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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조영섭의 링사이드산책] (3) ‘1982년 황충재-황준석 격돌’ 그 대이변의 속사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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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준석(왼쪽)과 황충재의 최근 모습.

흔히들 스포츠는 각본 없는 드라마라 한다. 특히 복싱은 언더독으로 평가받던 선수가 극적인 반전을 통해 승리를 쟁취할 때 희열은 배가 된다. 야구는 10-0으로 이기고 있다가 ‘큰거 한방’을 허용해도 10-4지만, 복싱은 아무리 원사이드한 경기를 펼치다가도 ‘큰거 한방’ 허용하면 그대로 경기가 종료되는 도박 같은 매력이 있다.

스포츠를 더욱 흥미롭게 만드는 이변. 성경에도 치열한 경쟁 속에 이변을 암시하는 글귀가 있습니다. <내가 돌이켜 '해' 아래에서 보니 빠른 경주자라고 선착하는 것이 아니며 유력자라고 전쟁에 승리하는 것이 아니며...(중략) 이는 시기와 우연이 모든 자에게 임함이라.> 오늘은 한국 복싱 100년사에 아직도 세인들의 입에 회자되는 황충재-황준석 전의 비하인드 스토리를, 마치 ‘판도라 상자의 뚜껑을 열 듯(표현이 좀 과한가요^^)’ 공개할까 합니다.

■ 술자리 내기가 만들어낸 빅매치

1982년 4월 18일 황충재의 동양 웰터급 14차 방어전은 사실 챔피언의 처지에서는 치러야할 하등의 이유가 없었습니다. 오죽했으면 일본으로 장기출장을 떠나는 극동프로모션의 전호연 회장이 “동양 타이틀을 반납하는 일이 있더라도 절대로 경기를 치러서는 안 된다”고 측근들에게 신신당부했을까요?

그러면, 있지 말아야할 이 경기가 어떻게 열리게 됐을까요? 그 미스터리를 풀기 위해서는 당시 상황을 좀 알아야 합니다. 당시 황충재는 WBA 웰터급 1위, WBC 웰터급 2위로 챔피언 레너드(그 유명한 슈거 레이 레너드)와 일전을 목전에 두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도전자 결정전 형식으로 WBA 웰터급 2위이자 WBC 웰터급 1위인 인 호세 피피노 쿠에바스(멕시코)와 경기를 치러, 그 승자가 레너드와 타이틀전을 갖기로 확정이 돼 있었는데 쿠에바스가 차일피일 무려 7차례나 연기하면서 황충재는 허탈감과 함께 긴장이 풀어지는 상황이었습니다. 당시 황충재의 파이트 머니는 물경 7억 원으로 책정되어 있었다고 합니다.

이런 와중에 어느 날 사석에서 동아체육관의 김현치 관장과 극동프로모션의 김종수 사장이 우연히 조우했습니다. 그리고 대뜸 동아 김 관장이 극동 김 사장에게 “요즘 경기를 보니까 황충재가 너무 단조롭다. 비록 13차 방어를 했고 현재 7연속 KO승을 기록 중이지만 임자다운 임자를 못 만나서 그렇다. 우리 (황)준석이 같은 스타일에게 걸리면 황충재는 그대로 처박힐 것”이라고 악담을 했죠. 이것이 도화선에 불을 댕기고 말았습니다.

발끈한 김 사장이 "아니 김 관장, 지금 무슨 소리를 하는 거요. 이제 신인티를 막 벗은 새내기한테 천하의 황충재를 비교하다니 지금 말장난 하는 거요" 하고 따졌다. 이에 대뜸 김 관장이 "아니 그러면 우리 돈내기 한번 할까? 200만 원씩 걸고 이기는 측이 모두 갖기로 하자"라고 즉석제안을 했죠. 옥신각신 끝에 극동 김 사장은 욱하는 마음에 OK사인을 냄으로써 도화선을 빅뱅을 향해 빠른 속도로 타들어갔던 겁니다.

결국 1982년 4월 18일 ‘황충재-황준석 불꽃놀이’가 펼쳐지기로 확정됐습니다. 당시 로컬 프로모터는 염동균씨가 맡아서 모든 진행을 총괄했습니다. 냉정히 보면 김현치 관장의 치밀한 지략과 꼼수에 극동 김종수 사장이 말려든 꼴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마치 참치가 예리한 낚시줄에 걸리는 듯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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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충재는 멋을 아는 남자다. 개성 넘치는 외모의 황충재.


■ 무적함대 황충재와 황준석의 변신

당시 황충재(58년 4월 27일 전남 광양 출신)는 22전 전승 19KO승을 거둔 강타자였고(종신전적 31전 28승 25KO 3패) 15전 전승 6KO승(종신전적 49전 44승 29KO 5패)의 황준석은 한창 주가를 높이고 시작한 기대주였죠.

