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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고흐 “슬픔은 왜 나한테만” 펑펑 울었다, 고작 2평 다락방에서[이원율의 후암동 미술관-오베르 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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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시 바람을 쐽니다. 의자를 밀어넣고 밖으로 갑니다. 글과 그림으로 다룬 미술사의 '현장'으로 직접 나섰습니다. 그곳에서 떠오른 화가와 그림, 이야기를 전합니다. 그곳의 분위기를 담은 사진도 함께 보냅니다. 현장의 공기와 함께 부치는 '미술 편지'입니다.
빈센트 반 고흐, 까마귀가 나는 밀밭(일부 확대)

〈오베르 동행자 : 빈센트 반 고흐, 테오 반 고흐〉

[헤럴드경제(오베르쉬르우아즈)=이원율 기자]주변이 온통 고흐(1853~1890)였다. 어딜 봐도 고흐의 그림이 떠올랐다. 야생화와 언덕, 흙과 담장 모두 캔버스에서 튀어나온 듯했다. 쏟아지는 햇살에선 노란색 물감이 튀길 기세였다. 이 정도 풍경이면 비쩍 마른 고흐가 불쑥 나타나도 놀라지 않았을 터였다. 프랑스 북중부에 있는 오베르 쉬르 우아즈(Auvers-sur-Oise)는 웬만한 곳은 걸어서 갈 수 있을 만큼 작은 마을이다. 특별할 게 없던 이곳은 고흐가 생을 마감한 데 따라 미술계의 성지로 자리매김했다.

프랑스 오베르 쉬르 우아즈 모습. [@hyem_pics]

이곳은 최후의 도시인 양 고요했다. 사람들은 느릿느릿 일상을 꾸려갔다. 낯선 여행객들 틈으로 무심하게 저마다 할 일을 했다. 두어 집의 창문에선 고소한 음식 향이 담긴 하얀 김이 올라왔다. 고흐 또한 무척이나 동경한 페르메이르의 정적인 델프트 그림 속에 와있는 듯했다. 파리 개선문에서 버스로 한 시간여를 달려온 이 마을은 모든 게 복잡하게 뒤엉키는 그 도시와는 다른 세계였다.

프랑스 오베르 쉬르 우아즈 모습(자킨의 고흐 조각상). [이원율 기자]
프랑스 오베르 쉬르 우아즈 모습(자킨의 고흐 조각상). [@hyem_pics]

버스는 오베르 고흐 공원에서 멈췄다. 내리자마자 보이는 건 1961년 자킨이 만든 고흐 조각상이다. 실물 크기에 가까운 이 작품은 고흐를 과장해서 묘사했다. 표정은 어디에 홀린 양 퀭하다. 행색도 초췌하다. 화구를 촌스럽게 둘러멘 채 멍하니 선 모습이다. 청동상일 뿐이지만 비바람이 몰아치면 우산을 씌워주고 싶을 만큼 안쓰럽다. 고흐 조각상을 한참 바라보다 고개를 돌렸다. 진한 바람이 불었다. 꺽다리 나무와 풀이 일렁였다. 벽돌집과 돌담에 탄 담쟁이도 출렁였다. 제법 큰 새들이 하늘을 가로질렀다. 정말, 이 마을은 온통 고흐였다.

고흐의 마지막 화혼, 이곳에서 일렁였다
프랑스 오베르 쉬르 우아즈 모습. [@hyem_pics]

고흐는 1890년 5월 21일 오베르에 왔다. 37살이었다. 평생 4개국에서 38차례 주소를 옮기며 산 그의 마지막 둥지였다. 이곳은 파리와는 적당히 먼, 조용하고 순한 사람들이 모여 사는 전원도시였다. 고흐는 오베르를 마음에 쏙 들어했다. 고흐는 자연이 안겨주는 생명력에 들떴다. 고흐는 동생 테오와 어머니, 고갱에게 "오베르는 그림을 그리며 지내기 참 좋은 곳이야!"라는 내용의 편지를 부쳤다. 테오에게 따로 쓴 편지에선 "오베르는 정말 아름다워. 정말로! 여기는 그림처럼 전형적인 전원이 펼쳐진 진정 아름다운 곳이야!"라며 아이처럼 기뻐했다.

