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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휴먼다큐> 육지를 품은 바다소년 이종구 수협중앙회장
바다 소년은 바다에만 머물지 않았다. 바다에 있었더라도 그는 부자 어부로 살았을 터. 하지만 어민을 위해, 광활한 바다를 품기 위해 좁은 바닷가 마을에서 벗어나 육지로 향했다.

수산업자 아버지의 사업 실패를 딛고 일어선 청년 사업가, 번 돈을 모아 낙후된 어촌의 발전을 위해 쓰자고 주민들을 설득한 계몽가, 바닷가 마을에 금융을 설파한 선구자. 이종구 수협중앙회장 얘기다.

그는 1987년 전국 최연소 지역 수협조합장 타이틀을 거머쥔 데 이어 2007년 ‘대한민국 대표 어업인’ 수협중앙회장 자리에 오른다. 임기를 채우지 못한 전임 회장이 숱했지만 이 회장은 연임에 성공한다. 2009년에는 한국인 최초로 국제협동조합연맹(ICA) 수산위원회 위원장에 선출된다.

최신 선박과 어구(漁具)보다 높은 교육ㆍ문화 수준이 어민의 소득을 증대시킨다고 믿는 이 회장. 어민들이 사회변화를 따라가지 못하면 뒤떨어질 수밖에 없다고 강조한다.

바다에만 있었다면 그는 필부(匹夫)로 살았을지 모른다. 하지만 바다를 위해선 그에게 더 큰 무대가 필요했다. 아무도 가려 하지 않은 길을 선택한 이종구, 바다를 위해 외길을 걸어온 그의 바다 스토리가 궁금하다.

수협중앙회 이종구 회장 인터뷰. [안훈기자 rosedale@heraldcorp.com]

▶사람을 사로잡는 청년

이 회장은 누가 뭐래도 뱃사람이다. 그렇다고 물고기만 좇은 것은 아니다. 그는 사람을 낚았다.

그의 아버지는 수산업자였다. 일본에서 배를 건조해 들여왔고, 이 어선들은 유망(流網: 물고기가 가는 길에 그물을 가로질러 쳐놓는 방식)이나 안강망(鮟鱇網: 조류에 밀려가지 않게 어구를 고정해 놓고, 어군(魚群)이 조류의 힘에 의해 강제로 어구에 밀려 들어가게 하는 방식)으로 고기를 잡았다.

그러나 수산업이 내리막길을 걷게 되자 일본에서 들여온 큰 배는 거추장스럽게 됐다. 소형어선들만 연근해를 드나들 정도로 수산업은 초라해졌다.

아버지의 사업 실패를 목격한 청년 이종구는 고교 졸업 후 생업 전선에 뛰어들었다. “중ㆍ고교 때 매우 어려웠어요. 고등학교 졸업하자마자 저도 사업에 뛰어들었죠.”

1970년, 이 회장은 그때만 해도 낯설은 피조개 양식업에 도전했다. 양식장 면허를 얻기 위해 관청 공무원에 매달렸다. 사업 자금도 빌려야만 했다. 첫 도전은 성공적이었다.

이런 경험을 바탕으로 그는 고향 경남 진해시(현 창원시 진해구) 웅천 지역 어촌계장에 당선된다. 이 회장은 “어촌계장 선거는 계원들이 하는 소규모 선거라서 어찌 보면 큰 선거보다 더 어려웠다”고 회상했다. 소지역주의가 판치면서 쏠림 현상이 심했기 때문이다.

다음 목표는 복지어촌으로의 탈바꿈. 고향에는 상수도 시설이 없었다. 전기만 겨우 들어왔다. 주민들은 도로포장을 생각하지도 않았다. 이 회장은 “바다에 나가 작업하고 집에 돌아와 몸이라도 씻을라치면 물이 없었다. 밥 지을 물도 없었다”면서 “자연히 생산성이 떨어지지 않았겠어요”라고 반문했다. 그는 “생산기반시설을 갖추는 데 돈을 써야 한다. 그래야 잘 살게 된다”면서 주민들을 설득했다.

▶금융에 눈을 뜨다

이 회장은 피조개 양식업에 뛰어들면서 당시 돈 10만원을 빌렸다고 한다. 지금 돈으로 치면 꽤 큰 돈이다. 사업이 망했더라면 빚더미에 앉게 됐을 수도 있다.

