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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63년 ‘예인의 길’ 김덕수 “무대는 평생 도전”
63년 전통 외길…28일부터 음악극 ‘김덕수傳’
다섯 살에 새미로 프로 데뷔…사물놀이 창시자
“사물놀이는 전통의 창조적 계승…우리 풀뿌리 문화”
전통의 미래는 ‘글로벌 스탠다드’
김덕수의 일생을 그린 음악극 '김덕수전傳'을 앞 둔 사물놀이 창시자 명인 김덕수(68)가 과거를 회상하면서 독백하는 장면을 연기하고 있다. 박해묵 기자

[헤럴드경제=고승희 기자] “하나둘셋 하나둘셋 하나둘 하나둘” 손끝을 들어 올려 덩실덩실. “이렇게 둥글게 감기는 맛이지.” 오른손으로 시작해 왼손으로, 허공을 가로지르는 우아한 곡선 따라 발걸음도 사뿐사뿐. “우리는 걸으면 춤이 돼요. 둥글게 감는 신명, 그건 가장 한국적인 기질이자 우리만의 맛과 멋이에요.” 평생 걸어온 예인의 길, 그가 있는 곳은 어디든 무대이자 마당이었다. “뭣도 모르던” 다섯 살에 시작한 광대의 삶. 일흔을 앞둔 김덕수(68)의 눈은 청년처럼 빛이 났다.

“무대는 평생 도전이에요. 똑같은 곡을 연주해도 할 때마다 달라요. 나이에 따라 깨달음도 달라지고요. 무대에서 관객과 눈맞춤을 할 때 서로의 기운을 교감해요. 그 순간마다 표현하고자 하는 것이 달라져요. 오감을 열고 집중하는 거예요. 항상 도전해 어느 순간 자기 안의 벽을 깨는 거죠. 정진하지 않으면 깨지 못하고 멈춰있겠지만, 한 번 맛보면 계속 할 수밖에 없어요.”

다섯 살에 광대의 삶을 시작한 명인 김덕수는 1978년 “우리 민족의 풀뿌리”인 사물놀이를 창시했다. 그는 “사물놀이는 혁명적 발상이었다”며 “우리 전통을 창조적으로 계승한 것”이라고 말했다. 박해묵 기자

▶ 예인의 탄생…“사물놀이는 우리 풀뿌리 문화”=시계를 거꾸로 돌렸다. 흐릿한 꼬마 시절의 기억이라는데, 낡은 필름을 재생한 것처럼 아득한 풍경이 그려졌다. 1957년 추석 다음날, 조치원에서 난장을 텄다. “의용소방대를 만드는 기금 마련 공연”이었다고 한다. 다섯 살이던 그는 어른들과 똑같은 보수를 받으며 ‘프로’의 세계로 뛰어들었다. 다섯 살 김덕수는 인간탑 꼭대기에서 춤을 추는 무동이었다. ‘새미 덕수’의 탄생. “남사당이었던 아버지는 내가 태어날 때부터 지명했더라고요. 갓난아기 때부터 전통의 삶을 교육한 거죠. 그때는 뭘 알았겠어. 그런데 자기가 좋아하지 않으면 절대로 평생 하지 못해요.”

또래 친구들은 학교에 갈 때 그는 거리에 있었다. “항상 길 위에서 살았어요. 국내든 해외든. 좋은 것만 있던 건 아니었겠지. 모두가 그렇듯 시대와 함께 일상을 보낸 거예요.” 김덕수의 삶은 한국사의 결정적 장면들과 함께 한다. 한국전쟁 중 태어났고, 장구 신동이라 불리며 유년기를 보냈다. 전국 농악경연대회를 휩쓸던 스타였다. 농악대회에서 1등 상을 받으면 군인에게 인사를 하러 가는 시절을 거쳤다. 한국이라는 나라가 있다는 것도 모르던 때, 한국민속가무예술단과 리틀엔젤스 단원에 뽑혀 ‘문화 사절단’으로 전 세계를 순회했다.

근대화가 시작되며 전통은 홀대받았다. 광대는 천시의 대상이었다. “군사 정권에서 새마을운동이 시작되면서 농악이 완전히 사라졌어요. 일제 강점기 때도 못 막은 농악이었는데, 그때가 수난의 시대였죠. 새로운 생활양식을 만들면서도 우리의 삶 속에 깃든 것은 지켜야 하는데, 싸그리 뒤집어 버린거지.”