프랑스 오베르 쉬르 우아즈 모습.[@hyem_pics]
프랑스 오베르 쉬르 우아즈 모습.[@hyem_pics]

사실, 그 시절 고흐는 잘 몰랐을 수 있지만 그의 주변인은 다 아는 게 있었다. 고흐에게 오베르마지막 기회라는 것이다. 고흐가 거장 반열에 드는 건 그가 죽고 난 후에도 수년이 흐른 뒤다. 오베르 땅을 막 밟은 그때의 고흐는 가난하고 능력 없는 실패자였다. 이곳에서조차 적응 못하고 스러지면 더는 답도, 희망도 없는 인생의 패배자가 될 터였다. 고흐는 무엇보다 이곳에서 광기를 잠재워야 했다. 오베르로 오기 1년 전 고흐가 있던 곳은 생레미 정신병원이었다.

1889년 5월 3일에 제 발로 들어간 정신병원에서 고흐는 긴 암흑기를 겪었다. 그만큼 고흐의 상태는 불안했고, 때로는 위험했다. 공황과 발작을 지긋지긋하게 반복했다. 정신병원 담 너머를 즐겨보던 고흐는 종종 프랑스 남부에 있는 아를을 떠올렸다. 아를은 고흐가 정신병원에서 통제받기 직전 있던 동네였다. 한때 고흐에게 아를은 이상향이었다. '미친 짓'이라고밖에 말할 수 없는 그 일을 저지르기 전까지는.

빈센트 반 고흐, Self-Portrait with Bandaged Ear

1888년 2월 20일. 그러니까 정신병원에 들어가기 1년여 전, 막 30대 중반이 된 고흐는 이날 아를에 도착했다. 넝마 같은 짐가방과 함께였다. 파리의 북적임에 적응할 수 없던 고흐가 기차로 16시간을 달려 온 도시였다. 고흐는 아를의 자연에 경탄했다. 이 마을에서 평생 꽃과 나무만 그리고 살아도 좋을 것 같았다. 그러나 일이 터졌다. 같이 살던 화가 고갱과 다툰 뒤 홧김에 면도칼로 자기 귀를 자른 것이다. 한술 더 떠 그 귀를 거리의 여인에게 선물했다. 프러포즈 반지라도 되는 양 곱게 포장한 채. 맨정신으로는 할 수 없는 짓이었다. 이는 고흐가 생레미 정신병원을 찾은 직접적인 이유였다. 스스로 정신병원 문을 두드려야 했던 고흐는 창살 너머의 아를을 추억하고 나면 틀림없이 소리 내 흐느꼈다. 그 울음에 병원 직원과 환자 모두 잠을 설칠 정도였다.

프랑스 오베르 쉬르 우아즈 모습. [이원율 기자]

정신병원에서 퇴원한 고흐에게 아를이 아닌 오베르를 권한 이는 테오였다. 당시 오베르는 화가들의 요양지 중 한 곳으로 거론되던 곳이었다. 고흐는 아직 파리를 견딜 만한 상태가 아니었다. 고흐는 여전히 불안정했다. 외톨이였고, 매번 실패하는 화가였다. 늘 돈에 쪼들렸다. 그림은 도저히 팔리지 않았다. 조울증과 강박증 등이 끊임없이 고개를 드는 통에 주변 사람들도 지쳐 떠나갔다. 사실 고흐는 아를로 돌아갈 수 없는 상태였다. '귀 사건' 이후 아를 사람들은 고흐라고 하면 치를 떨었기 때문이다.