이 회장은 “종자를 사서 양식장에 뿌리는데, 해마다 잘되면 좋으련만 자연은 꼭 우리 편은 아니더라”고 말했다. 때문에 금고가 필요했다. 한 해 농사를 망치더라도 다음 해 재기할 수 있는 토대를 만들어야 했다. “어려울 때 사람들이 돈을 쓰겠습니까. 그럴수록 없는 사람은 점점 더 어려워지는데, 사람들은 이를 잘 모르죠. 실패하더라도 또다시 투자해야 하는 여건을 마련해야 한다”며 금융의 필요성을 역설했다.

당시 수협중앙회는 1조원 기금 조성 운동을 벌이던 터. 하지만 흐지부지되면서 이 회장은 마을 금고 설립으로 방향을 틀었다. 주민을 설득하는 게 관건이었다. “주민들은 소득을 나눠 달라고 했어요. 그러면 TV 사고, 전축 사고…. 그냥 써버리면 없어지잖아요.”

“저축하라”고 주민들을 독려했다. 그러면서 자신도 뛰었다. 생산기반시설 마련을 위해 시청에서 시멘트 3000여포를 얻어냈고, 마을 주민들과 힘을 합쳐 상수도관을 땅에 파묻고 그 위에다 도로를 깔았다. 진해 변두리 웅천은 새롭게 탄생했다.

금융에 눈을 뜬 청년 이종구는 진해수협 조합장에 도전한다. 적자 조합으로 중앙회의 관리를 받던 터였다. “초반 여론은 압도적이었는데, 현 조합장이 현직 프리미엄을 바탕으로 무섭게 추격했다”고 말했다. 결과는 1표 차 신승. 37살 때였다.

이 회장은 조합장 임기 첫 3년 동안 조합 정상화에 매진했다. 조합의 위탁판매와 조합을 거치는 계통판매를 활성화시켰다. 조합에 수입이 들어왔다. 그 결과 부실조합은 흑자조합으로 거듭나게 됐다.

이 회장은 첫 임기 급여를 한 푼도 손대지 않았다. 급여를 모은 돈으로 진해수협장학회를 설립했다. 복지어촌을 향한 열정은 중앙회장에 당선된 2009년 어업인교육문화복지재단 설립으로 이어지게 된다.

[안훈기자 rosedale@heraldcorp.com]

▶비주류의 반란

이 회장의 삶은 도전의 연속이다. 진해수협 조합장 3선에 성공한 데 이어 경남도 도의원에 출사표를 던진다. “지방의원들의 힘이 세졌다. 더 큰 무대로 나가려면 정치인의 길을 걸어야겠다”고 출마 배경을 설명했다.

선거전은 치열했다. 비방전으로 치달았다. 선거는 이 회장의 승리로 마감됐지만 치열한 공방의 여파로 도의원직은 물론 조합장에서도 물러났다. 승승장구하던 그에게 닥친 첫 시련이었다.

그러나 진해 사람들은 이내 이 회장을 찾았다. 2000년 네 번째로 진해수협 조합장에 당선됐고, 2003년 수협중앙회 비상임이사로 진출한다. 진해를 벗어나 전국 무대로 나간 것이다.

하지만 중앙 무대는 녹록지 않았다. 이 회장은 “통영ㆍ거제ㆍ고성 지역 조합이 큰 세력을 형성하고 있다. 이들의 결정은 경남도는 물론 전국에 영향을 미칠 정도”라면서 “여기(경남 세력)에서 뚫고 나오는 게 더 힘들었다”고 되새겼다.

수협 중앙회장에 도전해 한 차례 고배를 마신 뒤 당선됐다. 하지만 기쁨은 잠시, 축하의 샴페인을 터뜨릴 수 없었다. 전임 회장의 비리로 수협의 이미지는 크게 실추됐고, 직원들의 사기는 바닥을 기었다.

“주변 사람들이 ‘임기를 채울 수 있겠습니까’라고 묻더군요. 진해에서 떠들썩하게 올라왔는데, 2년은 채워야겠다고 다짐했어요.”

직원들 상대로 설문 조사를 실시했다. 그리고 일일이 들여다봤다. 줄서기를 배격했다. 지역주의를 없앴다. 오직 능력에 따른 인사를 실시했다. 집안 단속이 먼저였다.

