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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헐크색 피부 갖게 된 ‘이 여성’…이 놈의 ‘남편’ 때문에[후암동 미술관-앙리 마티스 편]
야수주의 선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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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르메이르의 '진주 귀걸이를 한 소녀'를 본 뒤 관련 책과 영화를 모두 찾아봤습니다. 잘 그린 건 알겠는데 이 그림이 왜 유명한지 궁금했습니다. 그림 한 장에 얽힌 이야기가 그렇게 많은지 몰랐습니다. 즐거웠습니다. 세상을 보는 눈이 조금은 달라졌다는 느낌도 받았습니다. 이 경험을 나누고자 글을 씁니다. 미술사에서 가장 논란이 된 그림, 그래서 가장 혁신적인 그림, 결국에는 가장 유명해진 그림들을 함께 살펴봅니다.
앙리 마티스, 모자를 쓴 여인(일부 확대), 1905, 샌프란시스코 현대미술관

[헤럴드경제=이원율 기자] "이게 나예요?"

화가는 실실 웃기만 했다. 구겨진 내 표정, 떨리는 내 목소리를 듣고도 그랬다. 그림을 받아든 나는 진심으로 이 화가의 턱을 날리려고 했다. 아무리 내 남편이라지만 이번 장난은 지나쳤다. "인물화를 그릴까 해. 임자가 모델이 돼주시게." 남편이 수줍게 말한 그날, 도도하게 응했지만 내심 뿌듯했다. 확실히 내가 요즘 옷을 잘 차려입긴 했다. "그때 당신이 쓴 모자랑 입은 옷 말이오. 그 모습으로 나와줄 수 있소?" 빙고! 역시 그랬다. 남편은 내 패션에 감명받았다. 그림에 담지 않고는 배길 수 없었던 것이다.

"좋아요. 기다려요."

설렜다. 우아한 옷, 부티 나는 장갑, 기품 있는 부채에 크고 화려한 모자가 포인트! 콧노래를 불렀다. "이 정도면 돼요?" "최고야." 보는 눈은 있어선…. "나는 당신이 단정해서 참 좋소." 남편은 작업 도중 나를 한껏 띄워줬다. "그렇지. 이 자세는 프로 모델도 버티기가 쉽지 않소. 역시 당신은 타고났군." 이쯤 되니 남편이 뭘 잘못 먹었거나, 내가 곧 알아차릴 수밖에 없는 큰 잘못을 했나 싶었다. "몸은 약간 옆으로, 얼굴은 나를 보고. 부채를 활짝 펴시오. 눈은 무심하게. 아주 좋아!" 원하는 표정, 요구하는 자세에 응해줄 때마다 남편은 눈을 찡긋했다. 기분이 썩 괜찮았다. 얼마나 잘 그리려고 저렇게 지극정성일까, 결과물에 대한 기대감이 쑥쑥 커졌다.

하지만 그 기분은 오래 가지 않았다.

남편이 그린 그림을 본 뒤 나는 표정 관리를 할 수 없었다. 이 인간이 내 이마와 코에 녹색, 목에 빨간색 물감을 흠뻑 찍어놨다. 차림새는 괴상하다 못해 참담했다. 수백년 전 이름 모를 부족이 행사를 앞두고 전통 분장을 한 듯했다. 고작 이런 걸 보려고 그 고생을 한 게 아니었다.

"장난해요?"

내가 물었다. "이게 나라고요? 내가 이렇게 엉망인가요?" 이 인간은 뭐가 그렇게 즐거운지 웃음을 감추지 못했다. "장난치지 말고 진짜 나를 보여줘요. 어서!" 실실대던 남편은 이내 큰소리로 웃음을 터뜨렸다. "진짜 당신? 진짜 당신은 바로 내 앞에 있잖소. 그림은 당신이 될 수 없는 거요. 그림은 그림일 뿐이야." 그가 내 어깨에 손을 얹고 말했다. 끝까지 장난질이었다. 나는 그의 손을 뿌리쳤다. 단단히 화가 났다. 일주일 넘게 말 한마디 하지 않았다.