곳곳이 ‘고흐 박물관’…시간은 그 시대, 거기서 멈췄다
빈센트 반 고흐, Stairway at Auvers
프랑스 오베르 쉬르 우아즈 모습. [@hyem_pics]

오베르를 걷다 보면 고흐의 흔적을 곳곳에서 볼 수 있다. 마을 전체가 고흐 미술관이 된 느낌이다. 건물 중 상당수는 '고흐가 그렸다', '고흐가 이곳에 있었다'는 식의 문장이 담긴 팻말을 품고 있다. 산책로가 단조로운 만큼, 하나씩 천천히 읽으면서 움직여도 헤맬 일이 없다. 걷다 보면 오베르 교회와 시청, 우아즈강변 등을 마주할 수 있다. 모두 고흐가 보고, 들어가고, 지나친 곳이다.

오베르는 시간이 멈춘 마을이다. 피 튀기는 2차 세계대전 때도 폭격을 피한 지역이다. 프랑스의 다른 지역들과 달리 총칼의 할큄이 없었다. 도시를 재정비할 필요도 없었다. 오베르의 이 길은 그때와 그대로다. 흔히 마주할 수 있는 낡은 나무 문과 오래된 유리 창문 모두 그 시절의 유물이다. 발길에 차여 굴러가는 돌 중에선 고흐의 흐느낌을 들은 녀석이 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빈센트 반 고흐, 오베르 교회
프랑스 오베르 쉬르 우아즈 모습(오베르 교회). [이원율 기자]

그림 말곤 할 일도, 만날 사람도 없던 외톨이 고흐는 오베르에 머문 근 70일 사이 작품 75여점을 그렸다. 하루에 하나 이상 완성한 격이다. 평생 그린 작품이 250여점(편지에 쓰인 습작과 스케치를 포함하면 870여점)이라고 하니, 마지막 화혼을 제대로 끌어낸 셈이다. 고흐는 생을 마감하기 1개월쯤 전 '오베르 교회'를 완성했다. 13세기에 고딕 양식으로 세워진 뒤 지금껏 그 자리에 있는 건물이다. 고흐는 하늘과 교회가 마치 타오르는 것처럼 표현했다. 두 갈래로 갈라지는 길도 진흙의 격류 같다. 누군가는 아버지의 바람이던 목사가 되지 못한 데 대한 죄책감에 교회 앞모습을 그리지 못했다고 본다. 두 갈래의 길 또한 하나는 화가의 길, 또 하나는 가지 못한 종교인의 길이라고 설명키도 한다.

빈센트 반 고흐, 오베르 시청
프랑스 오베르 쉬르 우아즈 모습(오베르 시청). [@hyem_pics]

고흐는 비슷한 시기에 '오베르 시청'도 화폭에 옮겼다. 고흐는 시골의 평범하고 작은 관공서를 특유의 꼬불꼬불한 선과 강렬한 색채로 표현했다. 이 건물 또한 그때부터 지금까지 그림 속 모습과 큰 변화 없이 자리에 서 있다. 고흐는 이 밖에 오베르의 평범한 집과 정원, 밀밭, 골목길도 정성껏 표현했다. 고독한 고흐는 테오도 오베르로 오길 바랐다. 자신의 그림 속 오베르에 감탄해 함께 전원생활을 하길 원했다. 그래서 오베르의 아름다운 면을 찾고 이를 부각하는 데 더 열중했다.

빈센트 반 고흐, Portrait of Dr. Gachet

고흐는 오베르로 온 후 새벽 5시에 눈을 뜬 직후부터 밤 9시까지 붓과 캔버스를 놓지 않았다. 이 마을에서 친해진 의사 가셰 박사는 고흐에게 "그림 그리기에 열중하는 게 되레 건강에 도움을 줄 수 있다"며 작품 활동을 격려했다. 식사는 빵과 치즈, 우유 정도였다. 극소량의 음식을 천천히 씹어먹었다. 이는 찰스 디킨스가 극단적 선택 예방에 도움이 된다고 한 처방과 동일하다. 고흐가 디킨스의 이런 신념에 영향을 받았는지는 분명치 않다.

