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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홍사붕이 이끄는 '토종 테크니션'의 요람, 안양 벌말초등학교
최근 몇년간 프로농구에는 ‘스킬 트레이닝’ 바람이 불었다. 그간 외국선수에 비해 부족한 하드웨어를 특유의 조직력과 뛰어난 슈팅 능력으로 극복해온 한국농구지만, 이제는 ‘플러스 알파’가 필요해졌다. 국제무대에 나가 보면 우리보다 키가 큰데 수비도 잘하고, 슛도 더 잘 쏘는 선수들이 즐비했다.

이제 ‘테크닉’이 없는 선수는 농구판에서 경쟁력을 갖기 힘들다. 구단들이 너도나도 비시즌마다 거액을 들여 외국으로 ‘기술 연수’를 보내는 이유다. 얼마 전에는 오리온스 정재홍(29)이 사비를 들여 미국에서 스킬 트레이닝을 받고 온 사실이 화제가 되기도 했다. 단신 테크니션들이 새 바람을 몰고 올 이번 시즌부터는 더욱 ‘기술농구’가 빛을 발할 전망이다.

요즘 토종 선수들은 ‘하드웨어는 좋아졌지만 기술은 부족하다’는 평이 많다. 분명 프로인데, 왼손 드리블 못하는 선수도 적지 않다고 한다. 한 프로 지도자는 “프로에서 선수들에게 드리블 가르치고 있어야 하나”는 한숨섞인 푸념을 했다. 토종선수들의 개인기 부족 현상은 다소 어긋난 학원스포츠 환경에서 기인한다. 그놈의 ‘성적 지상주의’ 때문이다. 우리나라는 어려서부터 ‘이기는 농구’를 가르친다. 드리블도 잘 못 치는 초등학교 선수들에게 스크린 플레이부터 가르치는 일이 비일비재하다. 기본기 위주로 내실을 다져야 할 시간에 패턴 플레이 등 전술적인 면을 강조하니 개인 기술은 늘래야 늘 수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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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사붕 코치(오른쪽)와 안양 벌말초등학교 농구부원들의 단란한 한때.

2006년까지 프로농구 안양 KT&G(현 KGC인삼공사)에서 뛰었던 홍사붕(44)은 벌써 햇수로 9년째, 안양 벌말초등학교에서 될성부른 떡잎을 키워내고 있다. 은퇴 후 미국 뉴욕으로 1년간의 지도자 연수를 떠났던 홍 코치는 2007년 말, 만 36세의 나이에 벌말초등학교에 부임했다. 지금이야 30대 후반의 프로팀 감독도 있고 고등학교, 대학교에도 젊은 지도자들이 많지만 당시만 해도 홍 코치의 지도자 데뷔는 굉장히 빠른 편이었다. 더구나 정통 프로 출신의 초등학교 지도자는 홍 코치가 처음이었다.

창단 당시 4명에 불과했던 벌말초등학교 농구부는 홍 코치의 지도 아래 어느덧 전국 최고 수준의 강호가 됐다. 너털웃음과 함께 “이제 초등부 농구판에서는 내가 베테랑 지도자”라는 홍 코치는 이내 진지한 얼굴로 “어릴 때는 ‘이기는 농구’가 아니라 ‘즐기는 농구’를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선수의 미래를 생각했을 때 성적 중심의 학원스포츠 문화는 결코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첫째가 재밌어야 한다. 자꾸 공을 만지면서 가지고 놀게 해야 기술이 늘고, 기본기가 탄탄해진다. 시합에 나가 보면 초등학생들에게 백스크린을 가르치는 학교도 있더라. 그 조그만 아이들이 알아들을까 싶다. 물론 농구라는 종목의 특성상 패턴 플레이도 좋고, 기막힌 전술도 좋다. 하지만 이전에 기본기, 개인기가 우선되어야 한다는 생각이다. 패턴 농구는 나중에 배워도 되지만, 기본기는 어릴 때 몸에 익지 않으면 나중에 배우기 힘들다. 초등학생이나 중고교 선수들을 '드리블 오래 친다'고 혼내는 데 동의하지 않는다. 어릴 때일수록 이것저것 많이 시도해봐야 창의적인 플레이가 나온다. 나도 학교 다닐 때 그렇게 배웠고, 배운 대로 가르치니 아이들이 좋아지는 걸 직접 느꼈다.”

