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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무비게이션] ‘아수라’, 진짜 지옥을 착각한 것인가?

  • 기사입력 2016-09-27 15: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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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럴드경제 문화팀=김재범 기자] ‘아수라’에 대한 극찬이 쏟아지고 있다. 악(惡)에 대해 이토록 적나라한 민낯을 까발린 영화가 지금까지 없었기에 불거지는 현상일 수도 있다. 아니 강렬함에 시선을 주고 강함에 고개를 끄덕이고 외부 자극에 반응을 보이는 대중들의 소비 심리를 파악한 영민함의 의도일 수도 있다. 어찌됐든 ‘아수라’를 바라보는 시각은 호의적인 지점을 넘어선 것은 사실이다.

언론시사회 전부터 ‘아수라’에 쏟아지는 일관된 지점은 ‘악의 강도’였다. 완급조절은 불가능할지라도 변주와 탈피를 시도한 지점은 분명 찾아볼 수 있을 것이라 여겼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아수라’ 속에 충격은 존재했지만 그 충격의 동력을 이끌어 가는 ‘숨은 패’가 존재하지 않았다. 스토리 구성에서 악의 존재를 바라보는 시작과 과정 그리고 결말을 말하면서 최소한의 기준점으로 접고 들어가야 할 그 한 장의 패가 존재하지 않았다. 그 지점이 강함의 온도를 유지시키는 연료임을 분명히 알고 있었을 텐데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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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아수라’는 처음부터 모든 패를 까발리고 덤벼드는 위험한 모험을 감행한다. 헤어 나올 수 없는 '악의 굴레를 그린다'는 사전 정보 아래에서 단 한 명이라도 상식선에서 존재할 것이란 생각은 애시 당초 접고 들어가게 된다. 그러면 추측되는 지점은 하나다. 모두가 나빠지고 모두가 끝까지 달리고 모두가 악으로 물들게 된다. 그 안에서 기대하는 것은 악의 다양성이다. 바로 변주가 존재하지 않는 ‘아수라’의 오판이다.

안남시장 박성배(황정민)는 힘의 권력에 취한 악의 전형성을 그려낸다. 그는 현실과 거짓을 넘나드는 완벽한 판의 놀음 속에서 자신의 악을 정당화시킨다. 정당하기에 옳은 것이 아니라 자신이기에 정당하고 그래서 옳다고 말한다. 그 모든 행동은 한 편의 연극을 바라보는 듯하다. 무대 위에 배우이자 연출자로서 그는 완벽한 판을 짜고 그 판 안에서 모든 인물을 조종한다. 하지만 이 지점에서 발생하는 박성배의 악 자체가 어떤 식으로 해석돼야 할지가 불분명해 진다. 과장과 반복의 행동 속에서 등장하는 그의 악은 결코 영리하지 못하다. 뒤가 보이는 악의 신호는 상대방에게 준비 단계를 예고한다. 결과적으로 박성배의 악행 놀음에 속아나는 다른 인물들의 행동 패턴 자체가 설득력을 떨어트린다. 속는 것인지 속아주는 것인지에 대한 의문 부호가 뒤 따르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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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지 박성배가 선보이는 악은 대중들을 기만할 용도인 ‘양의 탈’일 뿐 그는 자신의 악이 타깃으로 잡은 다른 주요 인물들에겐 처음부터도 악이고 중간도 악이며 끝까지도 악이다. 권력을 통한 악의 습성을 말할 때 가장 오판하기 쉬운 악의 전형성을 박성배의 악으로 그린 셈이다.

한도경(정우성)을 옥죄는 또 한 명의 인물 김차인(곽도원) 검사 모습은 그나마 조금 현실적이다. 그는 자신의 위치에서 휘두를 수 있는 권력을 악행과 정의의 경계선에 놓고 필요에 따라 좌우로 흔들어 댄다. 스스로가 지능적이라고 자부한다. 그 자부심은 반대급부로 참을 수 없는 비열함을 숨긴다. 김차인이 선보이는 악의 변주는 권력의 속성을 드러낸 가장 저열한 민낯이다. 하지만 그것조차 이미 여러 번 거듭된 동어반복이다. 관객들의 예상은 한 치도 빗나가지 안고 끝을 보게 된다.

사실 가장 문제가 되는 캐릭터는 한도경(정우성)이다. 그는 영화 시작과 함께 등장하는 내레이션을 통해 자신의 속내와 심리의 결을 토해낸다. 벗어나고 싶고 빠져 나오고 싶어 한다. 하지만 처음부터 끝까지 그가 선보이는 행동은 허우적대는 비효율적인 패턴들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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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도경은 내레이션과 극중 대사로 번갈아 토해낸다. 자신은 나쁜 놈이고 악인이며 지금 이곳은 지옥이라고. 그 지옥에서 빠져 나오기 힘들 것 같다고. 자신을 인정하고 위치를 파악한 입장에서 그는 분명히 그곳을 빠져나올 수 있는 방법을 알고 있다. 하지만 처음부터 끝까지 우물쭈물한다. 빠져 나오지 못할 이유는 영화 속에 분명히 존재하고 있다. 그럼에도 탄식에 가까운 내레이션은 영화 중간 중간 터져 나온다. 한도경의 상황에 이해하고 힘겹게 몰입하다가도 결국에는 그의 탄식이 관객들의 설득을 방해하는 역설적인 장치가 되고 만다.

이들 세 인물은 ‘아수라’의 중심축이다. 이들이 말하고 살리는 악 자체가 사실상 개념적인 부분과 표면적 혹은 표피적인 지점의 악을 말하고 있기에 강렬함은 명확하다. 하지만 악이 선(善)과 구분 되는 단 한 가지가 있다. 바로 교활함이다. ‘아수라’ 속에는 그것이 보이지 않는다. 누구라도 예상 가능한 공간과 흠결 그리고 뻔히 보이는 미로의 출구를 찾지 못하고 인물들은 허우적댄다. 마치 결과를 위해 스스로가 바보임을 자처하는 인물들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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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에도 이 영화가 강렬하고 그 안에 살아 숨쉬고 미쳐 날뛰는 인물들을 만들어 내는 것은 그들이 살고 있는 거대한 가상의 도시 ‘안남시’ 그 자체일 것이다. 느와르 장르 속에서 그리는 중요한 요소 중 하나가 바로 공간이 주는 지배력이다. ‘아수라’는 가상의 도시 안남시 자체를 아가리를 벌리고 그 안으로 자신도 모르게 걸어 들어올 먹잇감을 기다리는 거대한 아귀처럼 만들어 버렸다. 영화 시작과 함께 하늘에서 바라보는 을씨년한 분위기의 재개발 도시 안남의 모습은 그 자체로 ‘아수라’의 지옥도나 다름없어 보였다.

물론 그곳을 지배하는 박성배도 그의 손아귀에서 가쁜 숨을 내쉬며 펄떡이는 한도경도 그들을 내려다보고 있다고 자신한 김차인도 착각하고 있었다. 아니 ‘아수라’ 속 모두가 착각을 하고 있었다. 무엇이 자신들을 미치게 만들었는지를. 개봉은 28일. 청소년관람불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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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S 정만식이 연기한 ‘도창학’은 사실상 ‘아수라’ 속 모든 인물 가운데 가장 현실과 접점을 이루고 있는 느낌이었다. 만약 안남시가 멸망한다고 해도 단 한 명 그만큼은 어떤 식으로든 살아 남을 듯하다. 주지훈이 연기한 ‘문선모’가 사실상 ‘아수라’의 의미를 제대로 살린 단 한 명이 아닐까.


culture@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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