고작 2평짜리 방에서…마지막 손님이 그였다
빈센트 반 고흐, Thatched Cottages and Houses
프랑스 오베르 쉬르 우아즈 모습. [@hyem_pics]

고흐가 오베르로 온 뒤 묵은 라부 여인숙을 둘러봤다. 이곳은 고흐가 생을 마감한 곳이기도 하다. 라부 여인숙은 오베르 시청 바로 길 건너편에 있다. 삐걱대는 나무 계단을 올라 고흐의 마지막 방을 봤다. 5번 다락방이다. 화가 이중섭이 지낸 제주도 셋방이 떠올랐다. 그만큼 턱없이 좁고 말도 안 될 만큼 비루했다. 크기는 고작 2평(약 6㎡). 침대 하나 넣기에도 버거운 곳이었다. 지금은 의자 하나 빼곤 아무런 가구나 장식도 없는 상태였다. 비스듬히 기울어진 천장에 달린 작은 창문만이 조명과 환기 역할을 애써 해냈다.

이 방에 온 여행객들은 지금에선 위대한 화가 중 한 명으로 칭해지는 그의 마지막 안식처에 탄식할 뿐이었다. 누군가는 펑펑 울고, 심지어 기절까지 한다는 이야기도 들은 적 있다. 고흐의 방 별칭은 '자살자의 방'이다. 프랑스 풍습에 따라 고흐가 죽은 뒤 한 번도 임대된 적이 없다. 고흐가 이 방에서 마지막으로 묵은 사람이다.

현재 벨기에 출신 사업가인 얀센이 라부 여인숙을 소유·관리하고 있다. 1987년 당시 35만7000달러를 주고 이곳을 산 얀센은 6년간 700만유로를 들여 대대적 수리를 했다. 고흐 애호가인 얀센은 그가 있던 당시 모습을 유지하기 위해 낡은 이 건물에 대한 보수를 이어가고 있다. 고흐의 방에 고흐의 진짜 작품을 하나 이상 걸어두는 게 목표라고 한다. 이른바 '세상에서 가장 작은 미술관 만들기 프로젝트'다.

빈센트 반 고흐, Houses at Auvers
프랑스 오베르 쉬르 우아즈 모습. [@hyem_pics]

고흐가 원래 소개받은 곳은 라부 여인숙이 아니었다. 가셰가 권한 곳은 더 큰 숙소였다. 고흐는 이를 거절했다. 테오에게 돈을 타서 생활하는 상황에서 쾌적한 곳에 머무는 건 맞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고흐는 라부 여인숙에 하루 3.5프랑을 냈다. 1프랑은 방값, 2.5프랑은 식대였다. 고흐는 테오에게 하루 생활비로 5프랑을 지원받는 상태였다.

당시 고흐에게 달라붙은 비루함은 라부 여인숙에서의 생활상으로도 짐작할 수 있다. 고흐는 라부 여인숙의 식당에서 밥을 먹을 때 종종 주인 몰래 식탁보를 잘랐다고 한다. 캔버스를 살 돈이 없어 이를 대신 썼다는 이야기다. 고흐는 라부 여인숙에 머물며 12살 소녀 아델린의 초상화를 3점이나 그리기도 했다. 라부 여인숙 주인장의 딸이었는데, 모델을 구할 돈이 없던 고흐가 애원한 끝에 허락받은 것이다.