앙리 마티스는 그날 이후 아내 아멜리의 화를 풀어주기 위해 고생했습니다. 문제작의 이름은 '모자를 쓴 여인'입니다. 아내의 반응은 약과였습니다. 이 그림을 본 사람은 하나 같이 입에 담기도 힘든 험한 말을 쏟아냈습니다. 그나마 점잖은 말이 다음과 같았습니다. "이렇게 생긴 여자가 어디 있담? 야수가 따로 없군!"

사람 피부에 초록색이 왜 이렇게 많아?
앙리 마티스, 모자를 쓴 여인, 1905, 샌프란시스코 현대미술관

1905년 프랑스에서 마티스가 아내 아멜리를 그린 그림입니다.

눈빛에서 마티스에 대한 기대감과 무심함이 함께 느껴집니다. 진한 갈색의 머리카락을 단정히 말아 올렸습니다. 진한 눈썹과 깊은 눈동자, 빨간 입술을 보니 화장도 꽤 신경 썼습니다. 크고 화려한 모자를 쓰고 우아한 드레스를 입었습니다. 한 손에 든 부채를 펼친 채 의자에 앉은 상태입니다.

앙리 마티스, 모자를 쓴 여인(일부 확대·편집), 1905, 샌프란시스코 현대미술관
앙리 마티스, 모자를 쓴 여인(일부 확대), 1905, 샌프란시스코 현대미술관

그런데요. 진짜로 이런 사람이 있을까요?

붓질은 거칠고, 색상은 부자연스럽습니다. 얼굴초록색, 분홍색, 노란색, 민트색입니다. 주황색 노란색이고요. 물감으로 대강 찍어 발라 놓은 것 같습니다. 모자도 과일 바구니가 얹어진 양 색감이 다채롭습니다. 그리다 만 듯한 드레스와 장갑, 부채 모두 네다섯 개 물감으로 엉성하게 칠한 느낌입니다. 사람도, 사물도 세부적인 묘사는 절제된 상태입니다.

앙리 마티스, 모자를 쓴 여인(일부 확대), 1905, 샌프란시스코 현대미술관

배경도 비슷합니다.

'스케치북 위로 색종이를 거칠게 뜯어 붙인 듯합니다. 서로 다른 빛을 품은 구름 내지 솜사탕이 두둥실 떠다니는 것 같습니다. 풍부한 색감만 보면 인물화가 아니라 자연이 가득 담긴 풍경화 느낌도 납니다.

색채 ‘해방’ 넘어, 색채 ‘폭발’ 선언하다
"눈으로 본 것과 전혀 다르게 칠해도 상관없다."
앙리 마티스

마티스는 야수주의 선구자입니다.

야수주의의 다른 이름은 포비즘(fauvisme)인데요. 프랑스어로 'fauve'는 '야수의, 맹수의'라는 뜻을 갖습니다. 우리가 생각하는 그 야수(野獸)가 맞는 겁니다. 야수주의는 빨강·노랑·초록·파랑 등 원색을 무기로 전통적 색채 체계를 부수는 기법입니다.

마티스는 현실의 색채를 화폭에 곧이곧대로 옮겨 담는 일에 "왜?"라고 질문을 던진 화가입니다.

마티스는 더는 그 진리를 따를 필요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이보다는 화가의 생각, 감정, 경험을 녹여내는 게 중요하다고 판단합니다. 가령 구름의 흰색을 더는 흰색으로 표현하지 않습니다. 바다의 파란색을 더 이상 파란색으로 묘사하지 않습니다. 들판의 흙색도 이제는 갈색으로 색칠하지 않습니다.

내 눈에 어떻게 보이든 상관하지 않는 겁니다.

그냥 내 기분에 따라 구름은 빨간색, 바다는 노란색, 흙은 파란색으로 무작정 칠합니다. 아예 '필'이 꽂히면 구름을 빨간색과 초록색으로 덕지덕지 칠해버립니다. 바다도 노란색과 초록색으로 휘리릭 그려버립니다.

