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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풍광보다 더 아름다운 건…가신님의 ‘숭고한 넋’이었네
충남 아산으로 떠나는 ‘성지 순례길’
천주교 박해 순교자 32위 모신 ‘공세리 성당’
350년 된 팽나무·성당 주변 아름드리 나무 장관
그 유명한 ‘이명래 고약’도 이곳에서 시작
소나무 숲 뒤 아담한 천년 신라사찰 ‘봉곡사’
오는 길엔 충무공 모신 ‘현충사’ 꼭 둘러봐야

충남 아산 지역 천주교 신앙의 역사와 박해로 인해 순교한 이들의 아픔이 고스란히 담겨있는 곳이 공세리 성당이다. 많은 영화와 드라마의 촬영지로 각광을 받는 이곳은 커다란 수목 사이로 클래식하지만 기품있는 양식의 성당이 고고하면서도 담담한 모습으로 자리를 잡고 있다. 신자들에게는 성지와 같은 곳이고, 일반인에게도 마음의 평안과 휴식을 전해준다. 김성진 기자/withyj2@heraldcorp.com

문득 바람이나 쐬볼까 싶어 집을 나선다면 인파로 북적이는 유명한 곳도, 운전하다 지치는 장거리도 내키지 않게 마련이다. 바쁜 일 없이 쉬는 듯 가는 듯 한가로이 훌쩍 다녀오기에는 충남 아산 정도면 괜찮은 선택지가 될 수 있다.

서울에서 한시간 반 남짓이면 다다르는 공세리 성당은 한적한 도로에서 빠져 들어가면 한껏 우거진 나무 사이로 모습을 슬쩍 드러낸다. 화려하지도, 거대하지도 않지만 한국 천주교의 굵직한 역사와 아픔을 넉넉히 품고 있는 성당답게 기품이 느껴진다. 굳이 천주교 신자가 아니라도 성당내 사료들을 둘러보고, 순례길을 걸어보는 시간들이 그리 아깝지 않게 느껴진다. 

공세리 성당 순교자 묘소

공세리 성당은 인근 40개 고을의 조세를 한데 모으던 창고가 300년 가량 자리했던 곳에 지어진 성당이다. 국내에서 가장 아름다운 성당으로 꼽기도 하지만, 또한 천주교 박해가 극에 달하던 시절 많은 순교자가 나왔던 이 지역의 아픈 역사의 장소이기도 하다. 이 성당에는 이 지역에서 신앙생활을 하다 끌려가 각지에서 순교당한 32명의 순교자를 모시고 있다.

주차장에서 성당으로 향하다 보면 아름드리 나무들과 꽃들이 우거져 성당의 전체 모습을 보기 힘들 정도다. 350년된 팽나무를 비롯해 국가보호수종 4개가 성당을 보호하듯이 주위를 둘러싸고 있다. 순교자 32위를 모신 묘지를 지나 성당 못미친 왼쪽에는 아담한 박물관이 자리잡고 있다. 예전 사제관을 개보수해 봉헌한 이 곳에는 약 1500여점의 천주교 전파 및 박해와 관련된 사료와 유물이 전시되어 있다. 공세리성당을 직접 설계하고 지은 초대신부 드비즈 신부의 유품과 이 지역 신앙의 상징같은 존재였던 박의서 박원서 박익서 3형제와 그 집안의 순교와 관련된 이야기가 소개되어 있다.

또 내포지방을 중심으로 한 초대교회의 교우촌 생활 모습을 디오라마로 만들어 이해하기 쉽게 전시해놓았고, 순교한 성직자들의 활동 모습을 보여주고 있으며, 성 앵베르 주교, 성 모방 신부, 성 샤스땅 신부의 유해와 성녀 루이스 마릴락의 유해 등이 모셔져 있다.

이 박물관에는 특이한 전시물이 하나 있다. 지금 중장년층이라면 익숙한 ‘이명래 고약’이 이곳 공세리성당에서 시작되었다는 것이다. 곪은 상처에 붙이던 이명래 고약은 30~40년전만해도 거의 모든 가정에 구비되었을 만큼 효능을 인정받던 상비약이었다.

드비즈 신부가 직접 조제하여 그의 한국 이름(성일론)을 딴 ‘성일론 고약’을 만들어 그 비법을 이명래에게 전수했던 것이 그 시초였다고 한다. 이명래 고약은 1906년 충남 아산에서 이름을 떨치다 1946년 서울 중림동에 자리를 잡았다. 일찍이 두 아들을 잃은 창업자는 세 딸을 두었다. 6·25 전쟁 때 이명래 씨는 타계하고 이명래 고약은 사위인 한의사 이광진과 고려대 총장과 신민당 총재를 지낸 유진오 박사의 부인인 막내딸 이용재 씨에게 대물림 되었다고 한다.

성당 주위를 빙 둘러 조성된 순례길은 우거진 나무 숲 아래를 걷는 코스라 조용히 사색의 시간을 갖기에 적당하다. 중간 중간 만들어놓은 성서와 관련된 조각품들도 눈길을 끈다. 

봉곡사

공세리 성당의 은은한 아름다움을 즐기고 난 뒤에는 멀지 않은 송악면에 위치한 봉곡사를 찾아본다.

