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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짜파구리' 나오자 객석에선…'기생충' 정재일 음악감독의 전 세계 초연

[헤럴드경제=고승희 기자] 캠핑을 떠났던 대저택의 가족들이 갑작스레 돌아온다며, ‘짜파구리’를 해놓으라고 충숙(가정부)에게 이야기한다. 주어진 시간은 8분. 술파티로 엉망이 된 것도 모자라 지하실에 숨어살던 문광 부부와의 한바탕 난리를 치른 뒤라 상황은 긴박하게 돌아간다. 채끝 등심을 듬성듬성 썰어내는 칼소리 뒤로 ‘짜파구리’가 흘렀다. 영화 ‘기생충’의 한 장면이다.

날이 선 바이올린 선율이 시작이었다. 이윽고 등장한 익숙한 멜로디. 화면으로 ‘짜파구리’라는 곡명이 등장하자 객석에선 낮은 환호와 웃음이 살며시 새어나왔다. 영화의 긴장감은 공연장으로 이어졌다. ‘짜파구리’ 뒤로 이어진 것은 ‘기생충’에 삽입된 ‘믿음의 벨트’. 꽤 길게 이어지는 이 곡에선 ‘기생충’으로 호흡을 맞춘 정재일과 강이채(바이올린), 현악 오케스트라 ‘더 퍼스트(The 1st)’가 함께 했다.

[블루보이 제공]

지난 15일 서울 용산구 블루스퀘어 아이마켓홀에서 열린 정재일 단독콘서트에서 그는 ‘기생충’에 나온 두 곡의 연주를 마친 뒤 “전 세계 초연”이라고 말해 웃음을 자아냈다.

곡에 대한 설명도 이어졌다. 그는 “엉터리 바로크 음악을 만들었는데 클래식을 이해하면서도 곡의 빗나가고 절뚝거리는 기분을 잘 이해할 수 있는 연주자가 누구일지 고민하다 강이채 씨에게 연주를 부탁했다”며 “곡이 어려워 녹음이 2~3일이 걸릴 거라 생각했는데 2~3시간 만에 끝냈다”고 말했다.

‘기생충’ OST는 공연 중 아주 적절한 타이밍에 등장했다. 애초 100분 공연으로 예정됐지만, 공연은 140분을 훌쩍 넘겨 이어졌다. 이날의 공연은 다방면에서 활동해온 정재일의 지난 음악 여정을 집대성한 자리였다. 그간 참여했던 영화, 연극, 창극, 전시에 이르는 작품에서 선보인 정재일의 음악은 장르를 넘나들고, 경계를 허문 전방위 뮤지션의 예술세계를 담고 있었다.

공연은 영화 ‘오버 데어’에 삽입된 동명의 곡으로 문을 열었다. 정재일은 그랜드피아노에 앉아 객석을 등진 채 등장했다. 피아노 오른쪽 뒷편으로는 16인조 ‘더 퍼스트’ 오케스트라가 자리했고, 왼쪽으로는 이아람(대금), 성시영(피리), 김승철(아쟁), 느닷(사물놀이 – 이준형, 주영호, 표한진, 권설후) 등 국악 연주팀 8인이 함께 했다. 특히 이날 공연에선 지루하고 고루하다는 전통음악의 편견을 완전히 깨줬다. 꽉 채워진 무대에서 국악과 양악을 넘나드는 연주, 때때로 어우러지는 이들의 조화로움은 파격적이고 실험적이면서도, 아름답고 경이로웠다.

[블루보이 제공]

영화 ‘옥자’의 ‘노 익셉션(no exceptions)’에서 태평소와 기타의 신경질적인 조화가 객석을 장악할 무렵 공연은 다시 ‘비나리’로 옷을 갈아입었다. 젊은 소리꾼 김율희의 창이 관객을 압도했다. 국립창극단의 얼굴로 대중음악계와 다양한 협업을 이어가고 있는 김준수는 ‘자룡 활 쏘다’를 통해 압도적인 카리스마를 보여줬다.

정재일이 소리꾼 한승석과 함께 한 2014년 앨범 ‘바리 어밴던드’(abandoned) 수록곡인 ‘건너가는 아이들’과 ‘아마, 아마, 메로 아마’에서는 배우 정영숙이 내레이터로 등장, 고요하고 장엄한 한 장면을 연출했다.

‘바리 어밴던드’는 바리공주 설화를 모티브 삼은 앨범이다. 난민 어린이들의 고단한 여정이 ‘건너가는 아이들’ 속에, 네팔 이주 노동자의 죽음이 ‘아마, 아마, 메로 아마’에 담겼다. 정영숙은 시공간을 넘나드는 아픔을 모노드라마를 보듯 들려줬다.

창작타악그룹 푸리 2기 출신인 정재일이 1기의 앨범에 있는 ‘셋, 둘’을 국악 연주를 들려줄 때 그는 ‘멀티 플레이어’로 변신했다. 기타와 베이스, 드럼을 넘나들었다. 타악에 맞춰 기타의 선을 튕기고, 북소리에 맞춰 드럼을 치는 장면들은 압권이었다. 정재일은 연주를 마친 이후 “한국의 타악이 이렇게 강력하다는 것을 꼭 들려드리고 싶었다”고 말했다.

공연은 관객과 ‘밀당’을 하듯 다채로운 구성으로 장르를 넘나들었다. ‘데이(They)’에선 국악기와 양악기의 조화에 매료됐고, 연극 ‘그을린 사랑’ 속 음악 ‘트루스’(truths)가 흐를 땐 관객들은 잠시 숨소리마저 멈췄다. 정재일의 피아노 독주엔 일찌감치 ‘천재 뮤지션’으로 불리던 그의 음악 여정이 담기며 깊은 잔상을 남겼다 .

“앙코르가 나올 줄 몰랐다”면서 들려준 곡은 이날 공연을 통해 처음으로 연주하는 곡이었다. “존경하고 사랑하는 분을 향한 마음을 담아 작곡한 곡”이라며 ‘디어리스트(Dearest)’를 선보였다.

정재일은 ‘기생충’의 음악감독으로 활약하기 이전에도 음악계를 종횡무진하는 아티스트였다. 열일곱에 한상원 정원영 이적과 함께 밴드 긱스의 멤버로 활동하며 ‘천재’라는 수사를 달고 다녔고, 영역을 넘나들며 다양한 음악 활동을 해왔다.

한 음반사 관계자는 “현재 30대 여성들에게 가장 큰 음악계 이슈 중 하나는 정재일의 솔로 앨범 출시에 관련된 것이라 해도 무리가 없을 만큼 의외로 팬덤이 탄탄한 뮤지션”이라며 “다양하게 음악 활동을 하고 있지만 자신의 음악 세계를 보여주는 자리가 많지 않았던 만큼 이번 공연이 더욱 주목받을 것”이라고 말했다. 실제로 인터파크티켓에 따르면 정재일의 공연은 20~30대 여성이 압도적으로 많았다. 30대가 43.1%, 20대가 30.2%나 됐다.

이번 공연은 ‘기생충’의 음악감독이 아닌 뮤지션 ‘정재일’의 음악 여정을 보여준 자리였다. 정재일은 공연을 마무리하며 “저는 더 뭔가 잘해보도록 하겠습니다. 고맙습니다”라는 담백한 말을 인사로 남겼다.

shee@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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