그런데 사실 황충재는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황준석의 경기를 1981년 어느 날 관전한 경험이 있었습니다. 데뷔 11전째에 맞붙었던 오광렬(중앙체육관)과의 경기였는데 하필이면 그 경기에서 황준석 은 심한 감기몸살과 고열로 최악의 상태에서 링에 올랐습니다. 경기도 6라운드 부상 판정승으로 가까스로 승리했으니 경기내용이 좋았을 리가 없죠.

이를 목도한 황충재는 “한 마디로 힘만 좋은 단순한 복서”라고 황준석을 폄하했습니다. 황충재는 태릉선수촌에 있을 때 오광렬과 여러 차례 스파링을 한 바 있는데 물론 결과는 일방적이었었습니다. 오광렬이 황충재에게 난타를 당했던 것이죠. 당시 잘나가던 한 체급 위의 백인철과 스파링을 해도 주도권을 잡았던 황충재였으니 말이 필요없었을 겁니다. 이런 오광렬에게 황준석이 고전했으니 그를 일축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겠죠.

중요한 것은 황준석이 그 경기에서 심한 성장통을 겪은 후 기량이 비약적으로 발전했다는 사실입니다. 원래 기량이 좋았던 선수인 데다가 최악의 몸상태에서 고전을 한 것이 보약이 된 것이죠. 이는 박종팔의 증언에서 잘 알 수 있습니다. 오광렬 경기 전후로 황준석과 스파링을 여러 차례 했는데 전(before)에는 마음껏 연타공격을 했지만, 이후(after)엔 만만치 않은 반격에 고전을 했다는 겁니다. “아따 (황)준석이 실력이 증말로 허벌라게 늘어버렸당께." 세계를 호령했던 박종팔이 이렇게 평가할 정도이니 황준석의 일취월장은 눈부신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런 황준석의 환골탈태를 황충재는 전혀 감지하지 못했습니다. 얼마나 황준석을 만만하게 보았는지 황충재는 당시 최동호 씨가 진행하는 에서 황준석을 면전에 놓고 레너드, 헌즈 운운하면서 다소 무시하는 듯한 발언을 쏟아냈습니다. ‘나는 레너드, 헌즈 하고 노는 급으로 황준석과는 격이 다르다’는 것이죠. 이때 황준석은 침묵과 함께 꾹 참으며 ‘링 위에서 주먹으로 말하겠다’고 다짐했다고 합니다. 여기에 긴장이 풀어진 상태에서 갑자기 경기가 잡히자 훈련량도 많지 않았습니다. 당시 황충재의 트레이너였던 임현호(1948년 인천) 씨는 주변의 어수선한 분위기 속에서 정작 훈련다운 훈련은 보름도 채 되지 않았다고 회고했습니다.

황준석(61년 4월 10일)은 1978년 3월 충남 청양에서 서울로 올라와 79년 11월 신인왕에 도전할 때까지 단 한 차례도 아마추어 경기를 치루지 못한 새내기였습니다. 왜 경기를 치르지 않은 이유에 대해 “당시 동아체육관 자체적으로 평가전을 치렀는데 번번이 예선에서 탈락했다”고 합니다. 아마도 하드웨어는 좋았는데 소프트웨어가 부실했던 모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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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친인 영화배우 이동준(왼쪽)과 포즈를 취한 황충재.

■ 김현치의 노림수

둘의 빅뱅 결과는 잘 알려져 있다시피 황준석의 8회 KO승입니다. 화려한 스타탄생이었습니다. 황충재가 그 동안 쌓아올린 명성을 고스란히 새 챔피언 황준석이 이양하는 꼴이 되고 말았습니다. 황준석의 고향을 상징하는 산이 칠갑산입니다. <칠갑산>이라는 노래를 부른 주병선이라는 가수도 무려 7차례나 대학가요제 예심에서 거푸 탈락한 아픔을 딛고 이 노래 한방으로 만루홈런을 쳤죠. 황준석도 그렇다고 할 수 있습니다. 싹수가 보이지 않는 무명 시절의 서러움을 인내와 끈기로 버티면서 거함 황충재를 침몰시킨 것이죠.

경기 내용은 당시 황준석을 가르친 김현치 관장의 속내를 파악하면 쉽게 이해가 됩니다. 김 관장은 왜 누가 봐도 열세를 보이던 황준석을 황충재와 맞붙게 하려고 했을까? 사실 이 경기 승부의 키는 김현치(1945년생) 관장이 쥐고 있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김 관장은 아마추어 선수시절 황준석과 같은 170cm 단신에 양훅을 주무기로 사용하는 인파이터였습니다. 그런데 황충재와 신장이 같으면서 스트레이트가 주무기인 176cm 장신의 이창길와 서너 번 맞붙어 죽창처럼 쑤셔대는 이창길의 칼날 스트레이트에 매번 총 맞은 노루처럼 퍽퍽 나가떨어졌던 전력이 있었습니다. 당시 이창길(1949년생)은 최충일, 고생근와 함께 우리나라 복싱선수 중 스트레이트를 가장 잘 때리는 트로이카로 불렸습니다. 1968년도 멕시코 올림픽에도 출전한 국가대표 출신이었습니다.

