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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좌측담장의 편파야구, V3는 백신이 아닙니다] 김문호가 활약하는 날, 스타는 탄생한다?
천재타자가 나라 잃은 표정 짓기까지
2004년 가을, 덕수정보산업고 2학년 김문호는 야구계의 주목을 한 몸에 받았다. 황금사자기와 화랑대기에서 연거푸 MVP를 수상했기 때문이다. 심심찮게 나오는 홈런, 발군의 타점 능력은 팀의 4번타자다웠다. 덕수정보산업고 최재호 감독이 "타고난 힘에 맞추는 재주가 더해졌다. 앞으로 최고의 거포로 성장할 것"이라며 칭찬을 아끼지 않았을 정도였다. '덕수고 천재타자'가 탄생하는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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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문호가 짓곤 하던 탄식의 표정. 팬들은 이를 두고 '나라 잃은 표정'이라고 칭했다.

2015년 개막을 앞둔 봄, 프로 10년차 김문호 앞에 '천재타자'라는 수식어는 사라졌다. 프로 통산 9시즌 224경기 타율 0.233(493타수 115안타) 3홈런 48타점 66득점 14도루가 고작이었다. 퓨처스 팀에 두기는 아깝지만, 1군에서 터지지 못하는 '1.5군 선수'가 김문호의 위치였다. 고교시절 선보였던 장타력은 온데간데없고 안타생산도 버거웠다. 외야 자원이 부족한 팀 사정에도 제 자리를 잡지 못하는 김문호. 팬들의 기대는 아쉬움으로 변했다. 타석에서 원하는 결과를 만들지 못했을 때 탄식하는 그를 향해 '항상 나라 잃은 표정만 짓는다'는 비아냥거림이 따라다녔다.

더 이상 나라를 잃지 않는 '구국의 김문호'
그런 김문호가 달라졌다. 매 시즌 '한 달 정도' 잘했던 김문호지만, 이번 시즌 그 상승세는 여느 해보다 길다. 김문호의 이번 시즌 멀티히트 경기는 16번. 이제 막 전반기가 끝났을 뿐임에도 데뷔 이후 가장 많다. 비록 타점은 19개에 불과하지만 팀 승리에 꼬박꼬박 기여했다. 재미난 건, 김문호가 '미치는 날'마다 또 다른 선수가 나타났다. 그리고 그들이 김문호의 활약을 팬들의 뇌리에서 지워버렸다. 벌써 한두 번이 아니다.

■4월 10일 사직 한화전(10-9 롯데 승)
김문호는 자신의 시즌 첫 경기에서 3타수 2안타 2타점으로 맹활약했다. 롯데가 6-2로 앞선 5회 2사 만루 상황에서 김대우 타석에 대타로 나선 김문호는 우전 안타로 주자 두 명을 불러들였다. 시즌 첫 타석에서 2타점 적시타. 첫 단추를 잘 꿴 셈이었다. 스코어 8-2로 롯데가 여유 있게 이기는 듯했다.

하지만 롯데 불펜은 8회 1점, 9회 5점을 내주며 경기를 원점으로 돌렸다. 이후 연장 11회, 장성우가 한화 송은범의 초구를 상대로 끝내기 홈런을 때려내며 모든 스포트라이트를 받았다. '포수 주현상, 시구 송은범, 끝내기 장성우'의 틈에 김문호가 낄 자리는 없었다.

■5월 23일 잠실 LG전(롯데 19-11 승)
7번타자 좌익수로 선발출장한 김문호는 첫 타석에서 삼진을 당한다. 하지만 이후 모든 타석에서 안타를 쳐내며 시즌 처음이자 프로 통산 두 번째 한 경기 4안타를 달성한다. 김문호의 '인생 경기'였다.

하지만 이 경기 주인공은 따로 있었다. 바로 3연타석 홈런을 치며 5타수 5안타 7타점을 기록한 오승택이었다. 오승택의 홈런 때마다 안타로 살아나간 김문호가 없었더라면 오승택의 7타점도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모든 관심은 오승택에게 향했고, 김문호는 홈플레이트에서 오승택을 가장 먼저 축하하는 것으로 만족해야 했다.

■6월 24일 사직 삼성전(롯데 13-9 승)
2번타자 우익수로 선발출장한 김문호. 첫 타석에서부터 기분좋게 안타를 신고한 그는 5타수 3안타 1타점 1득점으로 테이블세터 역할에 충실했다. 경기흐름은 그야말로 엎치락뒤치락했다. 4회까지 13-4로 앞서던 롯데는 5회에만 5실점하며 압도적 리드를 지키지 못했다. 그러나 이후 추가실점 없이 승리를 지킬 수 있었다.