홍 코치는 선수시절에도 테크닉이 뛰어난 가드였다. 그 뿌리는 고 전규삼 선생의 ‘자율농구’로 대표되는 ‘가드 명문’ 송도고다. 홍 코치뿐만 아니라 강동희-신기성-김승현 등 한국농구를 주름잡았던 명가드들이 송도고에서 배출됐다. 지금 지도자 생활에도 그때 몸에 익은 자율농구가 영향을 미친 게 아니냐는 질문에 홍 코치는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인 것 같다”고 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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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사붕 코치의 현역 시절. 사진=OSEN

홍 코치는 이어 “지금 6학년인 아들이 1년 전부터 수원 신곡초에서 야구를 시작했다. 내심 농구를 하길 바랐는데, 야구가 좋다고 시켜달라 하더라. 5학년 때 시작했으면 결코 빠른 게 아닌데도 흥미를 갖고 하니 금세 늘더라. 하루종일 운동하고 집에 왔는데 집에 와서 또 야구를 한다. 야구하면 스트레스가 풀린단다. 운동을 시작하고부터는 아이가 인사성도 밝아지고 성격도 좋아졌다. 농구도 마찬가지다. 요즘 아이들은 힘들고 재미없으면 운동 자체를 안 하려 한다. 우리 때처럼 그냥 뛰면서 체력훈련시키고 할 게 아니다. 뛰는 것도 공 갖고 뛰는 게 훨씬 재밌는 법”이라며 달라진 세태에 맞게 교육법도 변화해야 한다고 힘주어 말했다.

놀라운 건 성적에 크게 연연하지 않는 지도자 밑에서 좋은 성적이 나는 역설적인 현상이다. 홍 코치가 이끄는 벌말초등학교는 초등부에서 누구나 인정하는 팀이다. 보통 초등학교 농구부는 3년 주기로 성적을 낸다. 한 해 잘하면 그 다음 3학년들을 3년간 잘 키워 또 성적을 내는 식이다. 하지만 벌말초등학교는 근래 5,6년간 늘 전국 4강권에 있었다. 이는 홍 코치도 자부심을 갖고 있는 부분이다.

현재 벌말초등학교에는 11명의 어린 새싹들이 뛰고 있다. 올해는 6학년이 2명뿐이라 숨을 고르고 있지만, 10일 강원도 양구에서 열린 윤덕주배 2015 연맹회장기 전국 남녀 초등학교 농구대회에서 대구해서초등학교를 49-31로 꺾고 16강에 진출하며 여전한 실력을 과시했다. 특히 벌말초 5학년에는 강동희 전 감독의 큰아들 성욱 군(11)도 뛰고 있다. 홍 코치는 “시작한지 1년밖에 안 됐는데, 피는 못 속이는지 금세 늘더라”고 전했다.

무엇보다 홍 코치는 자신이 길러낸 새싹들이 중, 고등학교에서 ‘농구 잘한다’는 소리를 들을 때 가장 기쁘다. 벌말초등학교의 연계학교인 호계중학교와 안양고등학교는 홍 코치 밑에서 탄탄한 기본기를 배운 ‘될성부른 떡잎’들로 가득하다. 특히 안양고 2학년 박민욱(185cm G), 1학년 김동준(177cm G)은 지난달 전국종별선수권에서 팀의 고등부 우승을 견인한 주역이다. 이쯤되면 '홍사붕표 토종 테크니션'들이 한국농구를 주름잡을 날도 머지 않았지 싶다. [헤럴드스포츠(안양)=나혜인 기자 @nahyein8]
sports@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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