복싱을 해보신 분들은 알겠지만 이길 때보다 패할 때 얻는 것이 훨씬 더 많습니다. 김현치 관장은 자신의 전철을 제자 황준석이 밟지 않도록 모든 노하우와 비기를 전수했습니다. 그리고 독기가 오른 황준석는 스승의 가르침대로 훈련에 몰두하면서 마치 ‘피그말리온 효과’ 같은 일이 발생한 겁니다. 황준석은 경기를 하기도 전에 승자인 것처럼 여유가 있고 자신감이 충만했다고 합니다. 김현치 관장은 언더독인 황준석 선수에게 "절대로 KO로 승부 걸 생각하지마라. 끝까지 간다는 생각으로 해라"라고 하면서 평소 훈련할 때 오른손훅을 칠 듯 하면서 왼손훅을 때리는 등 성동격서(聲東擊西) 전략을 주문했습니다. 그리고 이를 완벽하게 구사한 황준석은 2라운드부터 주도권을 장악했습니다. 20세기 최강의 전투력을 지닌 미군을 이긴 베트콩에 견줄 수 있을까요? 베트공 사령관인 보웬잡 장군의 명언이 생각납니다. 첫째, 적이 좋아하는 시간에 싸우지 말라. 둘째, 적이 원하는 장소에서 싸우지 않는다. 셋째, 적이 생각하지 않는 방법으로 싸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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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4년 7월 미국에서 쿠에바스와 세계랭킹전을 벌이는 황준석(오른쪽).

■ 황충재의 멋

이 경기 후 황충재의 심정은 예수께서 죽음의 순간 말씀하신 ‘엘로이, 엘로이 레마 사박타니(나의 하느님, 나의 하느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하고 통곡했는지도 모릅니다. 경기후 황충재 선수는 우연히 선술집에서 당시 경기를 추진했던 극동의 김종수 사장과 조우했는데 순간적으로 황준석 선수에게 참패를 당했던 치욕이 떠올라 욱하는 마음에 자신도 모르는 사이 주먹이 불끈 쥐어졌다고 후에 회고했습니다. 황충재가 어떤 선수입니까? 영산포상고 3학년에 재학 중이던 황충재는 1977년 국가대표 선발전에서 74년 테헤란 아시안게임 웰터급 금메달리스트이자 1976년도 몬트리올 올림픽 국가대표였던 김주석을 꺾고 태극마크를 달았습니다. 이런 대선수가 무명 황준석한테 완패를 당한 것입니다. 참고로 황준석은 84년 7월 쿠에바스를 미국 원정경기에서 판정으로 제압했습니다. 이는 1967년 서강일이 당시 세계 1위였던 만도 라모스(미국)에게 승리한 이래 무려 17년 만에 세계적인 선수를 꺽은 기념비적인 승리였습니다.

최근 사석에서 황충재(선배)에게 물었습니다. 도전자 황준석을 어떻게 생각하냐고 말입니다. “음... 순발력과 민첩성이 매우 뛰어난 도전자였지.” 의외로 황준석을 높이 평가했습니다. 솔직히 제가 예상했던 답은 ‘야, 준석이 정도는 내가 정상 컨디션이었다면 잽 하나로도 충분히 요리할 수 있었어’였습니다. 허세가 심한 복싱계에서는 이런 말들이 참 많거든요. 그런데 많은 세월이 지난 후에도 상대선수를 높이 평가하는 황충재의 인품에 익은 보리처럼 고개가 숙여졌습니다.

P.S. 역사 이야기 하나. 황충재 선배의 얘기를 들으니 1904년 러일전쟁에서 러시아 발틱함대를 이끌고 대한해협에서 일본의 도고 헤이하치로 사령관에게 참패를 당한 로제스 트벤스키 제독이 생각납니다. 포로가 된 트벤스키 제독이 일본의 해군병원에 입원해 있었다고 합니다. 그 자리를 승장 도고가 찾아가서 진심으로 따뜻한 위로의 말을 전하자, 트벤스키 제독은 감격의 눈물을 흘리면서 “그대와 같은 이에게 패했다는 점 때문에 나의 패배가 결코 수치스럽지 않다”고 말했습니다. 도고 사령관 또한 그의 승리를 축하하는 기자들이 “제독님은 세계 4대해전 중의 하나인 트라팔가르 해전의 영웅인 넬슨 제독(영국)과 같으신 분”이라는 찬사를 내놓자 이렇게 답했다고 합니다. “넬슨 제독과 비교한다면 그것은 받아들이겠소. 하지만 조선의 이순신과 비교한다면 거절하겠소. 나는 그 분과 비교하기에는 내 능력이 너무 부족하오.” [문성길복싱클럽 관장]

sports@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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