지금은 없어졌지만 당시 쿠바 미국 소련 등이 모두 참가하는, 세계선수권대회에 준하는 국제대회였습니다(이 대회에서 부산 금성고 2학년이었던 박용운이 푸에르 토리코 선수를 꺾고 유일한 동메달을 획득하기도 했습니다).

황동룡은 20세 전후의 그 시절, 낮에는 생활전선에 뛰어들어 공사판에서 막일을 하고 저녁에는 훈련을 하는 악조건에 놓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실한 생활태도와 빼어난 성적을 보였으니 후배들에게 귀감이 됐습니다.

마마 심의 발탁, 화려한 프로행

1983년 로마 월드컵 최종선발전이 동국대학교에서 벌어졌고 황동룡은 첫 판에서 김광선(동국대)과 맞붙기로 예정돼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미 88프로모션과 계약을 하고, 프로행을 선언한 직후였기 때문에 그 경기를 포기하고 곧바로 세계챔피언에 꿈을 안고 프로에 첫발을 내딛었습니다. 황동룡은 키 163cm에 스피드가 상당히 뛰어났고, 샘처럼 끊임없이 솟아나는 체력이 최대장점이었습니다. 게다가 강한 멘탈까지 지닌 복서였으니 심영자 회장은 첫눈에 ‘물건’임을 직감했고, 그는 88프로모션의 차세대 세계챔피언 선두주자로 기대를 한 몸에 받았습니다. 단지 핸디캡이라면 선천적으로 손목이 약해 강펀치를 날릴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제가 놀림조로 ‘마사지사’라는 별명을 지었을 정도였습니다.

황동룡은 1984년 1월 28일 전주도와 파운삭 무앙수린과의 IBF 주니어 밴텀급 타이틀전에서 오픈게임으로 출전하여 원진체육관의 정창호를 상대로 현란한 기술을 선보이며 이견이 없는 판정승을 거두며 주위의 기대에 부응했습니다. 첫 경기부터 될성부른 떡잎으로 자타가 인정할 정도로 수준 높은 경기력을 보이자 복싱인들의 관심이 집중된 것이죠. 그리고 4연승(1KO승)을 거둔 8월의 어느 날 심영자 회장은 중대한 결심을 합니다. 당시 WBA 라이트플라이급 2위였던 프로경력 8년의 베테랑 복서인 멕시코의 헤르만 토레스(57년생)와의 국제전을 성사시킨 겁니다.

경기는 1984년 9월 22일 문화체육관에서 벌어졌습니다. 당시 토레스는 46전 40승 35KO 5패 1무를 기록 중인 강타자였으며, WBA 동급 챔피언이었던 루페 마데라를 상대로 한 차례 KO승을 비롯해 2연승을 거두기도 했습니다. 심지어 유명우와 접전 끝에 타이틀을 내줬던 조이 올리버도 꺾은 경력도 있었죠. 모두가 시기상조라고 입을 모았고, 심지어는 계란으로 바위치기라는 여론이 팽배했습니다. 그러나 황동룡은 기대 이상의 선전을 펼치며 완벽한 승리를 거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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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동룡 선수와 명장 이영래 사범.


4전짜리 신예가 46전의 강타를 잡다!


당시 필자는 링사이드에서 어느 누구보다도 유심히 경기를 관람했습니다. 음악용어를 빌리자면 헤르만 토레스는 안단테(Andante) 스타일이었다면, 황동룡은 프레스토(Presto) 리듬이었습니다. 말이 필요 없는 현격한 점수 차의 일방적인 완봉승이었습니다. 스피드에서 크게 뒤진 헤르만 토레스는 복싱계에서 흔히 말하는 목표물을 맞히지 못하고 허공에 바람소리를 일으킨다는 표현인 ‘선풍기 펀치’를 연발했습니다(후에 황동룡은 웃으면서 선풍기 바람 때문에 시원하게 경기했다고 회고했습니다). 황동룡은 강호 토레스를 맞이하여 자유자재로 스피드한 연타공격을 전 라운드에 걸쳐 일방적으로 퍼부었습니다. 데미지를 줄만한 강타는 없었지만 충분히 만족할 만한 성과를 거두었다고 자평했습니다. 세계챔피언 장정구와의 2차 방어전 상대였던 토레스는 쉽게 생각했던 신출내기에게 손 한 번 못쓰고 참패를 당하고 것입니다. 후에 토레스 선수는 장정구가 반납한 WBC 라이트 플라이급 타이틀을 차지하게 됩니다. 토레스의 종신전적은 80전 63승 13패 4무 47KO승입니다.

