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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셰익스피어의 나라가 인정한 ‘한국의 작가’
영국서 종합베스트셀러 1위 ‘마당을 나온 암탉 ’의 작가 황선미…어른엔 치유 · 아이엔 삶의 비의 깨닫게 하는 그녀의 작품세계는

70년대 후반, 또래 소녀보다 한 뼘쯤은 작은 체구였고, 책을 유달리 좋아했던 소녀 황선미는 초등학교 졸업 후 중학교를 가지 못했다. 집안 형편이 어려웠기 때문이었다. 한 학급의 너댓은 중학교 진학을 하지 못하던 가난한 시절이었고, 소녀 역시 아침이면 교복입고 등교길에 나선 친구를 피해 다녀야 하는 무리 속에 낄 수 밖에 없었다. 위로는 오빠를 하나 둔 2남 3녀 중 둘째였던 십대 초반의 황선미는 그게 그렇게 억울하고 창피했다. 딸의 인생을 마음대로 결정한 엄마가 싫었다. 자기보다 공부를 못했던 친구들조차 다 가는 중학교를 가지 못하게 된 세상이 부당하게만 느껴졌다. 오빠를 위해 희생하고, 오빠와 차별받는다는 생각에 더 분했다. 분노는 스스로가 보잘 것 없다는 자괴감과 열패감, 그리고 대상 없는 반항심으로 이어졌다.

작가 황선미(51)는 당시를 “누가 제발 건드리기만 해줘”라는 마음으로 똘똘뭉쳐있던 폭발 직전의 시한폭탄 같았던 때라고 회고했다. 학교를 가지 못한 황선미는 동네의 성당을 들락거리며 야학에서 알파벳도 외우고 방정식도 부지런히 배워가며 억척스레 검정고시를 준비했다. 합격장을 받아들고 황선미는 남들보다 한 살이 늦었지만, 평택여고 신입생으로 이름을 올렸다. 무엇보다 제 자신에 대한 시험에서 스스로를 증명했다는 사실이 기뻤다.

그 소녀는 삼십 몇 년 후 셰익스피어의 나라 영국 런던에서 한국을 대표하는 문인이자 동시대 세계문학계에서 주목할만한 작가로 꼽힌다. 황선미는 황석영, 이문열, 신경숙 등과 함께 한국 대표 문인 10인으로 지난 4월 런던도서전을 방문했으며, 그 중에서도 런던도서전 조직위원회가 행사 기간 중 매일 1명씩 선정하는 ‘오늘의 작가’가 됐다. 마침 영국에서 출간된 그의 소설 ‘마당을 나온 암탉’의 영역본은 런던의 한 대형서점에서 종합베스트셀러 1위에 올랐다. 

“유년기의 원체험이 내 작품 속에 많이 투영됐다”는 황선미 작가는 지난 4월 런던도서전에서‘ 오늘의 작가’로 선정된 데 대해 “내 스스로에 대한 믿음을 확인하는 계기가 돼 무엇보다 기뻤다”고 말했다. [사진=박현구 기자/phko@heraldcorp.com]

”한국문학의 경사이고, 한국문학 대표 10인에 꼽혔다는 것도 개인적으로 큰 영광이지만, 무엇보다 저로선 십대 시절 검정고시에 합격했을 때를 떠올리게 했어요. 고집스럽고 자존심 센 유럽, 그 중에서도 세계 문학사에서 가장 중요한 곳 중 하나인 영국에서 제 책이 베스트셀러가 됐다는 사실은 저에게 검정고시 합격 때같은 자존감, 제 스스로에 대한 믿음을 확인시켜줬습니다.”

브라질월드컵에서 한국의 첫 경기, 러시아전이 막 끝난 지난 18일 오전, 서울 광화문의 한 카페에서 황선미 작가를 만났다. 런던에서의 ‘흥분’ 후 두달여가 지난 참이다. 서대문구 독립문 근처에 있는 자택에서 경기를 방금 보고 나왔는지, “축구는 좋아하시냐, 경기 보셨느냐”는 질문에 “가슴이 터질 것 같아서 제대로 못 봤다”면서도 “한 골은 넣을 줄 알았다, 앞으로도 잘 될 것”이라고 답했다. 작은 체구만큼이나 목소리는 차분하고 조용하지만, 자전적 소설 ‘바람이 사는 꺽다리집’에서 표현했듯 어린 시절 “총기 넘친다”고 듣던 눈빛만큼이나 목소리의청각적 인상도 선명했다.

