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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최영미 시인의 심플라이프] 그녀를 위한 변명

“대중과 언론은 맨 앞에 선 사람들만 기억한다. 그러나 뒤에서 이들을 밀어준 사람들이 없었다면 대오는 한 발짝도 전진하지 못했을 터. 역사 속으로 사라진 사람들, 그때 그 시절에는 묻혔던 작은 목소리들을 복원해 또렷이 되살리고 싶었다.”

소설 ‘청동정원’ 개정판 뒤에 덧붙인 ‘작가의 말’에 나는 이렇게 썼다. 40년이나 지났지만 내 속에서 아직도 생생하게 살아있는 그때 그 시절을 되살리려 무진 애를 썼는데, 80년대를 모르는 2020년의 젊은이들이 많이 읽기를 바랐는데 이번에도 내 계산이 틀렸다. ‘청동정원’의 독자는 50대와 60대가 압도적이다. 젊은이들은 80년대에 식상해 관심이 없나 보다.

독자들의 반응은 엇갈렸다. “한국에서 쓰인 소설들 중 이토록 멋지고 역동적이고, 눈을 떼기 어려운 모험담을 읽어본 적이 없다”는 과분한 칭찬도 있었지만 거북한 말도 들었다.

주인공 애린이 너무 순종적이다, 왜 그런 (폭력적인) 남자에게서 벗어나지 못하고 결혼까지 했냐는 후배의 비판이 오래 가슴에 남았다. 80년대 끝자락 학번인 그녀에게 “그게 이해 안 되니? 그럼 네가 운이 좋은 줄 알아. 너희 부모님에게 감사해라.”라고 말하며 나는 전화를 끊었다.

대학에 들어와 여자 선배들에게 페미니즘을 배웠지만, 유난히 순종적인 어머니 밑에서 자란 애린은 자신의 머리와 가슴을 통일시키지 못한다. 여자 선배들이 주입시킨 여성해방론은 “동혁이랑 몸을 섞었으니 결혼해야 한다”는 엄마의 ‘책임론’ 앞에서 힘을 쓰지 못했다. 의존적이고 순해터진 문학소녀가 자신의 목소리를 내는 작가로 성장하는 과정을 다루며 나는 나를 이해했다.

나는 애린처럼 순종적인 여자는 아니었지만 갈피마다 내 입김이 들어간 소설. ‘청동정원’을 읽으면 왜 나처럼 모자란 사람이 미투를 할 수밖에 없었는지 알게 되리라.

페미니즘은 글로 배운다고 바로 체득되는 게 아니다. 한국처럼 봉건적인 잔재가 강한 사회에 사는 여성들 누구도 시대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 80년대에 가장 진보적인 여성이라도 2020년 평범한 보통 여성의 성인지감수성을 따라가지 못한다.

이념과 현실의 갭이 너무나 커서 애린은 비틀거렸고, 추락했다 다시 살아났다. 밑바닥까지 내려간 그녀가 의지한 건 책이었다.

그녀처럼 남편에게서 학대당했던 여성들의 “나는 나”라는 외침. 콜론타이나 전혜린처럼 앞서간 여성들의 삶이 큰 힘이 되었다. 나도 그녀처럼 되고 싶어. 나는 그녀처럼 자의식 과잉의 지적 속물이 되지 않을래. 나혜석처럼 행려병자로 생을 마감하지 않으려고 나는 출판사를 차렸다.

이런저런 생각에 잠 못 이루는 요즘, 내 발등에 떨어진 가장 큰 일은 어머니 돌보기다. 수술 뒤 혼자 일어나 걷지 못하는 어머니를 운동시키고 먹이고 씻기고 기저귀 갈기.

병원에서 돌아와 늦은 점심을 먹고 나면 심신이 피곤해 글 한 줄 쓰기 힘들다. 국어교사 자격증이 있는데도 아버지의 반대로 교단에 서지 못한 내 어머니. 그 어머니의 한이 딸들에게 전해져, 그 어머니의 알 수 없는 모순이 내게 전해져, 또렷한 목소리로 나는 말할 수 있었다. 이제 더는 못 참겠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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