"하늘은 하늘색, 바다는 바다색, 나무는 나무색! 눈에 보이는 대로 안 그리고 왜 색깔을 휘젓는데?"란 말이 나올 수 있습니다.

마티스는 "그렇게만 그려야 한다는 법이 있어? 그림은 그림일 뿐이야!"라고 대답했겠지요. 야수는 하고 싶은 대로 하는 존재입니다. 본능에 충실합니다. 그간의 법과 관례는 아무 상관 없습니다. 마티스는 미술계의 헌법 같은 '그림 속 색채는 현실의 색채를 따라야 한다'란 말을 화로에 집어 던진 화가였습니다.

마티스가 자신이 그린 인물화를 보고 "미쳤군. 이게 어떻게 사람이야?"라고 불만을 표한 한 여성에게 건넨 말이 야수주의의 정신을 요약합니다.

마침 옆을 지나다가 이 말을 들은 마티스가 그 여성을 톡 두드리고 웃으며 이렇게 속삭입니다. "부인. 이건 사람이 아니고 그림이올시다." 실제로 보이는 것과는 상관없이 색깔을 어떻게 칠하는지는 '내 마음'이라는 겁니다.

"내가 토마토를 파랗게 본 유일한 사람이라는 사실에 유감스럽다."
앙리 마티스
폴 세잔, Still Life with Teapot

그런 점에서 마티스는 표현주의의 선구자인 빈센트 반 고흐폴 고갱, 근대 회화의 선구자인 폴 세잔의 영향을 듬뿍 받았습니다.

마티스가 궁극적으로 지향한 건 색채의 '폭발'입니다. 마티스에 앞서 인상주의자들이 빛을 내걸고 색채 '해방'에 나섰습니다. 사물을 내리쬐는 빛의 강도 등에 따라 사물 색도 묘하게 달라질 수 있다는 게 이들의 발견이었지요. 고흐와 고갱, 세잔은 여기서 더 나아가 빛이라는 핑계를 대지 않고도 사물 색을 바꿔 그려도 된다는 점을 몸소 보여줬습니다.

세 거장에게 힌트를 얻은 마티스는 이들의 가르침을 따라 한 걸음 더 걷습니다.

가령 사과를 보고 "빛이니 각도니 다 필요 없고 사과를 그냥 파란색으로 칠해도 좋겠는데? 아예 보색(補色)을 모아서 같이 칠해버려도 재밌겠어!"라는 생각까지 해버린 겁니다. 이는 위대한 발상입니다. 해방된 색채의 바짓가랑이를 잡고 있던 마지막 요소, '기준점'까지 털어냈기 때문입니다.

이 말을 당시 화단(畵壇)에 빗대어 풀어보겠습니다.

인상주의와 고흐, 세잔 공부를 나름 열심히 했다는 상당수의 화가마저도 "맞아. 사과가 꼭 빨간색일 필요는 없지. 빛의 양에 따라 갈색일 수도, 주황색일 수도 있어"라며 딱 '거기까지만' 생각하던 시기였습니다. 선배들의 힌트를 보고도 "아무리 그래도 사과를 파란색으로 칠하는 건 오버지?"라는 태도였던 겁니다. 색채 혁명을 이어받는 듯하면서, 자신들도 모르게 또 다시 사과와 비슷한 색채를 읊고 있던 셈입니다.

앙리 마티스, 음악

관성이었습니다.

색채 변형의 기준점을 '보이는 색'에 둔 겁니다. 말 그대로 "오렌지색이 변해봐야 기준인 노란색에서 더 밝아지거나, 어두워지거나 둘 중 하나야!"라며 고정관념을 떨치지 못했던 겁니다.

겨우 해방됐던 색채는 이 관성(기준점) 때문에 또다시 세상의 눈치를 보고 있었습니다.