이러니 황동룡에 대한 기대가 절정에 달했습니다. 장정구를 키운 이영래 씨가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울 정도이니 더 이상 설명이 필요 없을 정도였습니다. 1984년 4,5월 김진길 관장과 유명우(64년생)는 세 차례 정도 당시 심영자 회장의 자택인 워커힐 아파트를 찾았습니다. 이유는 단 하나 유명우를 좋은 프로모션으로 입양시켜 폭넓게 활동할 수 있도록 진로를 터주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렇지만 결론부터 말하면 88프로모션은 유명우 스카우트를 철회하고 말았습니다. 당시 유명우는 14전 전승을 거두고 있었지만 KO승이 단 한 차례밖에 없었고, 가장 중요하게는 황동룡이라는 좋은 복서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유명우는 그즈음에 88체육관에서 황동룡과 두세 차례 스파링을 했는데 88프로모션 자체 평가에서 황동룡의 성장가능성이 더 높이 나왔습니다. 이는 ‘한국의 안젤로 던디’라고 불리는 이영래 사범의 회고에서 알 수 있습니다. "그때 (황)동룡이가 세계 도전에 나섰다면 7할 이상의 확률로 승산이 있었다고 생각해. 우리 시나리오대로 그렇게 되었다면 어쩌면 유명우는 조금 늦게 챔피언이 되었을지도 모르지."

유명우를 능가한 발전가능성

황동룡의 트레이너는 ‘천하의 명장’ 이영래 사범이었는데, 프로모션 내부에서 토의를 한 결과 ‘유명우 영입불가’가 결정된 것입니다. 김진길 관장은 몹시 서운했을 겁니다. 김철호, 양일 때부터 이어온 심 회장과의 인간적인 관계가 있어 88프로모션 입단이 무난할 줄 알았지만 황동룡이라는 복병에 가로막혔기 때문이죠. 김 관장은 곧바로 한때 자신의 트레이닝을 받았던 동아프로모션의 김현치(45년생) 회장에게 유명우를 보냅니다.

황동룡은 토레스 전이 끝난 후 곧바로 WBA 세계랭킹 8위에 진입하고, 당시 챔피언이었던 도미니카의 프란시스코 퀴로즈와의 일전을 목전에 두게 됩니다. 퀴로즈는 22전 10승 3KO 1무 10패 1무판정을 기록한 ‘평범한’ 챔피언이었습니다. 챔피언벨트도 호세 데 헤수스(푸에르토리코)라는 지명 도전 선수가 도전을 펑크내는 바람에 급조된 대타로 출전하여, 방심했던 루페 마데라를 9라운드 KO승으로 운 좋게 제압하며 획득했습니다.