젊은 김덕수는 전통이 스러지던 길목에 “깃발을 세웠다”. 단 네 개의 타악기가 만들어낸 완전히 새로운 음악. 하지만 “한국인의 DNA 안에 내재된 신명”이자 “근본”이었다. “그 시절엔 꽹과리 징 장구 북의 연주를 음악으로 보지 않았어요. 그런데 그건 우리의 풀뿌리 문화거든요. 우리의 피 색깔과 가장 가까운 서민 문화.” 성공을 확신했다고 한다. 전 세계 무대에서 진작에 확인했다. “다들 ‘한국의 농악이 금메달’이라고 했어요. 이건 내 평생 할 가치가 있다고 확신했어요.” 우리 안에선 사라진 농악이 4인조 타악 앙상블로 태어났다. 1978년 2월 22일. 국악계는 발칵 뒤집혔다. “혁명적인 발상이었어요. 우리 세대가 전통을 창조적으로 계승한 거였죠. 본질을 지키면서 시대와 함께 계승한 거죠. 그러면서 사물놀이는 점차 민초를 대변하는 울림이자, 저항의 상징이 됐어요.” 1987년 이한열 열사의 추모한 공연 ‘바람맞이’가 대표적이다. 그의 트레이드 마크인 수염도 저항의 표식이었다. “많은 순간들이 있지만, 사물놀이를 만든 건 살면서 가장 기쁜 일이었어요.”

클래식, 재즈, 록앤롤, 힙합을 아우르며 사물놀이와의 융복합을 시도한 김덕수는 “전통은 본질은 지키되 시대의 흐름을 받아들이며 진화해야 하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박해묵 기자

▶ 예인의 꿈…“전통의 미래, 신명이 팝 문화되길”=김덕수의 이름 옆에서 ‘전통’은 박제되지 않는다. 그는 끊임없이 시도했다. 사물놀이도 그 중 하나였다. 스스로 큰 도전이라 꼽은 공연은 1983년 서울시립교향악단과 처음으로 콘체르토를 연주한 때였다. “콘체르토 이름이 ‘사물놀이에 의한 협주곡’이었어요. 지금이야 수십곡이지. 100% 우리 장단으로 곡을 썼어요. 이 곡은 클래식 팬들을 위해 접근한 거예요. 그때 장르별 마니아가 다르다는 것을 알았어요. 전통 예술 공연장에는 초대권을 줘도 사람들이 안 왔거든. (웃음)”

그에게 ‘전통’은 “박물관에 가두는 것이 아니었다”. 경계를 넘고, 장르를 허물었다. 디지털과의 접목을 시도했고, 일찌감치 클래식, 재즈, 팝, 록을 넘나들며 세계의 거장들과 협연했다. 레너드 번스타인, 정명훈, 허비 행콕, 스티비 원더…. “우리의 맛과 멋, 우리 신명을 바탕으로 해본 거예요. 그래서 코리언 재즈, 코리안 록앤롤이라고, ‘코리언’을 붙였어요. 그렇게 글로벌 스탠다드로 나아가야 해요. 우리 리듬의 울타리 안에서 모든 것과 어우러져야 하죠. 신명의 본질을 지키면서 융복합을 시도하는 거예요. 전통만 강조하면 전통에서 끝이 나요. 시대의 흐름을 받아들이는 것이 전통이 살아남는 길이에요.”

걸어가는 곳마다 이정표를 세운 그의 꿈은 미래를 향해 있다. 그는 “전통을 이어가는 것은 결국 교육”이라고 강조한다. 1998년 한예종 전통예술원 연희과 교수로 부임한 이후 지금은 명예교수로, 원광 디지털 대학교 석좌교수로 머물며 후학 양성에 힘쓰는 것도 그 때문이다. 국내외를 넘나들며 우리 것을 계승하고, 우리의 삶 속에서 사물놀이의 진화를 지켜보는 것이 그의 보람이고 목표다. “청년 예인들이 우리 리듬, 우리 악기를 들고 세계로 나가 그곳의 문화와 접목하면 거기에서 새로운 콘텐츠가 나와요. 전통의 창조적 계승이 또 이뤄지는 거죠. 우리 신명이 세계적인 팝 문화가 되는 날을 꿈꿔요.”

일흔을 앞둔 나이에도 김덕수의 눈은 청년처럼 빛이 났다. 그는 “무대는 평생 도전”이라며 “예인이기에 예술적 표현에는 부담을 느낀다. 영원한 예인으로 살겠다”고 말했다. 박해묵 기자

불꽃처럼 피어오르는 김덕수의 삶은 무대에서 펼쳐진다. 그의 이름 옆에 ‘전(傳)’이 붙었다. 이동연 한국예술종합학교 전통예술원 교수가 극을 썼고, 박근형이 연출을 맡았다. 음악극 ‘김덕수전’(28~31일까지. 세종문화회관)을 두고 그는 “인생의 회고록”이자, “고해성사”라고 했다. 긴 시간이 그의 눈을 스쳤다. “즐겁고 아팠던 순간들이 많다”고 했다. “예인이기에 늘 예술적 표현에 부담을 느끼고, 새롭게 도전할 때 마음대로 안 되면 아프기도 해요. 그래서 평생 하는 거예요. 영원한 예인으로 살아야죠.”

shee@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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