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후위기시계
실시간 뉴스
  • 남북대화 물꼬 튼 1972년… 그 긴박했던 비하인드 스토리
남북대화 출발점은 1970년이다. 당시 박정희 대통령이 8.15 기념사에서 “북한이 무력포기를 하면 남북 간의 인위적인 장벽을 단계적으로 제거할 수 있다”고 전격 선언한 것이 단초다.

그렇다면 8.15선언이 갑작스럽게 나온 배경은 뭘까. 바로 ‘닉슨독트린’이다. 베트남 전쟁에서 밀리던 미국이 아시아에서 경찰국가 역할을 하지 않겠다는 것. 우방들은 각자 알아서 자국방위를 하라는 것이 핵심이었다. 북한은 침묵으로 일관하다 이듬해인 1971년 6월 12일에 이르러서야 우리측 제안을 보란 듯이 거부했다.

그 사이 중앙정보부는 당시 강인덕 북한국장을 중심으로 8.15선언 후속조치로 남북이산가족상봉 문제를 선택해 비밀리에 연구에 몰두했다. 이번엔 이산가족문제를 8.15 기념식에서 제안하기로 했다. 인도적 차원의 카드를 꺼내들어야 하는 우리 측의 절박함이 감지된다. 그런데 뜻하지 않은 일이 벌어졌다. 하필이면 일본 요미우리신문이 낌새를 알아차리고 사전에 기사화 해 큰 파문을 일으키고 만 것. 북한이 문제를 삼기 전에 중앙정보부가 선수를 쳤고, 결국 예정보다 앞당겨 8.12일 당시 최두선 적십자사총재 명의로 대북이산가족상봉 제안을 했다.

①1972년 11월 3일 평양에서 열린 남북조절위원회 회의에 참석하기 위해 평양에 도착해 환영을 받는 남측 대표단. 오른쪽부터 강인덕ㆍ최규하ㆍ이후락ㆍ장기영. ②이튿날 남측 대표을 반갑게 맞이하는 북한 김일성 주석(악수하는 이가 강인덕 당시 북한과장, 김 주석 뒤가 이후락 중앙정보부장).

안타깝게도 이후 남북대화는 한 발짝도 변화가 없었다. 인도적 문제는 결국 정치적 협상 없이는 못 푼다며 북측이 완강했기 때문. 바로 김일성 식 대화기법이다. 당시는 김일성 주석이 큰 소리 칠만도 했다. 경제적으로 남한에 앞선 데다 ‘4대 군사노선’을 완성해 정립했고, 더구나 베트남전을 계기로 미국이 혈맹 남한과도 거리를 둔 상황이었다. 한마디로 부러울 게 없었던 북한이었다.

결국 북한의 요구대로 정치회담으로 바꿔 또 한해를 보낸 끝에 드디어 빗장이 풀렸다. 1972년 5월 당시 이후락 중앙정보부장이 밀사로 평양을 전격 방문하고 이어 북측의 박성철 부수상이 답방형식으로 서울에 온 것. 돌아올 기약 없는 밀사의 교환이 있고서야 비로소 신뢰의 싹이 텄고, 남북대화의 초석인 ‘7.4남북공동성명’이 성사돼 오늘에 이렀다. 

황해창 선임기자/hchwang@heraldcorp.com
맞춤 정보
    당신을 위한 추천 정보
      많이 본 정보
      오늘의 인기정보
        이슈 & 토픽
          비즈 링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