당시 라이트플라이급은 WBC쪽은 장정구가 너무도 탄탄하게 집권을 하고 있었던 것에 반해 WBA는 구시켄 요코(1955년 일본)의 몰락 이후 페드로 플로레스(멕시코 21전 15승 4KO 6패)-김환진(한국)-도카시키(일본)-루페 마데라(멕시코 50전 36승 12KO 2무 12패)를 거쳐 퀴로즈로 왕좌계승이 빠르게 이어지고 있었습니다. 특히 마데라는 솜방망이의 대명사 미구엘 칸토에게마저도 KO패 당할 정도로 내구력이 부족한 복서였습니다. 다시말해 미국이나 중남미에서는 마이크 카바할(미국)이나 옴베르트 곤잘레스(멕시코) 같은 밀리언달러급 복서가 나타나기 전이었기에 별로 인기도 없었고 고만고만한 챔피언들끼리 그들만의 리그를 벌이고 있을 때였습니다. 한 마디로 도토리 키재기. 이런 상황에서 만만한 챔피언을 국내로 데려오기 위해 심영자 회장은 ‘실탄’ 15만 달러를 준비하는 등 만반의 준비를 갖췄습니다. 황동룡의 세계챔프 등극은 시간문제였던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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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영자 회장과 그가 안타깝게 놓쳐버린 유명우.


아! 내 눈...


한 차례 전초전을 치른 후 7전째 세계 타이틀매치를 치르기로 확정이 돼 있는 상태였습니다. 황동룡은 훈련 중 자꾸 오른쪽 눈의 시야에 이상이 있음을 감지했고, 가끔씩 헛발질을 하는 등 이상증세를 보였습니다. 상황이 심해지자 곧바로 서울대학병원에 가 진단을 받아본 결과 망막에 치명적인 손상이 왔고, 회복불능 판정을 받고 맙니다. 알고 보니 헤르만 토레스에게 2라운드에 강한 레프트 훅을 유일하게 허용하였는데 그것이 치명타가 됐던 것입니다. 한 마디로 천려일실(千慮一失)이었습니다. 그것으로 황동룡의 복싱 인생은 유리창 깨지듯 산산조각 나고 말았습니다.

반면 유명우는 88프로모션 입성이 실패로 돌아가자 그 부담 때문인지 1984년 5월부터 1984년 11월까지 무려 6개월 이상 단 한 차례 경기도 치르지 못하며 공백기를 가졌지만, 1984년 12월 동아프로모션으로 이적해 에드윈 이노센시오를 3라운드 KO로 꺾고 주니어플라이급 동양챔피언에 오릅니다. 이어 이듬해 9월 손오공(62년생 임실)과의 도전자결정전을 벌여 인상적인 7라운드 KO승을 거두며 WBA 동급 세계타이틀 도전권을 확보했습니다. 이 경기를 필자는 직접 경기장에서 관람을 했는데 예전의 유명우와는 전혀 다른 한 단계 업그레이드된 모습을 목격했습니다. 특히 인상 깊었던 것은 5라운드가 진행되었을 때 두 모녀가 고개를 숙이고 흐느끼는 모습이었습니다. 참 서글픈 장면이었는데, 다름 아닌 전북 임실에서 올라온 손오공 선수의 어머니와 여동생인 듯했습니다. 지금도 그 모습이 눈에 선합니다. 그때 옆에서 경기를 관전하던 88프로모션 박조운(66년 영광)이라는 한국 라이트플라이급 챔피언이 한마디 했습니다. “나는 죽었다 깨어나도 유명우한테는 안 된다”고 말입니다. 이어 유명우는 1985년 12월 8일 접전 끝에 미국의 조이 올리버(퀴로즈를 접전 끝에 판정으로 꺾고 타이틀 탈환)를 15라운드 판정승을 거두고 세계 정상에 올랐습니다. 이후는 다들 아시다시피 전무후무한 17차 방어의 전설로 이어집니다.

유명우의 세계타이틀매치를 한 경기 한 경기 지켜보는 심영자 회장의 심정은 설명하지 않아도 짐작이 갈 겁니다. 처음 88프로모션에 찾아왔을 때 유명우의 이적료는 1,000만 원이었습니다. 당시 88체육관의 한 달 운영비가 3,000만 원임을 감안하면 얼마나 저렴했습니까?(참고로 문성길의 스카우트비용은 7,000만 원)

황동룡은 헤르만 토레스에게 승리한 후 1985년 4월 13일 그 소중한 세계랭킹을 원진체육관 손오공에게 ‘양도’했습니다. 그때 받은 마지막 경기 퇴직금이 400만 원이었습니다. 그날 돈을 건네준 심 회장과 그 돈을 받은 황동룡의 두 눈에는 이슬이 맺혀 있었습니다. 그리고 청명한 봄날 황동룡은 한쪽 눈을 실명한 채 떠나갔습니다.