▶“어민 수준을 높여라”

진수장학회를 만들었던 이종구. 중앙회장이 되면서 그는 어업인 전체를 위한 복지 쪽으로 눈을 돌리기 시작한다. “어민 소득이 바닥입니다. 왜 그런 줄 아세요. 바다에 나가, 그것도 밤에 나가 며칠씩 일하고 돌아와서 낮에 잠을 자고…. 교육문화 혜택을 받을 시간이 없지 않습니까.”

그렇다. 어민들은 목숨을 걸고 조업에 나선다. 비바람이 휘몰아치는 날, 배에서 몸을 가눌 수 없을 정도다. 어민들은 “차라리 부잣집 개가 부럽다”고 한다. 올해만 해도 어민 80여명이 목숨을 잃었다.

이 회장은 2007년 당선되자마자 정부를 찾아간다. 하지만 정부는 어업인재단 설립에 부정적이었다. 이 회장은 “농민을 위한 재단은 기금으로 장학금을 주고, 시골학교 발전기금도 낸다. TV 장학프로그램도 후원한다. 그런데 어민들을 보살펴 주는 곳은 없다. 정부가 해 줘야 하지 않나”라면서 정부를 몰아붙였다.

정부는 재단 대신 예산 50억원 지원이란 타협안을 냈다. 수협은 일단 이 돈으로 복지사업을 시작하자는 판단을 내린다. 그러나 예산 50억원을 정부가 이 사업에 저 사업에 갖다 붙이면서 복지관련 실제 예산은 10억여원으로 쪼그라들었다.

이 회장은 어업인재단 설립안을 독자적으로 이사회에 상정하는 초강수를 둔다. 정부가 허가할 리 없었다. 그는 물러서지 않았다. 정권이 바뀌자 수협은 새 정부의 국정과제에 어업인재단 설립을 포함시키는 방안을 추진했다. 재단은 2009년 9월 비로소 세상에 나왔다.

17억원의 기금은 현재 70억원 정도로 불어났다. ‘투게더 1%’(소득이나 매출액의 1%를 재단에 기부), ‘후레시 도네이션’(Fresh Donationㆍ축하품 대신 재단에 기부) 상품도 한몫했다.

[안훈기자 rosedale@heraldcorp.com]

▶피해의 역사

“바다의 수혜를 입는 기업이나 사람은 엄청나다. 거꾸로 생각하면 어민이 피해를 입는 것이다.” 이 회장의 주장이다.

그도 그럴 것이, 우리나라 해운 산업이 세계 최고인데 뱃길을 열어주면서 어민들의 생업 현장이 줄어들고 있다. 뿐만 아니다. 육지의 각종 오ㆍ폐수와 원전 온배수 등이 바다로 흘러가고 있다. 어민들은 고기를 잡으러 더 먼 바다로 가야만 한다.

이 회장은 “우리 어민이 수산물을 잡지 않으면 중국이나 일본이 잡는다. 자원을 뺏기면 우리는 해외에서 사들여 와야 한다”면서 “어업은 개인사업이 아니다. 때문에 정부가 피해 지역 주변 어민의 입막음만 할 게 아니라 체계적인 지원을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또 “종자 개발이라든지, 연구라든지 농업에 비해 어업에 대한 정부의 투자가 현저히 떨어진다. 뒤처질 수밖에 없었다”고 아쉬움을 토로했다.

이 회장은 그래도 우리 어민들이 스스로 노력해 우리나라를 세계 13위(생산량 기준) 수산국가로 발전시켰다고 힘주어 말한다. 박근혜정부에서 부활한 해양수산부의 역할에 대한 기대가 크다고도 했다.

열악한 어업 환경은 바다의 황폐화와 한ㆍ중ㆍ일 3국의 경쟁 등 외부요인에만 기인하는 것은 아니다. 그는 수산인들도 자성해야 한다고 역설한다. “우리 수산업 하는 사람들도 지속적인 어업을 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그러나 빨리 잡아야 한다, 많이 잡아야 한다는 생각 때문에 자원 감소를 부추기고 있다”고 했다.