주차장에서 봉곡사에 이르는 길 좌우에는 잔뜩 구부러진 소나무들이 제법 굵직하다. 진입로가 시멘트 포장이 되어있고 나무가 울창하지는 않지만 소나무들의 꽤 수령이 오래됐다. 나무 밑둥에 홈이 패여 있는것들이 눈에 띄는데 일제때 송진을 채취해간 흔적이라고 한다. 봉곡사는 정조 18년(1794년)에 이름을 얻은 것으로 알려졌다. 하지만 사찰입구에 신라 진성여왕(887년) 도선국사가 창건했다는 내용이 나오며 고려때 그리고 조선시대 몇몇 기록에서는 석암사로 불렸다. 조선 말기 고승 만공선사가 도를 깨우친 곳이며 이를 기리는 만공탑이 있다.

이 사찰은 깊지 않은 산 중간에 돌로 축대를 쌓은 터 위에 아담하게 자리하고 있다. 하지만 실학의 태두 다산 정약용의 발자취가 남아 있어 남다른 의미를 갖는다. 다산이 성호 이익의 종손자가 예산에 살고 있다는 것을 알고 찾아와 강학회를 했는데 이때 쓴 글에 봉곡사 주변 풍광 등을 묘사한 대목이 나온다고 한다.

현충사를 빼놓고 아산을 떠나기는 어렵다.

어지간한 사람들은 한번쯤 들러봤을 현충사는 충무공 이순신을 기리는 사당이며 내부에 이순신 장군의 고택도 있다. 사적 제155호인 현충사는 숙종때인 1706년 지방 유생들이 조정에 건의해 세워졌고하여 세웠으며 이듬해 ‘현충사’라는 사액(賜額)을 받았다. 일제시절 탄압으로 발길이 끊어졌다가 다시 국민들의 성금으로 보수한 뒤 영정을 모셨으며 1960년대에 확장하고 시설이 추가됐다. 시설을 유지하는데 적지않은 비용이 들어가지만 입장료와 주차가 무료다.

현충사 정문인 충무문으로 들어서면 넓은 경내에 우거진 잔디와 잔디, 말끔하게 깔린 보도 등이 눈길을 끈다. 웬만한 해외 유명 공원을 방불케할 만큼 다양한 수목과 잔디 관리가 잘 되어있다. 몸이 불편한 사람이나, 유모차에 아이를 태운 부모들도 여유있게 산책을 하며 시간을 보내기에 안성맞춤이다.

입구로 들어서면 왼쪽으로 거대한 신라시대 고분을 연상시키는 ‘충무공 이순신 기념관’이 방문객을 맞는다. 기념관에는 임진장초 등 중요한 문서와 거북선 설계도, 조선과 일본의 무기 비교, 주요 전투 소개 등이 일목요연하게 전시되어 있다. 국민들이 잘 아는 인물이지만 차근차근 둘러보면 이순신 장구의 생애와 당시 조선과 왜의 국제정세, 전황 등에 대해 자세하게 알 수 있다.

기념관을 나와 걸어올라가면 박테기 나무, 느티나무 등 하늘을 가릴 만큼 자란 나무들이 눈을 시원하게 해준다. 오른편에 누각이하나 서 있다. 이는 충신, 효자, 열녀를 기리고 후세에 본받게 하려고 조정에서 내린 편액을 마을 입구에 걸어두는 ‘정려’다. 이곳에는 충무공과 조카, 후손 등의 편액이 모셔져 있다. 정려 뒤쪽에 조성해놓은 연못 ‘연지’의 풍광도 아름다워 산책코스로 인기다

이순신 장군이 살았던 고택도 이곳에 있다. 현재 건물은 한식 목조건물로서 안채만이 당시의 모습을 간직하고 있다. 대대로 종손이 살아오다가 1969년 현충사 성역화사업 당시에 다른 곳으로 이주했다고 한다. 이곳에서 다도나, 예절교육도 이뤄진다.

현충사내 활터

현충사의 가장 중앙 뒤쪽에 자리한 본전에는 충무공의 영정이 모셔져 있다. 이곳에서 충무문쪽을 바라보면 조경과 시설들이 잘 정돈되어 있는 모습이 한 눈에 들어온다. 사당에서 내려와 왼쪽에 난 길로 걸어가다보면 활터가 나온다.

과녁판은 활터에서 남방으로 145m 떨어진 곳에 있으며 이순신 장군이 연습하던 당시에는 200m 거리였고, 임금님이 북쪽에 계시기 때문에 항상 남쪽을 향해 활쏘기 연습을 했다고 한다. 매년 4월28일 이순신 장군 탄신일에는 전국 시·도 대항 궁도대회가 이곳에서 열린다. 일반인을 대상으로한 활쏘기 체험도 할 수 있다. 관리자로부터 간단한 설명을 듣고 불과 20여m 정도의 과녁을 놓고 쏘는데도 손이 부들부들 떨리면서 맞추기가 만만치않다. 성적(?)과 상관없이 한바퀴 휘 둘러본 현충사는 그대로 아름답고 매력적이다.

아산=김성진 기자/withyj2@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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