지금도 체육관을 떠날 때 황동룡의 고개 숙인 모습이 생각납니다. 가끔씩 김영랑 시인의 <모란이 필 때까지>라는 시를 읽으면 황동룡의 압축된 권투 인생을 표현한 것 같아 가슴이 아려옵니다. 프로에 입문하여 정상을 향한 꿈과 희망, 그리고 이어지는 절망과 마지막의 체념이 아우러진 황 선수의 심정이 고스란히 담겨 있는 것 같기 때문이죠.

모란이 피기까지는
나는 아직 나의 봄을 기다리고 있을 테요.
모란이 뚝뚝 떨어져 버린 날
나는 비로소 봄을 여읜 시름에 잠길 테요.

오월 어느 날 그 하루 무덥던 날
떨어져 누운 꽃잎마저 시들어버리고는
천지에 모란은 자취도 사라지고
뻗쳐오르던 내 보람 서운하게 무너졌으니
모란이 지고 말면 그뿐 내 한해는 다가고 말아
삼백예순날 하냥 섭섭해 우읍네다 (후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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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BC총회 참석 차 곧 중국 쿤밍으로 떠나는 유명우, 이인경 회장, 장정구(왼쪽부터).


오는 10월 30일 중국 쿤밍에서 벌어지는 WBC 총회에서 KBF의 이인경 회장과 유명우 부회장, WBC의 상징적인 챔피언 장정구 등이 참석합니다. 한국을 대표하는 두 선수가 나란히 참관하기에 더욱더 자랑스럽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리고 실명만 아니었다면 유명우에 앞서 먼저 세계챔피언이 되었을지도 모르는 안타까운 천재복서 황동룡의 이름 석 자도 함께 떠올랐습니다. 은퇴 후 삶도 녹록지 않은 것으로 알고 있는데 부디 황동룡 ‘선수’의 삶에 신의 은총이 깃들기를 바랍니다. [문성길복싱클럽 관장]


P.S. 작년 KBF 초대회장을 맡은 이인경 회장은 최근 내년 새로운 청사진을 펼치며 복서들에게 꿈과 희망을 주고 있습니다. 한서종합개발 회장도 겸하고 있는 이 회장은 경기도 화성과 동탄지역에 대규모 산업단지 분양에서 총괄 본부장을 맡고 있는데 이 사업에서 창출된 수익금을 복싱 발전에 재투자하겠다고 천명한 바 있습니다. 내년 2월 예산군 덕산면에 20층짜리 호텔과 함께 인근에 1,000명의 관중을 수용할 수 있는 복싱전용 경기장을 착공할 계획이라고 합니다. 또 한국챔피언의 파이트머니를 1,000만 원으로 대폭 인상해 선수들이 운동에만 전념할 수 있도록 환경을 조성할 계획입니다. 그리고 이 회장은 며칠 전 필자와 장정구를 충남 서천 바닷가로 초청을 하여 무박 2일로 여가를 즐겼습니다. 이 소식을 전하자 서울 경기 지역에서 체육관을 8개를 운영하는 SM체육관의 총사령관 홍성민(74년생 경기도 화성 용인대) 관장과 제3관 명예관장인 조병권(74년생 명지대 서울 시경 형사), 그리고 예산에서 체육관을 운영하는 전 동양 웰터급 챔피언 박봉관(68년생 예산고 복싱부 감독)도 합류하여 오붓한 하루를 보냈습니다. 짧은 여정이었지만 초청을 해준 회장님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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왼쪽부터 박봉관 관장, 홍성민 관장, 장정구, 조병권 관장.




sports@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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