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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투데이> 평소엔 형 · 동생…국감만 되면 ‘들추려는 者와 감추려는 者’
의원실 보좌관-기업 대관담당자의 얄궂은 운명
모시는 의원님 이름 알리기 위해
조그만 것 하나라도 잡아내려는 보좌관

“무조건 우리 회장님·사장님 출석 저지”
흠결 하나라도 원천봉쇄하는 대관 담당자

그들의 피말리는 일상이 시작됐다




‘쫓는 자와 쫓기는 자, 감추려는 자와 들춰내려는 자의 전쟁.’

국정감사철, 국회의원실 보좌관과 정부 및 기업 대관업무 담당자의 모습을 묘사한 한 정치인의 말이다. 평소에는 같이 술도 마시고, 담배도 나눠 피우는 ‘형ㆍ동생’으로 지내다가도 국정감사만 다가오면 반대편에 설 수밖에 없는 얄궂은 운명이다.

모시는 국회의원의 이름을 알리기 위해 조그마한 것 하나라도 꼬투리를 잡아야 하는 게 보좌관의 역할이다. 반대로 조직과 기관장의 흠결 하나라도 잡혀서는 안 되는 게 대관 담당자의 임무다.

국정감사 시즌이 시작되는 매년 10월은 국회의원 보좌관과 행정부ㆍ공공기관, 기업 관계자들 사이에서 소리없는 전쟁이 시작된다. 한 건 터뜨려서 모시는 의원의 얼굴을 세워주려는 보좌관들은 눈에 불을 켜고 국정감사 자료를 요구하는데, 피감기관은 몰아치는 태풍을 피하기 위해 자료제출 지연, 해명보도자료 배포 등 갖은 편법을 구사한다. 왼쪽은 자료를 살펴보는 국회의원실 직원, 오른쪽은 국회에서 정보를 얻기 위해 진을 치고 있는 피감기관 관계자들.
[안훈 기자/rosedale@heraldcorp.com]

야당의 한 의원실 보좌관은 요즘 하루하루 짜증의 연속이다. 정기국회 시작 전부터 요청했던 자료들 상당수가 알맹이가 빠진 채 돌아오기 일쑤다. 힘들게 문제점을 찾아내 자료를 요청하면 먼저 물타기성 해명 보도자료를 먼저 내보내는 ‘상도의’에 어긋나는 일도 빈번하다. 몇날 밤을 새우며 준비한 ‘야심작’이 하루아침에 ‘뻔한 것’으로 전락하는 순간이다.

이 보좌관은 “정권 교체 첫 해인데다, 기관장이 아직 공석이거나 임명된 지 얼마 되지도 않아 업무파악조차 제대로 된 곳이 없다”며 “그나마도 문제점이 보여 자료를 요청했는데, 우리가 보도자료를 내기 전에 먼저 개선방안까지 포함한 보도자료를 내는 것을 볼 때는 참 허탈하고 얄밉기까지 하다”고 속을 달랬다.

이런 물타기성 미꾸라지 기관은 그나마 양반이다. 대놓고 큰소리를 치는 피감기관이 부쩍 늘었다는 하소연도 나온다.

또 다른 의원실의 한 보좌관은 “소위 의원실에 찾아와 벌벌 떠는 피감기관은 옛 말”이라며 속풀이를 시작했다. 이 보좌관은 “얼마 전에는 정부 부처 한 과장이 찾아와 최근 통과된 법이 비합리적이라면서 일장연설을 늘어놓고 돌아갔다”고 소개했다. 그는 “공무원이 와서 그러고 가니 황당해서 뭐라 제대로 대꾸도 못했다”고 분위기를 전했다.

국회의원 스스로가 ‘갑과 을’의 관계를 바로잡자며 나선 마당에 정부나 피감기관에 옛날처럼 큰소리만 칠 수는 없지만, 그래도 너무하다는 하소연이다. 이 보좌관은 “대등하게 서로가 할 말 다하고, 우리도 나름대로 설명도 하고 요구도 하는 게 맞다 싶기도 하다. 그런데 그러다가도 울컥할 때가 한두 번이 아니다”고 울상을 지었다.

하지만 국감 때면 밥이며 술이며 대접했던 기억이 생생한 대관 담당자들도 할 말은 있다. 국회의원들의 단골 먹잇감인 한 기업의 대관 담당 부장은 요즘 집에 제 때 퇴근한 기억이 가물가물하다. 그나마 일단 호통치고 보는 구태 보좌관은 많이 줄었다지만, 무리한 자료요구나 윽박지르기 식 태도는 여전하다는 것이다.

이 부장은 “여기저기서 경제민주화 이야기를 하면서 민간 기업 내부 자료를 요구하고, 법을 들먹이며 안 주면 두고 보라는 식으로 나올 때는 가슴이 먹먹하다”고 사정을 호소했다.

그나마 자료요구는 양반이라는 소리도 나온다. 갑의 횡포를 따지고 바로잡겠다는 명분하에 상임위 여기저기서 “사장 출석해라”는 소리가 들릴 때면 아찔할 수밖에 없다. “무조건 우리 회장님이나 사장님만은 막아야 한다”는 회사 지침과, “우리 의원 면을 생각해서라도 제발 나오도록 해달라”는 보좌관의 읍소와 명령 사이에 절충점 따위는 존재할 수가 없다.

최근 모 상임위원회에 회사 고위 임원의 증인 출석이 확정된 한 업체 대관 담당부서 직원은 “출석이 확정됐다는 소식에 맥이 풀리기도 했지만, 그나마 회장님이 아닌 것에 다행이다는 마음까지 생겼다”며 가슴을 쓸어내렸다. 의원실을 돌아다니며 예상 질문을 찾아내고 모범 답안을 작성하는 남은 일 정도는, 회장님 출석 막기에 비하면 별 것 아니라는 설명까지 덧붙였다.

이러다보니 19대 국회에서는 국회 보좌관에서 기업 대관 담당자로 스카우트해 가는 일도 종종 볼 수 있다. 정부 부처나 산하기관들 역시 유력 의원들 관계가 깊은 보좌관들을 영입하는데 경쟁적으로 나선다. 국회의원 임기가 끝나면 언제든지 실업자가 될 수 있는 불안한 계약직인 보좌관들에게 높은 연봉과 안정적인 신분은 뿌리치기 힘든 유혹이다.

한 보좌관은 “갑이라고들 하지만 4년 계약직 신세”라며 옮겨간 동료들을 이해했다. 또 보좌관 출신 동료를 맞은 대관 담당자 역시 “사람 관계가 중요한 일에, 그쪽에 경험이 있던 사람들이 대우 받는 것은 당연하다”고 거들었다.

하지만 수년 동안 누려온 갑의 위치에서 갑에게 아쉬운 소리를 해야 하는 을로 처지가 바뀌는 것은 쉬운 일만은 아니다. 최근 국회 안에서는 높은 연봉에 기업으로 자리를 옮긴 보좌관들이 다시 국회로 돌아오는 사례도 심심치 않게 볼 수 있다. 심지어 일전에 자리를 옮긴 한 보좌관 출신 대관 담당자는 업무 스트레스에 병원 치료까지 받고 있다는 소문도 들린다.

최정호ㆍ백웅기 기자/choijh@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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