빈센트 반 고흐, 아델린 라부의 초상화

고흐가 그린 아델린 초상화 3점은 그대로 남아있다. 지금이야 고흐가 초상화를 그린다고 하면 오베르를 뒤덮을 만큼 사람이 몰리겠지만, 그때 고흐는 아델린에게 "나랑 닮지 않았어요. 그림이 실망스러워요!"라며 혼만 났다. 그 말에 쩔쩔매는 고흐, 잔뜩 화가 난 당돌한 소녀가 있는 장면을 이날 라부 여인숙을 돌아보며 생생하게 떠올릴 수 있었다. "어느 날 오후, 그는 단숨에 내 초상화를 그렸다. (…) 나는 파란색 옷을 입고 의자에 앉았다. 파란색 리본으로 뒷머리를 묶었다. 내가 파란 눈을 가졌기에 그는 초상화의 배경을 파란색으로 칠했다. 초상화는 파란색의 교향곡이었다." 아델린은 1956년에 펴낸 에세이에서 당시 상황을 자세하게 알려줬다.

빈센트 반 고흐, Child with Orange

고흐는 순수한 어린아이들을 좋아했다. 아델린은 고흐에 대해 "두 살 된 제 여동생과 놀기를 좋아한 부드럽고 침착했던 사람이었다"라고도 했다.

‘까마귀가 나는 밀밭’ 한가운데 서다
빈센트 반 고흐, The Plain of Auvers
프랑스 오베르 쉬르 우아즈 모습. [@hyem_pics]

오베르 교회 오른쪽으로, 아무렇게나 잎을 뻗고 있는 야생화와 풀들 사이 길을 걸어간다. 오베르에서 가장 유명한 곳이 눈에 들어온다. 들판이다. 고흐가 최후작 중 하나인 '까마귀가 나는 밀밭'을 그린 그곳이다. 하늘과 땅 모두 탁 트인 풍경이다. 늦은 밤에 찾았다면 분명 고흐도 본 그 별들이 수 놓일듯 했다. 밭에 깔린 황금색 밀 줄기가 바람에 쓸려 파도 소리를 냈다. 들판에선 고흐의 밀밭 그림이 담긴 팻말도 볼 수 있다. 고흐가 이젤을 세워놨을 법한 지점을 분석해 꽂아놓았다고 한다. 이날 시기가 맞지 않았는지 까마귀는 보지 못했다.

고흐는 이곳에서 바람에 흔들리는 밀밭을 자주 그렸다. 그가 즐겨 쓴 노란색, 그가 애용한 임파스토(impasto·유화에서 물감을 겹쳐 두껍게 칠하는 기법)를 마음껏 펼칠 수 있는 소재로 밀밭을 택한 게 아닐까 한다. 고흐는 어머니에게 부친 편지에서 오베르의 들판을 놓고 "흰색, 분홍색, 보랏빛으로 어우러진 푸른 하늘 아래 감자꽃이 피어있어요. 온화한 연보랏빛과 아주 부드러운 노란색과 연한 녹색의, 바다처럼 넓은 구릉을 배경으로 펼쳐진 초원에 완전히 빨려 들어갔어요"라고 했다.

빈센트 반 고흐, 까마귀가 나는 밀밭

고흐의 '까마귀가 나는 밀밭'은 농로가 세 갈래 길로 갈라지는 밀밭 가운데쯤에서 탄생했다. 누군가는 고흐의 이 작품에서 광기를 본다. 물감 섞는 일 자체를 망각한 듯 마구 칠해버린 형식, 위협적인 까마귀, 태풍처럼 요동치는 하늘과 화염처럼 이글대는 밀밭을 근거로 한다. 고흐가 이 작품을 통해 자기 죽음을 예고했다는 분석도 많다. 그런 사람들은 세 갈래 길에 주목한다. 왼쪽 길저버린 종교인의 길, 가운데 길실패한 화가의 길, 오른쪽 길은 그가 고통받은 종교와 예술이 아닌 가보지 못한 제3의 길을 뜻한다고 분석한다. 이 세 갈래 길 중 가운데 길이 중간에 뚝 끊겨있는 게 죽음을 암시한다는 의견이다. 다만, 일각에선 고흐가 이 작품을 통해 외려 생의 의지를 불태웠다는 말도 내놓는다. 자연이 품은 요동치는 생명력을 그대로 옮겼다는 이야기다.