최근 어촌은 이 같은 자원 감소에다 양극화와 고령화 문제에 시달리고 있다고 그는 진단한다. “기업형 수산업자는 큰 수익을 올리고, 굴 따고 바지락 캐는 사람의 소득은 날로 줄어들고 있다. 격차가 너무 커졌다”고 양극화의 현실을 설명했다. 어촌 중산층 복원이 시급하다는 지적이다.

고기잡이는 힘들다. 외국인 선원이 대신하고 있다. 그렇다고 유령 어촌으로 만들 수 없다. 이 회장은 고령화 대비책으로 강력한 청년층 유인책을 써야 한다고 주장한다. 특성화고 졸업인력이 어촌으로 몰릴 수 있도록 병역특례 혜택 범위를 넓히고, 외국인 선원 조달을 위해 규제를 완화해야 한다는 것이다.

게다가 유인도가 무인도가 되면 국토 관리비용이 들어간다. 어촌인구 증가는 이런 비용을 감소시키는 효과를 낳는다. 식량생산 증대도 따라오게 마련이다.

▶세계가 바라보는 자랑스런 역사

이 회장은 세계 무대에 도전한다. 수산강국은 일본. 2009년 수십년간 일본이 맡아온 ICA 수산위원장 자리를 한국인 최초로 이 회장이 차지했다.

우리는 일본과 다른 방식으로 회원국에 접근했다. 그는 “일본은 외국에 자금을 지원하고, 일본으로 불러와 교육을 시키는 것을 주로 했다”면서 “그러나 우리는 IT 시대에 맞게 저개발 국가에 수산 기자재와 정보화 기기를 지원했고, 그들이 새로 단장한 수산위원회 홈페이지에서 정보를 얻도록 했다. 또 각국 어업인들을 초청해 노하우를 전수했다”고 설명했다.

특히 수협이 발간한 ‘한국 수협의 지식 공유(KSP)’ 책은 찰스 굴드 ICA 사무총장으로부터 “전 세계 수산업 발전을 위한 놀라운 자원이 될 것”이란 찬사를 받았다. 여기에는 도시와 어촌 간 교류, 안전조업지도, 어황방송, 수산인을 위한 신용사업, 면세유 제도, 수산물 위판제도 등 우리 수협의 주요 사업과 성과를 상세하게 담았다. 우리 수산업이 세계가 바라보는 자랑스런 역사를 써내려가고 있는 셈이다.

이 회장은 여기에서 그치지 않았다. ‘세계 수협의 날’(6월 16일)을 만들었다. 2010년 ICA 수산위원회가 서울선언을 채택한 날로, 지속가능한 수산업을 목표로 한 6개 항의 실천강령을 담고 있다. 2011년 서울, 지난해 베트남, 올해 인도네시아에서 행사가 열렸다. 우리가 주도해 세계 협동조합 간 지식 공유의 장을 만든 것이다.

그의 당면 과제는 한ㆍ중 자유무역협정(FTA)이다. 미국이나 칠레에선 거리가 먼 탓에 가공식품이 들어오지만, 중국과 FTA를 체결하면 가공식품이 아닌 갓 잡은 수산물이 우리 식탁에 올라올 수 있다. 또 중국의 불법조업이 갈수록 기승을 부리는 가운데 서해에서 우리가 잡을 수산물을 중국이 잡아 우리에게 파는 형국이 돼 버릴 수 있다. 우리 어민이 고사할 수밖에 없는 현실이다.

이 회장은 “정부가 한ㆍ중 FTA 체결 전 우리 수산업이 경쟁력을 높일 수 있는 조치를 먼저 해 줘야 한다”고 주문한다. 그러면서 국민들에게 “누가 잡은 수산물인지 생각해 주면 어민들이 신바람나지 않겠어요”라고 했다.

대담=박승윤 경제부장

정리=조동석 기자/dscho@heraldcorp.com

[안훈기자 rosedale@heraldcorp.com]

이종구 수협중앙회장이 걸어온 길

▶1951년 경남 진해 출생

▶1987~1996년 13ㆍ14ㆍ15대 진해수협 조합장

▶1995~1996년 경남도 도의원

▶2000~2007년 17ㆍ18대 진해수협 조합장

▶2003~2004년 수협중앙회 비상임이사

▶2004년 경남대 행정학 석사

▶2007년~ 수협중앙회장

▶2009년~ 국제협동조합연맹 수산위원회 위원장

▶2011년 국제협동조합연맹 로치데일 파이어니어상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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