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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프리즘] 좋은 재판, 믿을 수 있는 재판
몇 년 전 읽었던 대법원 판결문은 특이한 점이 있었다. 판결문에는 대법관 이름이 셋만 기재돼 있었다. 통상 대부분의 사건은 4명의 대법관이 한 부를 이루는 ‘소부’에서 처리한다. 한 명의 대법관 이름이 없는 판결문이었다. 알아 보니 항소심 재판장이 나중에 대법관이 됐는데, 하필 그 대법관이 속한 재판부에 사건이 배당돼 부득이하게 심리에서 한 명이 빠진 경위가 있었다. 흥미로운 건 항소심 재판장이었던 대법관을 빼고 나머지 세명이 ‘파기환송’ 결론을 낸 대목이다. 세 명의 대법관이 동료를 향해 ‘당신이 낸 결론에 흠이 있다’고 지적한 셈이다. 이 사건은 공정하게 처리됐겠구나 싶었다. 동료들에게 ‘파기환송’ 판결을 받은 대법관의 표정이 어땠을까 싶은 생각도 들었다.

별 것 아닌 에피소드를 길게 늘어놓은 건 최근 선고일이 연기된 기업은행 통상임금 사건 때문이다. 근로자 2만명이 소송을 낸 이 사건 1심은 원고가, 항소심은 사측이 사실상 승소해 결론이 엇갈렸다. 대법원에서 근로자들은 노동분야에 조예가 깊은 김선수 변호사를 대리인으로 선임했다. 김 변호사는 지난해 대법관이 됐다. 문제는 기업은행 통상임금 사건을 심리 중인 대법원 1부에 김 대법관이 속해 있다는 점이다. 김 대법관은 취임 전에 근로자 측 대리인에서 사임했다.

대법원은 큰 문제가 없다고 한다. 김 대법관은 지난해 취임했는데, 이 사건은 그 전인 2017년 8월에 이미 대법원 1부에 배당됐다. 김 대법관이 취임 후 심리에 관여하지 않은 만큼 대법관 셋이 판결을 해도 된다는 설명이다. 아마도 ‘항소심 재판장이 대법관이 됐을 때’와 같이 여기는 듯 하다.

하지만 재판장은 제3자인 심판이고, 변호사는 당사자의 이익을 대변한다. 재판장이 대법관이 된 사례와는 질적으로 다르다. 1년 전까지 대법원 변론을 맡았던 대리인이 결론을 좌우할 재판부 대법관인데, 반대쪽 당사자는 불리한 결론이 나오더라도 수긍할 수 있을까. 물론 대법원의 설명도 잘못된 건 아니다. 김 대법관은 정상적으로 사임했고, 심리에 관여하지 않았다면 공정한 재판이 이뤄졌을 수도 있다. 하지만 ‘공정해 보이도록’ 하는 노력도 중요한 게 재판이다.

대법원은 올해 초 의미있는 결정을 내렸다. 판사에게 실제로는 별 문제가 없더라도, 재판을 받는 당사자가 공정하지 않다고 의심할 객관적인 사정이 있다면 재판부를 교체해야 한다는 결정이었다. 법조계에서는 대법원이 판사 중심의 시각에서 벗어나 국민 눈높이에 맞춰 재판절차를 개선했다는 평가가 나왔다.

사법시험에 수석합격하고도 변호사로 활동하며 오랫 동안 노동사건을 맡았던 김선수 대법관은 ‘대법원 다양화’의 상징적인 인물이다. 김 대법관은 성공한 사례로 남아야 한다. 그래야 제2, 제3의 김선수가 나올 수 있다. 그런 맥락에서라도 ‘우연의 일치일 뿐이니, 대법관 한 명이 심리에서 빠지면 된다’고 한다면 곤란하다. 앞으로 변호사 출신 대법관은 더 늘어야 한다. 그러면 비슷한 문제 역시 반복될 수 밖에 없다. 문제가 계속될 소지가 있다면 제도를 만들어 해결해야 한다.

김명수 대법원장은 취임 이후 ‘좋은 재판’을 강조했다. 사법행정권 남용으로 잃어버린 신뢰를, 재판을 잘하는 것으로 되찾겠다는 포부다. 대법원은 우리사회 분쟁의 종착지가 돼야 한다. 법리를 만드는 것 못지 않게 공정하다는 믿음을 주고 당사자를 승복하게 만드는 게 중요하다. 김 대법원장이 말하는 ‘좋은 재판’이란 ‘믿을 수 있는 재판’의 또다른 표현일 것이다. 

좌영길 사회섹션 법조팀장 jyg97@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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