각성한 마티스 덕에 그제야 색채는 민들레 꽃씨처럼 흩날리고 아무 형상에나 앉을 수 있었습니다. 그 자리에서 마음껏 폭발할 수 있었습니다. 마티스가 "비슷한 애들끼리 붙어있지 말고 흩어져 봐. 어이, 파란색과 초록색. 또 바다랑 섬 풍경화로 가려고 하지? 빨간색. 또 꽃 정물화에 자리 깔려고 하는 거지? 너희들 모두 인물화로 가봐. 생소해도 뭐 어때? 너희들은 인물 그 자체가 아니잖아. 그냥 물감일 뿐이야!"라고 외친 격입니다.

“도나텔로가 야수들에게 둘러싸인 꼴이군!”

학계에선 현대 미술의 첫 번째 사조, 현대 미술사에서 가장 먼저 몰아친 큰 파도로 야수주의를 꼽습니다. 화가가 '재현의 틀'을 완전히 벗어던진 채 마음껏 개성을 발휘하게 됐기 때문입니다.

지금에서야 그런 대접을 받지만, 당시 마티스의 시도는 당연히 논란의 중심에 섭니다.

앙드레 드랭, 하이드파크 [트루아현대미술관]

원래 야수주의라는 말 자체에 조롱이 스며있었지요. 마티스는 동료 드랭, 마르케 등과 함께 1905년 가을 프랑스 파리에서 열린 미술 전시회 '살롱 도톤'에 작품을 냅니다. 미술평론가 루이 보셀이 이 전시회에 옵니다. 매년 가을에 열리는 살롱 도톤은 매해 봄에 개최되는 '앵데팡당'과 함께 신진 화가들의 등용문 역할을 했기 때문입니다.

보셀은 나름 이름있는 비평가였는데요.

보셀은 마티스와 그의 친구들 작품이 걸린 7번 전시실에 들어옵니다. 그 전에 보셀은 심호흡을 합니다. '위험한 미치광이들의 전시실'이라는 소문을 들었던 탓입니다.

발을 딛자마자 눈을 사로잡은 게 마티스의 그림 '모자를 쓴 여인'입니다.

보셀의 눈에는 제멋대로 색을 칠한 그림일 뿐이었습니다. 문제는 이런 그림이 한두 점이 아니었다는 겁니다. 미술 경향이 계속 바뀌고 있다지만 이건 너무했다 싶었습니다. 보셀은 눈을 둘 곳을 찾습니다. 전시실 한가운데 르네상스 양식의 우아한 흉상이 있는 걸 봅니다.

"참나. 도나텔로(르네상스 시대 조각가)가 야수들에게 둘러싸인 꼴이군!"

보셀은 한탄합니다. 야수주의라는 말 자체가 여기서 태어난 겁니다. 또 다른 평론가 카미유 모클레르는 마티스의 '모자를 쓴 여인'을 보고 "대중의 얼굴에 던진 물감통"이라고 혹평키도 했습니다.

단 한 명. 한 명만은 '모자를 쓴 여인'을 본 직후 야수주의의 파괴력에 온몸을 떨었다는 설이 있습니다.

파블로 피카소입니다. 피카소가 아직 폭발적 인기를 얻기 전이었습니다. 피카소는 애초 '살롱 도톤'에 자기 작품을 낼 생각이었습니다. 얼마 전 곡예사 가족의 공연을 봤을 때 느낀 충격을 그림에 그대로 옮겨 담은 상태였습니다. 이 그림이야말로 살롱 도톤의 최고 화제작이 될 것이라고 자신했습니다.

피카소는 포장한 그림을 들고 살롱 도톤 전시장에 갑니다.

그림을 출품하기에 앞서 미리 들어온 작품들을 쓱 훑어봅니다. 의기양양한 피카소의 얼굴을 사색으로 만든 그림이 '모자를 쓴 여인'이었습니다. 피카소는 굳어버립니다. 피카소는 작품의 포장도 풀지 않은 채 그대로 들고 밖으로 나가버립니다. "이봐, 작품 안 내? 어디 가!"라는 친구 말에 "나는 아직 부족해. 나는 많이 부족한 인간이었어…."라며 참여 뜻을 접었다고 합니다.