빈센트 반 고흐, 까마귀가 나는 밀밭(일부 확대)

고흐의 진짜 뜻은 알 수 없다. 다만 고흐가 쓴 편지에는 "나는 밀밭을 그리려고 애쓰고 있지만 제대로 스케치할 수가 없어. 청록색 줄기, 리본처럼 가느다란 잎사귀, 먼지로 인해 꽃망울이 생기를 잃고 노란색으로 변하는 밀 이삭을 겨우 그렸어"라는 문장이 있다. 그가 심혈을 기울여 그렸다는 점만은 확실한 것이다.

프랑스 오베르 쉬르 우아즈 모습. [이원율 기자]
프랑스 오베르 쉬르 우아즈 모습. [@hyem_pics]

1890년 7월 27일. 고흐는 이 들판에서 총상을 입고 쓰러졌다. 들판 한 가운데 서 있으면 탕, 하는 총소리에 깜짝 놀란 새 무리가 우르르 날아가는 모습을 쉽게 상상할 수 있다. 고흐는 그 자리에 픽 쓰러져 잠시 정신을 잃었다. 이내 다시 눈을 떴다. 고흐는 라부 여인숙까지 혼자 걸어왔다. 피를 뚝뚝 흘리면서. 거리는 약 1㎞였다.

“왜 나한테만 슬픔이”…비석 위, 해바라기 놓였다
프랑스 오베르 쉬르 우아즈 모습. [이원율 기자]

피투성이로 온 고흐는 2평짜리 다락방에서 끙끙댔다. 열은 펄펄 끓었다가 가라앉는 등 널뛰었다. 여관 사람들이 의사 두 명을 데려와 복부 쪽에 박힌 총알을 뺐다. 그 사이 가셰도 왔지만 그는 외과 수술 반대론자여서 총알을 빼는 데 관여하지 않았다고 한다. 고흐가 총상을 입은 다음 날에 테오가 허겁지겁 도착했다. 이 광경을 본 아델린은 테오에 대해 "슬픔으로 일그러져 있었다"고 기억했다. 경찰은 고흐에게 무슨 짓을 했느냐고 물었다. 고흐는 권총을 자기 가슴에 겨누고 방아쇠를 당겼다고 했다.

고흐는 나아지는 듯 싶었다. 테오가 온 날에는 물도 마셨다. 파이프 담배도 피웠다. 문제는 2차 감염이었다. 상처가 덧난 고흐는 급격히 약해졌다. 테오가 고흐의 머리를 안아 올렸다. 고흐는 갈라진 목소리로 "왜, 왜 나에게만 슬픔이 계속돼?"라고 울먹였다. 눈물이 수염투성이 두 볼을 타고 계속 흘러내렸다. 총에 맞은 뒤 이틀 후인 7월 29일 오전 1시 30분, 고흐는 영영 눈을 감았다. 테오에게 안긴 채였다. 테오와 고흐를 떼어내는 데는 긴 시간이 걸렸다.

테오는 일기장에 고흐가 죽기 직전 "난 왜 이렇게 잘하는 게 없지? 스스로 총을 쏘는 일마저도 실패했어"란 말을 했다고 기록했다. 지역 언론은 빈센트 반 고흐라는 37세 화가가 극단적 선택을 해 죽었다고 썼다. 단신이었다. 고흐는 죽을 때까지 무명 화가였다. 테오는 고흐가 죽은 직후부터 시름시름 앓기 시작했다. 1년도 안 돼 형을 따라 세상을 떠났다.

빈센트 반 고흐, 나무 뿌리들(고흐의 마지막 작품으로 알려져 있다)
1905년 무렵의 엽서 속 사진과 고흐의 그림 '나무 뿌리들'에 나온 부분을 합성한 장면. [반 고흐의 집]

실패한 화가의 생을 비관한 고흐가 총을 들고 극단적 선택을 했다는 게 정설이지만, 사실 고흐의 죽음을 놓곤 의견이 분분하다.

