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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딸은 남편감으로 공무원이 싫대요”…공직 보람 컸지만 가족에겐 늘 미안
가장으로서, 금융인으로서의 박회장
IMF·카드사태·靑 근무 ‘일복’ 타고나
기업은 이윤 뿐 아니라 사회적 역할 중요

“딸에게 남편감으로 정부부처 후배를 추천했더니 ‘공무원은 아빠로 족해’란 말을 들었어요. 가족에겐 항상 미안합니다”

박재식 저축은행중앙회 회장은 지난 1982년 행정고시에 합격한 후 줄곧 재정경제부 등 경제부처에서 일했다. 1980년대는 국가 경제에서 차지하는 정부 역할이 지금보다 컸다. 밤낮 없이 일을 해야했다. 1990년대에는 70~80년대 이뤘던 고도성장의 후유증이 곳곳에서 나타나기 시작했고, 1997년엔 급기야 IMF 외환위기가 터졌다. 당시 박 회장은 증권사와 투신사 구조조정 실무를 도맡았다.

“하나 터지면 하나가 또 터지더군요. 동서, 고려증권이 망하더니 국민투신, 한남투신 등이 줄줄이 나가 떨어졌어요. 정말 그때 힘들게 일했던 기억이 나요. 토요일, 일요일 출근은 당연했고 매일 자정에야 퇴근했었죠. 믿으실 지 모르겠지만 당시만 해도 ‘나라경제는 우리가 책임진다’는 사명감이란 게 있었죠”

실장, 국장은 물론 전 경제부처 공무원이 매일 야근을 해야하는 상황이었다. 박 회장은 대부분 공무원이 건강이상을 호소하던 시절이라고 회상했다. 구조조정이 일단락 되던 1998년 8월 워싱턴 파견을 나가기 전까지 1년 이상을 쉬는 날이 사실상 없이 일한 셈이다.

“솔직히 몸에 문제가 생길 것 같았는데, 마침 해외근무 발령이 났죠”

워싱턴 근무기간, 그래도 국내에서보다는 가족과 보내는 시간이 많았다. 지금도 그 때가 가족과 가장 많은 시간을 보냈던 때로 기억한다. 하지만 짧은 미국 근무 이후 국내로 복귀하자 ‘일복’이 또 터졌다. 2001년 국제금융국 국제기구과장 시절 9·11 테러가 일어났다. 한달 후로 예정됐던 국제통화기금(IMF)과 세계은행 연차총회가 모두 취소됐다. 국제기구과장 시절 업무가 모두 수포로 돌아갔다.

이어 금융정책국으로 자리를 옮겼다. 이번엔 박 회장을 덮친 것은 ‘카드사태’였다.

“당시만 해도 카드사가 돈을 많이 벌었다고 들어서 큰 걱정이 없었어요. 그런데 부임해서 보니 조짐이 이상하더니 이내 카드사들이 고꾸라지더군요. 비은행계열 카드 정상화하느라 정신 없는 시간을 또 보냈어요” 이후에도 참여정부 시절 청와대에서 정책조정 선임행정관으로 일하면서 그의 타고난 ‘일복’ 규모는 다시 입증됐다. 청와대 행정관은 주말은 물론 하루 근무시간이 25시간이라고 해야할 만큼 바쁜 곳이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2007년 스위스 제네바 국제연합 사무처에서의 근무였다. 박 회장은 스위스 근무 당시를 떠올리며 ‘가족과의 단란한 시간이었다’고 회상했다. 이후 박 회장은 2009년 지식경제부 우정사업본부 보험사업단장, 2011년 기획재정부 국고국장, 2012년 금융정보분석원 원장을 끝으로 공직생활을 마감했다.

박 회장은 자본시장 부문에서의 오랜 경험을 인정받아 2012년 한국증권금융 대표이사로 민간에 데뷔했다. 민간에서의 첫 묘수도 이 때 나온다. 당시 증권금융 내에 고객만족서비스 부문을 한국증권꿈나눔재단으로 개편한 것이다. 장학금이나 생활자금을 지원하는 사회공헌이 대부분이던 때 경제관련 법률구조를 돕는 활동을 벌였다. 당시로서는 획기적인 접근이었다.

“30년간 공직생활을 하다다보니 기업의 목적이 이윤추구만은 아니라는 생각을 늘 했어요. 사회적 역할도 다해야죠. 금융회사면 그에 걸맞는 사회공헌 활동을 하는 게 의미가 더 크지 않을까 싶었어요”

요즘 박 회장에 가장 자주 드는 생각은 가족에 대한 미안함이다. 인터뷰 중에도 가족에게 항상 미안하다는 말을 하고 싶었다고 몇 차례 반복했다.

“저야 일을 하면서 그래도 명예란 걸 느꼈지만, 가족들은 그 과정에서 무얼 느꼈을까 생각해보면 제가 얼마나 소홀한 아빠이자 남편이었었는지 되돌아보게 되요. 항상 미안한 마음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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