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후위기시계
실시간 뉴스
  • 美동부사회 그리는 던칸 한나...안락함에 깃든 쓸쓸함
[헤럴드경제=이영란 선임기자]데이비드 호퍼(1882-1967)는 적막감이 감도는 사실적 회화로 미국은 물론 전세계적으로 많은 팬을 확보하고 있는 화가다. 호퍼의 그림은 전후(戰後) 미국의 도시적 감수성과, 미국인들의 내면을 더할 나위 없이 예리하게 담아내 지금도 큰 사랑을 받고 있다.

그리고 여기, 그 계보를 잇는 현재진행형의 화가가 있다. 미국 동부를 무대로 활동 중인 던칸 한나(Duncan Hannah, 60)가 그 주인공이다.

던칸 한나의 작품전이 서울서 개막됐다. 서울 서초동의 갤러리바톤(대표 전용진)은 미국 작가 던칸 한나의 아시아 첫 개인전 ‘Pleasures and Follies(즐거움과 어리석음)’를 오는 8월 4일까지 개최한다.


던칸 한나는 ‘가장 미국다운 회화’로 불리는 ‘20세기 아메리칸 아트’를 세련된 필치와 그만의 현대적 해석을 통해 계승해온 작가다. 아시아권에선 그의 작업이 제대로 조명된 적이 없어 그의 이름은 아직 생소하다. 그러나 던칸 한나는 지난해 미국 구겐하임미술관 펠로(Guggenheim Fellow)에 선정됐으며, 뉴욕 메트로폴리탄 뮤지엄, 시카고 아트 인스티튜드 등에 작품이 컬렉션되는 등 미국 내에선 명성이 꽤 높다.


던칸 한나의 그림은 1920~30년대 미국 동부 상류사회의 모습을 잘 보여준다. 지금은 사라진 시대의 단면들을 그림으로써 미국적 노스탤지어를 조용히 불러일으킨다.

그의 작품은 또 피츠 제럴드의 소설 ‘위대한 갯츠비’의 장면들을 떠올리게 한다. 제1차 세계대전의 포화와는 아랑곳없이 안락감을 이어가던 미 동부지역은 산업혁명의 결실이 더해지며 유럽의 세련된 귀족양식이 한층 두드러졌던 곳이다. 특히 뉴욕, 코네티컷 지역은 유럽 상류문화의 미국화(化)를 주도하면서 아이비리그 출범의 산파 역할을 했다. 앵글로색슨 문화의 꽃이 활짝 피었던 곳이다. 부친이 하버드대 출신의 변호사였고, 그 자신 뉴욕의 명문 미대(파슨스)를 다닌 던칸 한나 또한 그 문화의 세례를 듬뿍 받으며 자랐다.



따라서 한나의 그림에는 하버드대생들의 조정경기 장면, 세련된 차림으로 거리에서 담소를 나누는 신(新)여성, 고풍스런 저택을 배경으로 호숫가를 지나는 요트, 고급 앤틱자동차들의 주행 장면 등이 즐겨 등장한다. 던칸 한나는 유려한 필치로 감상자를 20세기 초의 미국, 또는 유럽 어느 곳으로 감상자를 이끈다.

무엇보다 던칸 한나의 작업은 데이비드 호퍼의 그림처럼 도시적 감수성과 그 속에 담긴 고즈넉함을 더없이 세밀한 필치로 드러내고 있는 것이 공통점이다. 그러나 그는 미국 동부 사회, 또는 유럽 상류층의 삶을 그만의 뛰어난 감각과 붓질로 표현하면서 ‘안락함 사이에 깃든 나른하면서도 쓸쓸한 정서’를 담담히 그려내 호퍼의 작업과 궤를 달리 한다.

교복을 입은채 누군가를 기다리는 금발의 사립학교 여학생, 가느다란 나뭇가지를 들고 무언가 상념에 빠진 듯한 소년의 모습, 너른 들판에서 손을 잡고 춤을 추는 어린이들은 1920~30년대를 넘어, 작가가 경험했던 어린 시절과 오버랩돼 더욱 생생하고 진솔하게 다가온다. 



‘20세기 아메리칸 아트’의 전통을 이어가는 것은 분명하나, 던칸 한나의 그림들에선 그만이 보여줄 수 있는 맑고 세련된 기품과 탄탄한 밀도가 느껴진다. 큰 목소리로 요란하게 외치기 보다는, 풍요와 안락함 사이에 깃든 삶의 쓸쓸함과 애틋한 정조(情操)를 차분히 묘사해 설득력을 주는 것.

또 이 시대 거의 ‘멸종위기’로까지 꼽히는 ‘사실적 회화’의 근원에 대해 끊임없이 성찰하며 자칫 호퍼의 아류로 흐를 수 있는 위험으로부터 벗어나 자신만의 입지를 성실히 다지고 있다.

최근들어 세계 현대미술이 요란한 트렌드에 휩쓸리며 심지어 ‘쇼’에 가까운 자극적인 미술이 범람하는 상황에서 던칸 한나의 그림은 ‘잘 그린 회화’의 매력을 여실히 보여준다. 자칫 고루하고 몰개성적으로 비춰질 법한 장르이지만, 숙련된 표현력과 작품의 완결성으로 옛 시대에 대한 향수와 인간존재의 불가해성을 매혹적으로 드러내고 있는 것. 또 ‘펭귄북스’ 시리즈 등 또다른 회화실험을 거듭하고 있는 것도 오늘 그를 주목하게 하는 요소다. 



한편 던칸 한나는 30여년 전 팝아트의 거장 앤디 워홀과 교류하기도 했다. 워홀은 스물다섯살이나 어린 작가를 매우 아끼며 “나는 너같은 섬세한 그림은 못 그린다. 그림이 너무 좋으니 내 거랑 바꾸자”고 제의했다고 한다. 워홀이 타계하면서 이 제안은 무위로 그쳤지만 그만큼 워홀은 던칸 한나의 회화를 아끼고 지지했음을 알 수 있다. 02)597-5701. 사진제공=갤러리 바톤

/yrlee@heraldcorp.com
맞춤 정보
    당신을 위한 추천 정보
      많이 본 정보
      오늘의 인기정보
        이슈 & 토픽
          비즈 링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