당시 고흐만 보이면 괴롭히던 불량 청년들의 총기 사고라는 말이 있다. 고흐는 “내가 극단적 선택을 행했다”고 밝혔지만, 이 또한 불량 청년들을 배려하기 위해 거짓말을 했다는 것이다. 고흐는 사고를 겪기 직전 어머니에게 부친 편지에서 "저는 앞으로도 외롭게 살아가겠지요. 제가 사랑했던 사람들조차도, 늘 유리를 통해 바라보듯 희미하게만 느껴져요"라고 했다. 외롭고 쓸쓸했던 고흐는 총을 맞고서 '차라리 잘 됐다. 내가 모두 안고 사라져주겠다'라고 체념할 수 있는 상태였던 것이다. 고흐의 죽음에 대한 논쟁은 현재 진행형이다.

프랑스 오베르 쉬르 우아즈 모습. [이원율 기자]

고흐와 테오의 무덤은 '까마귀가 나는 밀밭'과 가까운 공동묘지에서 볼 수 있다. 이들의 무덤을 찾기는 쉽지 않다. 바로 알아볼 수 있는 '특별 대우'는 없다. 한쪽 벽에 작은 비석 두 개가 나란히 세워졌는데, 그곳에 쓰인 이름을 보고 나서야 두 사람이 여기에 잠들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사실 테오는 고흐가 죽자 오베르 교회에서 장례 예배를 요청하는 등 보다 그럴듯한 장례 절차를 계획했다. 하지만 교회 측이 "고인은 극단적 선택을 한 사람이라 곤란하다"며 거부해 무산됐다.

프랑스 오베르 쉬르 우아즈 모습(고흐의 묘비). [이원율 기자]
프랑스 오베르 쉬르 우아즈 모습(고흐와 테오의 묘비). [이원율 기자]

고흐의 비석 앞에는 그의 팬이 그린 것으로 보이는 고흐의 초상화가 함께 놓여 있었다. 영원히 시들지 않는 해바라기 조화, 가셰 집에 있던 것을 가져와 심어둔 담쟁이넝쿨 등이 비석 주변을 덮고 있었다. 묘지는 고요하고 조용했다. 광기의 삶을 산 고흐가 조용히 잠들기에 적격으로 느껴졌다. 멍하니 서 있는데 다른 여행객 무리가 묘지에 대고 고개를 숙였다. 그들과 함께 두 손을 모으고 묵념했다.

오베르 쉬르 우아즈
'우아즈강 강가에 있는 오베르 마을'이라는 뜻을 갖는다. 프랑스 일드프랑스지방 발두아즈주에 있는 기초자치 행정구역이다. 파리 중심부에서 북서쪽으로 27.2㎞ 떨어진 교외 마을이다. 아름다운 환경, 평화로운 분위기 덕에 19세기에는 많은 화가가 오베르를 거쳐 갔다. 고흐 외에도 세잔, 도비니, 피사로 등이 오베르에 일정 기간 머물렀다. 오베르 내 우아즈강과 언덕 사이 마을, 교회 근처 들판 등은 건축·도시·경관 문화 보호구역으로 지정돼 있다. 파리 북역을 통해 가는 방법 등이 있다. 주말보다 평일 추천. 낮보다는 아침이나 저녁 추천.

〈후암동 미술관 이론 편〉

1)천사가 이렇게까지 운다고? 무섭게 왜 그래[후암동 미술관-조토 편] - 르네상스 선구자(2022. 7. 2.)

2)뻥 아냐, 600년전인데 이 정도 ‘입체 그림’ 있었다[후암동 미술관-마사초 편] - 원근법 선구자(2022. 8. 27)

3)세계서 가장 유명한 이 ‘레이저 눈빛’, 그것은 사랑?[후암동 미술관-얀 반 에이크 편] - 유화 선구자 (2022.5.21.)

