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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프리즘] 겨울비와 새해다짐

최근 뒤늦게 관람한 영화가 하나 있다. ‘유열의 음악앨범’이란 제목의 이 영화는 유명 라디오 프로그램을 매개체로 청춘남녀 사랑을 담은, 개인적으론 그저 그랬던 영화다. 오히려 스토리보다 더 인상적인 한 장면이 있었으니, 남녀 주인공이 가게 지붕 밑에 앉아 물끄러미 장맛비를 쳐다보는 신이다. 둘은 아무 말이 없다.

별것 없는 이 장면이 이젠 귀한 일이 됐다. 원래 비는 눈으로만 보는 게 아니다. 비는 특유의 소리가 있고 냄새가 있으며 온도가 있다. 요즘 가끔 캠핑을 떠난다. 우중캠핑의 하이라이트는 타프 아래에서 마시는 커피 한 잔이다. 온전히 비를 느낄 수 있기에 그렇다.

현대인은 온전히 비를 느낄 기회마저 박탈당했다. 이제 우린 사무실 창 밖으로 비를 볼 뿐이다. 소리도 없고 냄새도 없고 촉감도 없다. 그러니 감흥도 없다. 비를 바라보는 장면이 인상적이었던 건, 영화 속 남녀 주인공이 부러웠던 건 풋풋한 젊음이나 사랑 등의 때문이 아니었다. 온전히 비를 느낄 수 있다는 사실이 부러웠던 탓이다.

예전 헤럴드디자인포럼에 연사로 참석한 세계적 건축가 안도 다다오의 강연 때였다. 그는 본인의 건축철학을 소개하며 공원과 아파트를 예로 들었다. 요약하자면 이렇다. “공원에서 책을 보고 있다고 상상해보라. 아이들이 뛰노는 소리는 배경음악이 되고, 귀를 스치는 바람은 독서를 더 즐겁게 한다. 아파트 방 안에서 책을 보고 있다고 상상해보라. 위층 슬리퍼 끄는 소리만 들려도 책장을 덮게 된다.”

층간소음을 차단할 기술은 날로 발전하지만, 역설적으로 현대인은 갈수록 층간소음에 민감해진다. 오히려 층간소음은 과거와 달리 현대에 사회적 이슈로까지 비화되고 있다. 이는 문제가 데시벨(dB)이 아닌 우리에게 있다는 걸 방증한다. 우린 계속 세상과 담을 쌓고 있다. 점점 갇혀 살고 있다. 세상과 단절된 삶은 ‘소통’을 ‘소음’으로 만든다. 발코니가 사라지고 베란다마저 방이 된 한국 아파트에선 세상을 느낄 길이 없다는, 한 건축가의 토로도 같은 맥락이다.

이제 한 해가 저물어간다. 언론사마다 올해의 10대 뉴스와 신년 10대 전망이 쏟아지는 시기이며, 각자 한 해를 마무리하고 신년 다짐을 할 때이다. 새해엔 우리 모두 문을 여는 한 해가 됐으면 한다. 소음이 아닌 소통으로 맞이하는 한 해가 됐으면 한다.

내년도 한국 경제 전망은 비관적이다. 올해도 힘겨웠지만, 내년엔 더 힘겨울 것이다. 함께 머리를 맞대지 않는다면 이겨내기 힘들다. 함께 소통하지 않는다면 외로운 싸움이 될 것이다. 오감으로 비를 느끼듯, 공원에서 책을 보듯 작은 것에서부터 남과 소통하는 삶을 체화하는 한 해가 되길 바란다. 새해를 맞이하는 다짐이자 바람이다.

dlcw@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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