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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면도칼 물고 말하는 이 여성..’ 중국현대미술의 새 현장
<이영란 선임기자의 아트 앤 아트 >

사회주의에서 자본주의로 급격히 말을 갈아탄 중국사회의 혼란상을 대형 인물그림을 통해 신랄하게 풍자했던 중국의 현대미술, 이른바 ‘차이나 아방가르드’는 세계에 큰 파란을 일으켰다. 특히 텐안문 사태를 직접 경험했던 장샤오강, 쩡판즈, 위에민준, 왕강이, 팡리준 등의 냉소적 그림은 엄청난 이슈를 몰고 왔다. 그림값 또한 2000년대 초반에 비해 수십, 수백배 올랐다.

‘차이나 아방가르드’의 핵심주자로 이른바 ‘4대 천황’이라 불리는 쩡판즈, 장샤오강, 위에민준, 팡리쥔은 이제 세계 미술시장을 그들의 발 아래에 두고 있다. 중국의 거부와 각 지역 미술관들이 그들의 그림을 구하기위해 머리를 조아리고 있는 것. 그러나 스타덤에 오른 후 이들은 작업의 날이 무뎌졌다는 비판을 받고 있다. 더 이상 혁신적이지 않다는 것. 그렇다면 이들의 뒤를 이을 차세대 주자는 과연 누구일까?

중국 현대미술의 새로운 흐름을 소개하는 ‘유희적 저항(Cynical Resistance)전’이 서울 소격동 학고재 갤러리(대표 우찬규)에서 개막됐다. 십여년 넘게 중국미술 현장을 누벼온 독립 큐레이터 윤재갑 씨가 기획한 이번 전시에는 예링한, 루쩡위엔, 마치우샤, 짱쿤쿤, 투홍타오, 판지엔, 하오량, 황징위엔 등이 참여했다.


이들 8명의 작가는 중국을 대표하는 미술대학인 중앙미술학원의 자오리 교수(미술평론가)가 프랑스 파리 퐁피두센터와 미국 뉴욕 구겐하임미술관을 순회하는 ‘중국청년작가 100인’전에 참여시킨 차세대 대표주자들이다.

1970,80년대에 태어나 중국의 격변기에 유년을 보낸 이들은 자신들이 흠모했던 ‘차이나 아방가르드’들이 거대자본과 매너리즘에 함몰되자 실망감을 느끼고, 역으로 중국의 정치, 사회적 이슈들에 약간의 거리를 두고 있다.

그런 까닭에 이들의 작업은 지극히 사변적이고, 유약하다는 비판을 받는다. 너무 개인사적으로, 그리고 미시적으로 빠져드는 것 아니냐는 것. 그러나 기획자인 윤재갑 씨는 “문화평론가 왕샤오밍이 이들이 윗세대보다 덜 정치적이고, 덜 투쟁적이라 규정짓는 것에 대해 반기를 들었듯 이들은 겉으로 보기엔 유약하고, 진지함이 결여된 듯하나 사회와 인간에 대해 저마다의 방식으로 절실하게 이야기하고 있다“고 했다. 다만 주제가 좀더 세분화되고, 기법이 다양해져 섬세하게, 그리고 내적으로 절규하고 있는 게 차이점이라는 것.


학고재갤러리 본관 초입에 내걸린 판지엔의 어둡고 묵직한 그림이 좋은 예다. 인간의 내면과 끊임없이 발생하는 사건사고의 장면을 ‘낯선 풍경화’로 담아낸 그의 회화는 더없이 직설적이었던 선배 작가들에 비해 한단계 침잠한 듯 어둡고 조용하다. 그러나 그 고뇌와 깊이감이 만만찮다.

이번 서울 전시에는 어두운 숲 속으로 걸어 들어가는 남자와, 날지도 앉지도 못한채 나무 근처를 퍼덕이는 두루미 두 마리를 그려넣은 작품 ‘결국 모든 것이 지나갈 것’을 내놓았다.

짱쿤쿤의 그림 또한 풍자의 묘미가 남다르다. 중국 정부가 대규모 주거단지에 설치한 십여종의 운동기구들을 마치 수천년 전 고대 화석처럼 고착화시켜 그려냈다. 운동기구 설치는 어찌 보면 개인의 삶을 길들이고, 정서적 요구를 차단하려는 정부의 고도전략일 수 있다고 반문한 것.


‘쓰촨 표현주의’의 차세대 주자로 꼽히는 투홍타오는 중국 불교의 성지인 아미산(山)의 나무들을 끈질기게 성찰한 끝에 표현주의적인 풍경화를 그려냈다. 여기에 무덤덤한 나무조각 한점도 곁들였다.

전통중국화의 테크닉, 즉 중국 송(宋)대 필법을 차용한 하오량은 일본 목판화인 우끼요에, 서양의 르네상스, 바로크적 장식까지 뒤섞어 전혀 새로운 그림을 선보이고 있다. 도무지 어울리지 않을 법한 요소들을 감각적으로 융합하거나 섬세하게 재해석해내는 능력은 가히 독보적이다. 


젊은 여성 작가 마치우샤는 예리한 면도칼을 입에 물고, 마치 질풍노도처럼 달려가는 중국 사회 속 위태로운 개인의 삶을 들려준다. 8분 길이의 영상 속에서 마치우샤는 거의 강압적이었던 중국의 산아제한 정책 때문에 외동이로 태어나, 부모의 과도한 기대를 감내해야 했던 자신의 어린 시절을 고백한다.

마지막 장면에서 작가가 입 속 면도칼을 꺼내 보이는 모습은 매우 충격적이다. 왜 ‘면도칼 퍼포먼스를 했느냐?’는 질문에 마치우샤는 “면도칼은 나와 비슷한 처지의 또래 세대가 감내해야 했던 정신적 신체적 고통을 상징한다. 그런데 중국인들은 면도칼을 입에 물고 있어 몹씨 어눌한 내 어투를, 외국인들은 내가 들려주는 이야기에 집중해 같은 작업인데도 반응이 너무도 달랐다”고 했다.


이밖에 캐나다 출신의 중국 화가 황징위엔은 동서양 인물을 뒤섞은 괴상한 여성에, 중국 사회의 감춰진 성(性)풍속도를 흥미롭게 곁들이고 있다.

결국 1970~80년대에 태어난 8명의 작가는 직설적으로 세태를 비판하기 보다,한바퀴 슬쩍 돌려 은근히 저항하고 있는 것이 공통점이다. 거대담론에 비켜서 있는 듯하지만 일상에서 우러나온 이들의 미시적 비판과 내밀한 풍자는 오늘 우리에게 좀더 친근하게 다가오고 있다. 전시는 7월25일까지. 출품작은 회화, 조각·설치, 영상 등 60여점. (02)724-1524 . 사진제공=학고재 갤러리

이영란 선임기자/yrlee@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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