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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극사실화를 보는 듯…오키나와 지옥의 전장이 눈앞에 펼쳐진다
태평양 전쟁 유진 B. 슬레지 지음, 이경식 옮김 열린책들

“나는 이 글을 쓰면서 조국을 위해 깊고 큰 고통을 감당했던 제1해병사단의 전우들에게 오랜 세월 동안 내가 지고 있던 빚을 갚는 셈이다. 전우들 가운데서 그 지옥의 수렁에서 조금도 다치지 않고 돌아온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스티븐 스필버그 감독의 미니시리즈 ‘퍼시픽’의 원작으로 잘 알려진 논픽션 ‘태평양 전쟁’에서 유진 B. 슬레지는 이렇게 썼다. 제2차 세계대전 중 가장 맹렬했던 펠렐리우 전투와 오키나와 전투의 참상을 가장 솔직하고 정확하게 쓴 것으로 평가받는 책이다. 슬레지는 손바닥 만한 성경책 여백에 당시의 상황을 빼곡하게 기록했다고 한다.

책은 분노와 적개심, 공포 등 감정에 솔직하면서도 정확한 사실관계, 전쟁을 한 발짝 물러서 보는 거리와 연민까지 전쟁회고록의 미덕을 고루 보여준다.

슬레지가 처음 투입된 전장은 팔라우제도의 산호섬 펠렐리우였다. 맥아더 장군은 필리핀으로 진격하는 연합군의 우익선을 보호하기 위해 이 작은 섬이 필요했다. 사나흘이라면 끝날 전투라고 호언했지만 일본군이 섬 지하에 굴과 터널을 파서 방어진지를 구축하면서 장기전으로 흘렀다. 섬 전체를 하나의 전선으로 만들어 놓은 일본군에 맞서 하나하나 방어진지를 격파해나가는 과정은 지난했다.

“이빨이 뽑힌 채로 마치 웃고 있는 듯한 표정의 시체들은 기괴한 자세와 상태로 여기저기 도처에 널려 있었고”, 시체와 오물이 넘쳐나고 청파리가 들끓는 전장은 “지구의 전투 현장이 아닌 것 같았다”고 슬레지는 썼다.

슬레지의 두 번째 전장은 태평양 전쟁 최후의 전장인 오키나와. 슈리전선에 투입된 슬레지는 일본군의 단단한 방어와 엄청난 폭우에 시달리며 긴 전쟁으로 전우들이 죽고 정신이 이상해져가는 모습을 적나라하게 적었다. 저자 역시 죽은 해병대원들이 벌떡 일어나 다리를 질질 끌며 여기저기 어슬렁거리는 악몽에 시잘렸다. 오키나와에서 미군 사망자는 실종자 포함 7631명, 부상자는 3만1807명, 일본군 사상자 수는 10만 7539명, 슬레지가 포함된 K중대원은 총 485명 중 50명만 살아남았다.

책은 무엇보다 묘사의 생생함이 놀랍다. 잔학함과 야만적 행동을 사실적으로 묘사하되 감정을 배제함으로써 극사실화를 보는 듯한 느낌을 준다. 이윤미 기자/meele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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