레오 스타인. [Wikipedia]

말도 많고 탈도 많은 그림이었지만, 선구안을 갖고 이 작품을 산 사람도 있습니다.

미술 평론가 레오 스타인입니다. 피카소와 헤밍웨이를 발굴해낸 그 시대 '예술가의 대모' 거트루드 스타인의 오빠였습니다. 레오도 처음에는 이 그림을 보고 "여태 내가 본 그림 중 가장 형편없는 물감 얼룩이야!"라며 신랄하게 공격했습니다. 그런데, 실컷 욕을 퍼부은 그날 밤 자려고 누워보니 이상하게 그 그림이 계속 떠오르는 겁니다.

레오는 결국 또 7번 전시실로 갑니다.

그림을 봅니다. 계속 봅니다. 당시 젊은 화가들은 "레오가 그 이상한 그림을 엄청 진지하게 봐요!"라며 비웃었습니다. 레오는 홀린 듯 그 그림을 삽니다. 뭐라고 설명할 수 없지만, 이 작품이 미술계의 새로운 바람이 될 것으로 직감한 겁니다. 레오의 안목은 틀리지 않았습니다.

‘색채의 마술사’란 칭호
앙리 마티스, 붉은 방

마티스가 '색채의 마술사'로 능력을 가감 없이 발휘한 작품이 '붉은 방'입니다.

빨간색이 폭발합니다. 이 방은 실제로는 빨간색 방이 아니었습니다. 마티스가 그저 빨간색으로 채우고 싶어서 칠했을 뿐입니다. 여성의 상의와 하의는 각각 검은색과 흰색, 창밖은 진한 녹색으로 장식했습니다. 접시에 놓인 과일, 주스처럼 보이는 액체, 꽃송이 모두 원색으로 채웠습니다. 방 안은 부드러운 꽃과 줄기 모양으로 가득합니다. 모든 대상이 심플합니다. 음영도, 명암도 없습니다. 원근법도 없습니다. 강렬한 원색을 썼으나 그림 자체는 온화합니다. 동화책 속 삽화 같습니다.

앙리 마티스, 금붕어와 조각상

마티스의 그림 '금붕어와 조각상'입니다.

이번에는 파란색을 방 전체에 덕지덕지 칠해놨습니다. 빨간색으로 그린 저 곤봉 같은 게 금붕어입니다. 조각상, 어항, 꽃병과 받침대 모두 단색으로 꾸몄습니다. 물감을 몇 종류 쓰지 않았으니 팔레트도 휑했을 듯합니다. 하지만 그림은 이와 상관없이 색감으로 가득한 느낌입니다.

입원 중 우연히 맛들인 색채, 일생 과업으로
앙리 마티스 [Wikipedia]

야수주의 선구자인 마티스는 삶도 야수처럼 격정적이었을까요?

마티스는 의외로 야수 같은 삶을 살지 않았습니다. 마티스는 신사의 삶을 살았습니다. 점잖고 단정했습니다. 작업할 때도 정장을 입을 정도였습니다. 피카소처럼 여자관계가 복잡하지도 않았습니다. 마티스는 1869년 프랑스 북부 르 카토 캉브레지에서 태어났습니다. 동네에는 염색공장이 다닥다닥 붙어 있었습니다. 알록달록한 색에 빠진 큰 천들이 널린 골목길이 놀이터였습니다. 먼 훗날 마티스에 대한 복선 같습니다.

그런 마티스는 어린 시절 추억을 잊고 법학도가 될 뻔했습니다.