▶일상, 서울서 원고 쓰고, 당진서 농사짓고=황 작가는 요새 주중엔 서울 서대문집서 원고를 쓰고, 주말이면 남편이 농사를 짓는 충남 당진으로 내려가 일을 거든다. 10년 넘게 계속했던 서울예대 강의는 지난해 그만뒀다. 지금 집필 중인 원고는 영국, 프랑스, 이탈리아, 터키 등 유럽의 민담집이다. “마침 어제 40~50매 정도의 한 장(章)을 끝내서 오늘 내일은 아무 생각 없이 쉬는 날”이라고 했다. 밤에는 깨 있을 수가 없어서 글 쓰는 일은 반드시 낮에만 한다. 유럽의 민담을 우리나라의 정서에 맞도록 재구성하고 엮은 글은 내년 이후 출간 예정이다. 그의 최근작은 지난 3월말 출간한 소설 ‘뒤뜰에 골칫거리가 산다’(사계절)이고 차기작은 가을께 선보일 제주도를 소재로 한 소설이다. 우리땅 우리네 삶의 이야기를 어린이 청소년들에게 들려주는 소설 시리즈로 DMZ와 독도에 이은 세번째이며 백두산과 서울까지 이어질 예정이다. 이를 위해 가을께엔 백두산에 오를 계획을 짜고 있다.

황 작가의 얼굴이 환한 웃음을 머금은 것은 농사 이야기를 할 때였다. “이번 주말엔 매실을 따야 하고, 복숭아는 봉지에 쌌으며, 류콜라, 바질 등 잡스럽게 별 거 다 기른다”고 했다. 십대 시절 아래 윗마을에서 살면서 오다가다 자연스럽게 알게 되고 통학버스를 같이 타고 다녔던 남학생이 현재 남편이다. 대기업을 다니다가 은퇴한 후 당진에서 농사를 짓고 있으니 황 작가와는 주말부부다. 늦둥이로 태어나 놀림받는 시골 소년이 또래 친구와 갈등을 겪고 화해하며 성장해나가는 이야기를 담은 환경 동화 ‘바다로 가는 은빛그물’은 남편의 어린 시절 체험을 소재로 한 작품이다.

황 작가는 학비가 모자라 휴학을 밥먹듯이 하면서 2년제의 서울예대(문예창작과)를 4년만에야 졸업했지만 재학 중이나 졸업 후나 작가가 될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작가는 특별한 사람이나 되는 것이지 시덥잖은 이야기나 하는 자신같은 사람이 가질 직업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대학 졸업 후엔 결혼부터 했고 아이부터 낳았다. 그가 문단에 데뷔한 것은 서른 두살인 1995년 중편 ‘마음에 심는 꽃’을 통해서였다. 내년이 데뷔 20주년이다. 지금까지 150만부 이상이 판매된 것으로 추산되는 아동문학의 걸작 ‘마당을 나온 암탉’은 출간15주년을 맞게 된다. 황 작가는 “미처 생각 못했다”며 “내년엔 개인적으로라도 기념할만한 이벤트를 해야겠다”며 웃었다. 


▶유년기 시절의 원체험 녹아든 문학, 시대의 풍경과 삶의 비극성 껴안는 연민과 낙관, 아름다움의 작품세계=‘마당을 나온 암탉’은 닭장에 갇혀 마당을 동경하고 알을 품어 새끼 낳길 열망하던 난종용 암탉 ‘잎싹’이 폐계로 버려졌다가 가까스로 살아나고 청둥오리의 알을 제 것처럼 품어 새끼 ‘초록’을 얻게 되면서 펼쳐지는 이야기다. 자유와 비상을 향한 동경, 이종간에 맺어진 어미와 새끼의 사랑에 먹이사슬로 이어진 자연 질서의 엄숙한 논리를 품은 이 작품은 아동문학이라고만은 할 수 없는 성숙한 세계와 문학적인 성취를 보여준다.

