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같은 때면 당장 쇠고랑을 찰지 모르는 일, 하지만 42년 전 겨울 이 ‘공수표’는 한마디로 ‘먹혔다’. 배짱을 재산으로, 뚝심을 무기로 바다를 건넌 정주영 전 현대그룹 명예회장은 그렇게 영국 바클레이 은행에서 차관을 빌리고, 그리스 선주 리바노스로부터 26만t급 유조선 2척을 수주한다. 이 무모한 도전은 세계 1위 조선사로 우뚝 선 현대중공업의 오늘을 있게 한 기반이 됐다. 현대중공업의 올 해 신규수주 규모는 약 25조원에 달한다.
박태준 전 포스코 명예회장은 포항제철소 기초공사가 진행 중이던 1971년, 철광석과 코크스용 석탄 확보를 위해 호주 광산주를 만난다. 뜨내기 약장수를 대하듯 비아냥 거리는 호주인 광산주들에게 문전박대 당한 박 회장은 육군 소장정복을 입고 다시 그들을 찾아간다. 영국 전통을 따라 장군을 존경하는 문화가 있는 호주인들의 마음을 얻기 위해서였다. 장군복을 차려입고 광산주를 찾아가 직접 사업계획을 설명한 끝에 박 회장은 철광석 공급 약속을 받아낸다.
이병철 전 삼성그룹 회장은 1980년대 일본 업체들이 장악한 세계 반도체 시장에 출사표를 던진다. “계란으로 바위치기”, “무모한 결정”이라는 우려가 쏟아졌지만 이 회장은 대규모 투자를 결정한다. 결국 이 때의 선택이 오늘날의 삼성전자를 만들었다. 반도체는 현재까지도 국내 수출의 1등공신 역할을 톡톡히 하고 있다. 삼성전자가 스마트폰 등 새로운 성장동력을 구축 할 수 있었던 것도 세계 반도체 시장에서 거둔 성공이 기반이 됐다.
한국 수출은 이처럼 도전을 두려워하지 않았던 초대 기업인들의 ‘캔두스피릿(can do spiritㆍ‘하면 된다’는 정신)’에서 시작됐다. 전쟁의 상흔으로 불모지와 다름 없던 당시의 대한민국이 약 60년 만에 무역 규모 세계 8위, 경제규모 세계 15위의 경제 대국으로 성장한 원동력에는 벼랑 끝에서 세계를 내다봤던 이들의 도전정신이 있었다.
그들의 ‘캔두스피릿’은 지금도 한국 수출을 정의하는 특징 중 하나다. 한국인의 근면성과 우수한 자질, ‘안되는 것도 되게하라’는 끈기는 세계 시장에 놓인 많은 선택지 중 한국을 고르게 하는 힘이 되고 있다. 동남아시아 국가 중심으로 많은 개발도상국에게는 롤모델이 되기도 한다. 세계적 석학 기 소르망 파리정치대 교수는 이를 두고 “인류의 소중한 문화유산”이라고 평가하기도 했다.
수출 3.0시대를 맞이하는 오늘날, 초대 기업인의 ‘캔두스피릿’이 다시금 주목받고 있다. 정체기에 놓인 한국 경제의 부흥을 위해 세계 시장의 ‘히든 챔피언’이 될 강소기업과, 도전을 두려워 하지않는 젊은 창업가들의 등장이 간절해서다.
안현호 한국무역협회 부회장은 “수출 3.0시대는 민간이 주역이자 중심이다. 중소기업을 중심으로 한 국내 민간기업들이 내수시장에만 머무르지 말고 ‘캔두스피릿’을 바탕으로 71조원에 달하는 세계시장으로 시야를 넓혀야 한다”고 조언했다.
박수진 기자/sjp10@heraldcorp.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