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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무엇을 상상하든 그 이상…지금까지 이런 ‘춘향’은 없었다
[국립극장 제공]

[헤럴드경제=고승희 기자] 단오날, 엄마 몰래 광한루에 놀러가려는 춘향의 얼굴에 설렘이 가득했다. 가장 예쁜 옷을 고르며 향단이와 연신 얼굴을 마주 보고 ‘까르르, 까르르’ 웃음꽃을 피웠다. ‘굴러가는 낙엽만 봐도’ 웃음이 난다는 열일곱 소녀의 등장. 객석에도 이에 봄향기(春香)가 가득 찼다.

국립극단 창립 70주년을 맞아 막을 올린 국립창극단의 2020년 신작 ‘춘향’은 한국인이라면 익히 알고 있던 ‘춘향전’을 비틀고 뒤집었다. 순수한 사랑은 무대 위에 만개하고, 신분의 차별과 제도의 벽은 보기 좋게 깨졌다. 절개과 정절의 상징 안에 갇혀 있던 ‘춘향’의 고정관념에도 균열을 냈다.

지난 14일 막을 올린 ‘춘향’은 배우이자 연출가인 김명곤이 극본과 연출을 맡았고, 유수정 국립창극단 예술감독이 작창을 맡았다. ‘춘향’의 지향점은 명확했다. 음악은 창극인 뿌리인 전통 소리에 가깝게 다가섰고, 스토리와 구성 요소들은 동시대를 반영했다. 판소리 사설은 현대어로 바꿔 관객들에겐 더욱 친근하게 다가왔다.

일단 ‘춘향’을 가장 ‘춘향’답게 만든 장치는 처음부터 등장한다. 기존의 ‘춘향’이었다면 몽룡이 광한루에 나들이 가는 것에서부터 이야기가 전개되는 ‘몽룡의 시점’을 ‘춘향의 시점’으로 바꿨다. 오랜만의 나들이에 설렌 열일곱 춘향은 앞으로 극의 전개를 보여주는 복선과도 같았다. ‘춘향전’이라 하면 고리타분한 옛날이야기라고 생각했던 선입견을 깨기 위해 신분과 제도, 관습에 매몰됐던 여성상을 보다 쾌활하게 그려냈다.

[국립극장 제공]

광한루에서 춘향을 오라 하는 매 건네는 한 마디. “사또 자제면 자제지, 초면에 아무나 오라 가라 염치없이 들이대도 된단 말이냐? 애시당초 첫 인사부터가 틀려먹었다!” 신분이 그려놓은 질서 따위는 가볍게 넘어서는 주체적인 여성으로 변신한다. 첫 만남부터 몽룡을 딱지 놓은 춘향은 ‘혼인 서약서’를 써주는 도련님 앞에서도 자기 목소리를 낸다. 한양으로 떠나는 몽룡이 써준 혼인서약서는 가차없이 찢어버린다. 한낱 ‘종이 쪼가리’가 어찌 사랑을 증명할 수 있을까. 고작 종이 한 장에 목을 매는 애타는 사랑이 아닌 마음이 통한 진정한 맹세를 통해 청춘 남녀의 동등한 사랑 이야기가 이어진다.

이번 ‘춘향’의 백미는 ‘사랑가’였다. 복건을 벗어던진 몽룡, ‘춘향전’ 사상 처음으로 저고리를 풀어헤치며 속옷 차림으로 사랑을 말하는 ‘춘향’. 창극 역사에 있어서도 연기와 소리와 안무가 한번에 나오는 복합예술이 태어났다. 마침내 사랑을 확인하는 두 사람의 몸짓은 이별을 앞둔 연인들의 애타는 마음을 담은 듯 격렬하고 아름답다. 춘향을 벌써 세 번째 연기하는 국립창극단의 주역 이소연은 이번 작품에 ‘마지막 춘향’이라는 각오로 임했다고 했다. 소녀로 돌아간 듯 발랄한 모습과 더불어 절절하게 한 맺힌 이별가와 옥중가는 압권이었다.

[국립극장 제공]

무엇보다 인상적인 것은 빈틈도 구멍도 없는 창극단 배우와 연주자들의 조화다. 국립창극단 단원들이 총출동한 ‘춘향’에선 한 대목 훑고 지나가는 것만으로도 객석을 들썩이게 만드는 힘을 가진 창극단의 저력을 다시 한 번 보여줬다. 전통 국악기와 신시사이저, 베이스드럼, 기타 등 서양 악기까지 조화를 이룬 악단은 이번 작품을 빛낸 숨은 공신이다.

창극단의 간판스타 이소연과 지난 2월 오디션을 통해 발탁된 김우정이 춘향 역에 더블 캐스팅됐고, 몽룡 역은 ‘국악계의 아이돌’ 김준수가 맡았다. 오는 24일까지, 국립극장 달오름극장에서 공연을 이어간다.

shee@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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