마티스가 색채를 다시 접하게 된 건 우연에 가까웠습니다. 법을 공부하던 마티스는 21살 때 맹장염에 걸려 병원 생활을 합니다. 그의 어머니가 지루해할 아들을 위해 그림 도구를 건네줍니다. 마티스는 재미 삼아 그림을 그립니다. 이게 생각보다 재미있습니다. 평생 못 느낀 즐거움에 젖습니다. 이 이야기 말고도 병원에 하릴없이 누워있던 마티스가 책 '회화론'을 읽고 자극을 받았다는 설도 있습니다. 훗날 거장이 된 마티스는 그 시절을 "낙원과 같은 것을 발견했다"고 말했다고 합니다.

귀스타브 모로, 오르페우스

그림에 푹 빠진 마티스는 내 운명은 화가라고 선언합니다.

가족의 반대를 뒤로 하고 미술 세계에 몸을 던집니다. 곧장 파리의 사립미술학교에 들어가 그림 공부를 합니다. 국립미술학교에는 합격하지 못했지만, 마티스의 재능을 본 귀스타브 모로가 그를 성심껏 가르칩니다. 훗날 낭만적 상징주의 선구자로 칭송받는 모로는 마티스에게 자유롭고 개성 있는 그림을 그리라고 조언합니다. 전통에 대한 강박관념을 버리라고 강조합니다. 모로가 없었다면 마티스의 회화관은 크게 달라졌을지도 모릅니다.

마티스는 회화 기술을 차곡차곡 쌓아 올립니다.

1896년 프랑스 국민미술협회가 연 전시회에 작품 4점을 출품하고, 이 가운데 1점을 나라가 사들일 정도의 실력을 갖춥니다. 그런 마티스가 1900년쯤부터 세잔의 그림을 본격적으로 연구합니다. 색채의 대담한 사용을 실험합니다. 사실 그때는 모두가 세잔을 따라 하던 시절이었습니다. 이들과의 차별화를 꿈꾼 마티스는 화려한 색감을 품은 아프리카 전통 미술에서 돌파구를 찾습니다. 아프리카의 강렬하고 이국적인 작품은 또 다른 신세계였습니다. 마티스는 세잔 풍 회화와 아프리카 미술을 모두 체화(體化)합니다. 그 결과 1905년, 문제작 '모자를 쓴 여인'을 내놓게 된 겁니다.

‘야수’의 오해, 따뜻한 치유의 화가

마티스는 그날부터 영원히 야수주의 선구자로 칭해집니다.

그런데 정작 본인은 야수주의라는 말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습니다. 이 말의 탄생 배경도 그렇지만, 마티스가 진짜 '짐승 같은' 그림을 그린 기간은 길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사나움이 느껴지던 마티스의 그림 분위기는 5년여 만에 따뜻해집니다.

색감의 폭발 자체는 같았으나 그림은 보다 온화해집니다. 때마침 1차 세계대전 전운이 감돌던 시기였습니다. 온 세상에 긴장감이 가득했던 시대입니다. 마티스는 그쯤 "나는 치유를 선물하는 안락의자 같은 그림을 그리고 싶다"고 말했습니다.

앙리 마티스, 생의 기쁨, 1906

가령 마티스의 '생의 기쁨'을 볼까요.

색채는 통념과 배치되지만, 언뜻 봐도 전기장판에 들어간 것처럼 따뜻함이 퍼집니다. 실제로는 볼 수 없는 붉고 노란 나무와 들판, 자주색 바다가 환상적인 분위기를 연출합니다. 서로 다른 크기와 피부색의 사람들은 마음껏 늘어지고 뛰어놀고 있습니다. 유토피아적 느낌입니다.

그림은 누드화적 면을 갖췄지만, 야하다는 생각은 별로 들지 않습니다.

포근하고 따뜻합니다. 안방에 이 그림을 걸면 온도가 1도는 높아질 것 같습니다. 어쩌면요. 야수 같은 그림으로 보는 이의 감정을 최고조로 끌어올려 봤기에 이 정도 수준을 갖춘 치유의 그림도 그릴 수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듭니다.

앙리 마티스, 이카루스, 1946, 과슈를 칠한 색종이 콜라주

72세의 마티스는 십이지장암에 걸려 더는 붓을 들 수 없게 됩니다.