이 작품 뿐 아니라 자전적 소설인 ‘바람이 사는 꺽다리집’, 아버지에 대한 추억으로부터 영감받은 ‘뒤뜰에 사는 골칫거리’, 그리고 십수편의 동화와 그림책들은 한편에 약자와 소수자, 주변인에 대한 연민과 위로, 사람관계에 대한 낙관과 희망을 품고, 다른 한편으로는 시대의 풍경과 삶의 비극성, 엄정한 윤리적 성찰을 담는다. 자기 새끼가 된 청둥오리 ‘초록’을 위해 족제비와 사투를 벌이던 암탉 잎싹이 자기 몸을 기꺼이 족제비 새끼를 위한 사냥감으로 바치는 ‘마당을 나온 암탉’의 결말은 작가 황선미의 감성과 세계관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런던에서 황 작가가 해외의 언론과 평론가들한테 심심치 않게 들었던 말이 “유럽적인 정서에서는상상하기 힘든 엔딩”이라는 것이었다. 잔인하지만 아름다운 세계와 비극성을 껴안은 희망엔 황 작가가 겪은 유년기의 원체험이 녹아들었다.

황 작가는 충남 홍성 출신으로 7~8살까지는 부모형제와 부족하지 않은 행복한 시절을 보냈으나 외가쪽의 잘못으로 집안이 급격히 기울고 고향을 떠나 미군부대가 있던 경기 평택에서 자랐다. 검정고시를 거쳐 고교는 간신히 졸업했으나 대학 진학 역시 불가능했다. 그러나 부모의 반대를 무릅쓰고 무작정 입시를 보기로 했는데, 차비도 없어 시험 당일 아침 정처없이 걷던 중 다행히 경찰 오토바이를 만나 고사장에들어갈 수 있었다. “삶의 고비마다 보이지 않는 손이 있어 나를 여기까지 데려온 것 같다”고 말할 정도지만, 그를 한국 대표 아동문학가이자 문인으로 만들어낸 것은 “오늘이 가장 중요하다”는 신념이었다.

그는 초등학교 5~6학년 무렵, 동네 과수원 한 옆 쓰레기장에서 기이하고 끔찍한 체험을 했다. 초가을 사과가 익어갈 무렵이었고, 햇살이 눈을 찌를 듯 따가왔으며 억새가 바람에 흔들리던 날이었다. 그 때 소녀 황선미의 눈에 걸린 것은 끔찍한 화상을 입고 버려진 시신이었다. 그때나 지금이나 이유도 사정도 알 수 없는 일이었지만, 그날 이후 어른이 돼서까지 충격적인 장면은 잊혀지질 않았다. 그의 작품에는 일곱살까지 형성됐던 가족간, 이웃간의 아름답고 행복하며 정감어린 기억과, 불쑥 불쑥 대면하게 되는 이별과 죽음, 숙명, 그리고 시대의 잔인한 풍경들이 공존하며 서로를 품는다. 아마도 어른들을 위한 치유의 동화이자, 아이들을 위해 삶의비의를 깨우져가는 성장담으로서 황선미의 작품이 가지는 독보적인 가치의 근원이리라. 마당, 뒤뜰, 꺽다리집, 막다른 골목집, 마을, 과수원, DMZ, 독도, 제주도, 백두산, 서울 등 우리네 삶의 장소로부터 이야기를 건져올리는 그가 이땅에서 펼치는 다음 이야기마당은 또 어떤 풍경일까.

이형석 기자 suk@heraldcorp.com

황선미 작가가 걸어온 길

▲1963년 충남 홍성에서 출생
▲1987년 서울예대 문예창작과 졸업
▲1995년 중편‘마음에 심는 꽃’으로 데뷔
▲ 1995년 아동문학평론 신인문학상, 농민문학상 수상
▲1997년 탐라문학상 동화부문 수상
▲2000년‘마당을 나온 암탉’출간
▲2003년 세종아동문학상 수상
▲2002~20013년 서울예대 교수
▲2014년 런던도서전‘오늘의 작가’선정
▲ 작품=‘나쁜 어린이표’‘과수원을 점령하라’‘일기 감추는 날’‘넌 누구야?’‘바람이 사는 꺽다리집’‘뒤뜰에 골칫거리가 산다’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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