4)‘레드벨벳’도 춤추게 한 이 화가의 정체…"악마의 아들? 나 원 참" [후암동 미술관-보스 편] - 초현실주의 선구자 (2022.5.28.)

5)아리따운 금발 여인, 외간남자 목을 베고 있는거야?[후암동 미술관-카라바조 편] - 바로크 선구자 (2022.6.11.)

6)표류 D+13, 왜 몰랐지? 뗏목 위 널린 게 먹을건데[후암동 미술관-테오도르 제리코 편] - 낭만주의 선구자 (2022.5.14.)

7)“천사요? 데려오면 그려드리죠” 이놈의 똥고집[후암동 미술관-귀스타브 쿠르베 편] - 사실주의 선구자 (2022.5.7.)

8)벌거벗은 이 여자, 뭐 때문에 빤히 쳐다보나[후암동 미술관-에두아르 마네 편] - 인상주의 선구자(2022. 4. 23.)

9)“못 그렸는데 폼만 잡아” 욕먹던 이 그림, 3300억이요? [후암동 미술관-클로드 모네 편] - 인상주의 선구자⑵ (2022.4.30.)

10)‘점투성이’ 수상한 커플 정체는? [후암동 미술관-조르주 쇠라 편] - 신인상주의 선구자 (2022. 6. 25.)

11)반 고흐 최애작, 별밤·해바라기 아닌 ‘이 사람들’ [후암동 미술관-빈센트 반 고흐 편] - 표현주의 선구자 (2022.6.4.)

12)이 ‘사과’ 때문에 세상이 뒤집혔다, 도대체 왜?[후암동 미술관-폴 세잔 편] - 근대 회화 선구자(2022. 7.9.)

13)화끈한 키스, ‘이 여성’ 사르르 녹아내리다[후암동 미술관-구스타프 클림트 편] - 빈 분리파 선구자 (2022. 8. 13.)

14)나체 여인, 어쩌다 사자 득실대는 정글 한복판에[후암동 미술관-앙리 루소 편] - 근대 초현실주의 선구자 (2022. 7. 30.)

15)당신은 모르실거야, 키스하는 두 사람 왜 이 꼴인지[후암동 미술관-르네 마그리트 편] - 근대 초현실주의 심화편 (2022. 9. 3)

16)헐크색 피부 갖게 된 ‘이 여성’…이 놈의 ‘남편’ 때문에[후암동 미술관-앙리 마티스 편] - 야수주의 선구자 (2022. 7. 16.)

17)피카소도 ‘이 그림’에 “대박!” 감탄, 각성했다는데[후암동 미술관-피카소·마티스 편] - 야수주의·입체주의 심화 편 (2022. 9. 10)

18)잘생긴 법학 교수님, ‘이것’ 그렸더니 미술계 '발칵'[후암동 미술관-바실리 칸딘스키 편] - 추상회화 선구자 (2022.7. 23.)

19)“이건 나도 그리겠다!” 1순위 그림, 그 놀라운 비밀[후암동 미술관-몬드리안 편] - 추상회화 선구자⑵ (2022. 8. 6.)

20)권총도 채찍도 버텼는데, ‘이 남자’ 행동에 무너졌다[후암동 미술관-마리나 아브라모비치 편] - 행위예술 대모 (2022. 8. 20.)

〈후암동 미술관 출장 편〉

1)이건희 컬렉션, 이 ‘다섯 작품’ 놓치지 마시라[후암동 미술관-‘어느 수집가의 초대’ 출장 편] - 전시 특집 (2022. 6. 18.)

2)알코올 중독 ‘이 남자’, ‘파리’에 미치자 놀라운 일 터졌다[후암동 미술관-몽마르트 언덕 편] - 동행자 : 위트릴로 (2022. 9. 17.)

3)고흐 “슬픔은 왜 나한테만” 펑펑 울었다, 고작 2평 다락방서[후암동 미술관-오베르 편] - 동행자 : 반 고흐(2022 9. 24.)

yul@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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