마티스에게 포기란 없었습니다. 붓이 잡히지 않으니 가위색종이를 듭니다. 마티스는 가위와 색종이를 조각칼석고상처럼 봅니다. 얼추 밑그림을 그린 후 가위로 색종이를 오려 거기에 붙입니다. 석고상은 조각칼을 통해 새 생명을 얻습니다. 마티스는 흔한 색종이도 가위질에 따라 새로운 예술이 될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마티스의 이 기법은 새로운 수요를 만들었습니다. 벽지, 책과 음반 표지, 음악회와 전시회 포스터가 색종이 기법에 영향을 받게 됩니다. 마티스는 마지막까지 혁신의 불꽃을 쥐었던 겁니다.

1954년 11월, 어떻게든 작품 활동을 이어가던 마티스는 84세 나이에 프랑스에서 심장마비로 눈을 감습니다. 록펠러가(家)의 후원으로 프랑스에 마티스 박물관이 세워지기 2년 전이었습니다.

마티스를 필생의 라이벌로 여긴 피카소는 이 소식을 듣고 다음과 같이 말했지요.

"나를 지독히도 괴롭히던 마티스가 사라졌다.
(…)내 그림의 뼈대를 형성하는 데 가장 큰 영향을 준 사람이었다.
그는, 내 영원한 멘토이자 라이벌이었다."
파블로 피카소

〈후암동 미술관 읽는 순서(연재 중)〉

①천사가 이렇게까지 운다고? 무섭게 왜 그래[후암동 미술관-조토 편] - 르네상스 선구자(2022. 7. 2.)

②세계서 가장 유명한 이 ‘레이저 눈빛’, 그것은 사랑?[후암동 미술관-얀 반 에이크 편] - 유화 선구자 (2022.5.21.)

③‘레드벨벳’도 춤추게 한 이 화가의 정체…"악마의 아들? 나 원 참" [후암동 미술관-보스 편] - 초현실주의 선구자 (2022.5.28.)

④아리따운 금발 여인, 외간남자 목을 베고 있는거야?[후암동 미술관-카라바조 편] - 바로크 선구자 (2022.6.11.)

⑤표류 D+13, 왜 몰랐지? 뗏목 위 널린 게 먹을건데[후암동 미술관-테오도르 제리코 편] - 낭만주의 선구자 (2022.5.14.)

⑥“천사요? 데려오면 그려드리죠” 이놈의 똥고집[후암동 미술관-귀스타브 쿠르베 편] - 사실주의 선구자 (2022.5.7.)

⑦벌거벗은 이 여자, 뭐 때문에 빤히 쳐다보나[후암동 미술관-에두아르 마네 편] - 인상주의 선구자(2022. 4. 23.)

⑧“못 그렸는데 폼만 잡아” 욕먹던 이 그림, 3300억이요? [후암동 미술관-클로드 모네 편] - 인상주의 선구자⑵ (2022.4.30.)

⑨‘점투성이’ 수상한 커플 정체는? [후암동 미술관-조르주 쇠라 편] - 신인상주의 선구자 (2022. 6. 25.)

⑩반 고흐 최애작, 별밤·해바라기 아닌 ‘이 사람들’ [후암동 미술관-빈센트 반 고흐 편] - 표현주의 선구자 (2022.6.4.)

⑪이 ‘사과’ 때문에 세상이 뒤집혔다, 도대체 왜?[후암동 미술관-폴 세잔 편] - 근대 회화 선구자(2022. 7.9.)

⑫‘이 여성’ 헐크색 피부 갖게 된 사연, 이 놈의 ‘남편’ 때문에[후암동 미술관-앙리 마티스 편] - 야수주의 선구자 (2022. 7. 15.)

⑬이건희 컬렉션, 이 ‘다섯 작품’ 놓치지 마시라[후암동 미술관-‘어느 수집가의 초대’ 출장 편] - 전시 특집

yul@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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