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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철승 전 신민당 대표는… 학생운동 1세대, 현대 정치사의 거목
[헤럴드경제] 27일 향년 94세의 일기로 세상을 떠난 소석(素石) 고(故) 이철승 전 신민당 대표(헌정회 원로위원회 의장)는 학생운동 1세대이자 야권의 정치 원로로 정계 은퇴 후에도 목소리를 내며 한국 현대 정치사를 써온 인물로 꼽힌다.

전주고와 고려대 정치학과를 졸업한 이철승 전 대표는 학생운동 1세대로 1946년 반탁전국학생총연맹 중앙위원장과 전국학생총연맹 대표의장으로서 신탁통치반대운동을 주도했다.

1947년 한반도 분할통치 논란이 일었던 미소공동위원회에는 학생대표로서 예비회담에 참여하기도 했다.

정치권에 입문한 것은 1954년 제3대 국회의원으로 당선되면서다. 전주에서 무소속으로 당선됐으며 이후 4, 5, 8, 9, 10, 12대 국회의원을 지내며 7선 의원이 됐다.

1955년 현재 야권이 뿌리로 내세우는 민주당 창당을 주도했고, 국회 국방분과위원장(1960년)ㆍ국회부의장(1973년)ㆍ신민당 대표최고위원(1976년) 등을 지내는 등 제3, 제4 공화국시절 야당의 핵심인사였다.

이 전 대표는 1961년 5ㆍ16 쿠데타 직후 군부에 의해 정치규제를 당해 해외망명길에 올랐고, 1980년에도 신군부의 정치쇄신법에 의해 정치규제를 당하기도 했다.

고인은 1970년 신민당 대선후보 경선에서 김영삼(YS), 김대중(DJ) 전 대통령과 함께 ‘40대 기수론’의 한 축을 이뤄 경쟁한 것으로 유명하다.

당시 이 전 대표는 중도에 경선을 포기하고 YS와 단일화를 이뤘으나, 1차 투표에서 YS가 과반 득표에 실패하자 2차 투표에서는 DJ 지지로 돌아서 DJ가 2차 투표에서 ‘대역전 드라마’를 쓰고 대선 후보로 당선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당시 고인과 DJ간에는 밀약설이 제기되기도 했다.

그는 정부ㆍ여당과 야합하는 야당 정치인을 의미하는 ‘사쿠라논쟁’에 휩싸이기도 했다.

제1야당인 신민당 대표 시절 “안보에는 여야가 없다”며 초당적 외교를 주장했다. 당시 미국의 카터 정부가 ‘주한미군 철수’ 카드로 박정희 대통령을 압박했을 때 야당 당수(黨首)로서 일본과 미국을 찾아 주한미군 철수 방침을 접어달라고 호소했기 때문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전 대표는 “나라가 있어야 여당도 있고 야당도 있는 것 아니냐”며 “주한미군 철수는 북한의 적화통일 야욕에 말려드는 꼴”이라고 강조한 것으로 알려졌다.

정계에서 은퇴한 뒤에도 정당 및 단체에 몸담으며 활발한 활동을 펼쳤다.

그는 자유민주총연맹 총재(1987년)를 비롯해 건국애국단체총연합회 회장(1987년), 자유민주민족회의 대표상임의장(1994년), 서울평화상문화재단 이사장(1996년), 건국 50주년 기념사업회 회장(1998년), 자유민주비상국민회의 대표상임의장(2005년), 대한민국헌정회 회장(2007~2009년) 등을 지냈다.

이 전 대표는 이달 중순 감기 증세로 입원하면서 건강이 급격히 나빠졌고 이날 세상을 떠난 것으로 전해졌다.

유족으로는 부인 김창희 여사와 아들 이동우 전 호남대 교수, 딸 이양희 유엔미얀마인권보호관, 사위 김택기 전 의원이 있다.

빈소는 삼성서울병원 장례식장 17호실, 발인은 다음 달 2일 오전이며 장지는 대전현충원으로 예정된 것으로 알려졌다.

onlinenews@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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