이날도 스포트라이트는 김문호를 비껴갔다. '히트 포 더 사이클'에 3루타가 모자랐던 캡틴 최준석, 1,139일 만에 홈런을 때려낸 이우민 등이 주목받았다.

■7월 15일 청주 한화전(롯데 12-10 승)
팀 분위기가 최악을 향해 치닫던 올스타 브레이크 직전 시리즈. 김문호는 2번타자 좌익수로 선발출장했다. 그리고 4타수 2안타 1볼넷 2타점 2득점으로 알토란 같은 활약을 펼쳤다.

그리고 역시나, 관심의 대상은 김문호가 아니었다. 연장에서 결승 투런포를 쳐낸 김주현, 역전 쓰리런의 최준석, 3안타 3득점의 아두치, 4번 타순에서 3안타를 때려낸 손아섭까지. 뛰는 김문호 위에 나는 롯데 야수들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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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는 당당하게' 달라진 김문호. 나라를 잃는 듯한 표정도 없다.

꾸준함으로 만들어갈 스타성

지난해 사직구장에서 만난 김문호는 "야구선수로 최고의 위치에 오르기 위해서는 스타성이 중요하다는 걸 깨달았다"며 털어놨다. 그러면서 "스스로 스타성이 부족해 많은 팬들에게 눈도장 받지 못하는 것 같다"는 이야기를 덧붙였다. 좋은 성적에도 덜 주목받는, 소위 '묻히는' 탓에 이런 생각을 갖게 된 걸까?

여름이 되면서 김문호의 방망이는 더욱 뜨거워지고 있다. 6월부터 현재까지 32경기 타율 0.295(112타수 33안타). 롯데가 극심한 타격 슬럼프에 빠진 게 6월 초다. 김문호의 활약이 롯데 타선에 '호흡기'를 씌워주는 모양새다.

또한 김문호는 이번 시즌 65경기(54경기 선발)에 나서며 팀 내 외야수 2위(1위 짐 아두치·73경기)에 올라 있다. 부상으로 한 달 이상 1군 엔트리를 비운 손아섭을 넘어서 '외야 2번째 옵션' 역할을 맡고 있는 것이다.

김문호 본인에게도 이번 시즌 활약은 여러 모로 의미 있다. 55안타로 이미 자신의 한 시즌 최다안타 기록(2014시즌·41개)을 넘었다. 만일 김문호가 지금의 페이스를 시즌 끝까지 유지하면 모든 누적 기록, 비율 기록에서 자신의 최고치를 경신하게 된다. 시즌 초, 롯데 출신 코치 A가 김문호를 두고 "저런 천재형 선수가 한 번 터지면 걷잡을 수 없다. 올 시즌 (김문호를) 주목하는 것도 재밌을 듯하다"며 던진 예측이 정확히 맞아가고 있는 셈이다.

야구에서 스타는 한 경기에서 만들어질 수도 있다. 하지만 꾸준함이 스타를 만드는 경우가 더 많다. 전설 양준혁 또한 "이승엽 같은 스타플레이어 뒤에서 묵묵히 내 역할에 최선을 다했다. 그러다보니 어느새 기록들이 쌓여있었다"고 밝힌 바 있다. 물론 프로야구 선수에게 팬들의 사랑을 받는 건 중요하다. 하지만 매 경기 스포트라이트를 받을 수 없다. 양준혁의 말에는 지나치게 연연하지 않고 자신의 역할을 다한다면 언젠가 그 가치를 인정받을 수 있다는 의미가 담겨있다.

김문호는 줄곧 "트레이드되지 않는 한 평생 롯데에서 뛰고 싶다"며 롯데에 대한 애정을 드러내왔다. 올해 활약을 꾸준히 이어간다면 김문호의 소망은 현실이 될 것이다. 그리고 그 소망이 현실이 되면서 김문호는 롯데 팬들의 절대적 지지와 응원을 받는 선수로 자리매김 할 것이다.

*좌측담장: 결정적 순간. '바깥쪽' 공을 받아쳐 사직구장의 '좌측담장'을 '쭉쭉 넘어갈' 때의 짜릿함을 맛본 뒤, 야구와 롯데 자이언츠에 빠진 젊은 기자. 숫자로 표현할 수 있는 야구가 좋고, 그 숫자 뒤에 숨은 '사람의 이야기'가 묻어나는 글을 쓰기 위해 노력 중이다. 그리고 그 목표 아래 매일 저녁 6시반 야구와 함께 한다.
sports@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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