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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데스크 칼럼] 1000만보다 값진 1만
인생 영화나 인상적인 영화의 만남은 대개 우연한 경로로 이뤄지는 듯하다. 배우나 감독의 필모그래피를 보다가 호기심을 갖게 된다든지, 책에 한 줄 걸쳐 있는 이름에 끌려 발견하게 되는 경우가 그렇다. 영화 ‘한공주’는 바로 전자의 경우인데, 2005년 벌어진 밀양 여중생 집단 성폭행 사건을 모티브로 삼은 영화다. 개봉 9일 만에 10만 관객을 동원한 이 다양성 영화는 극히 이례적으로 181개 상영관을 확보해 화제가 됐다. 감정 과잉 없이 참담한 상황을 그려내는 감독의 절제된 연출이 돋보인 영화는 노래를 좋아하는 열일곱살 평범한 소녀가 끔찍한 일을 겪은 뒤 일상이 어떻게 바뀌는지를 섬세하게 잡아낸다. 자신은 잘못한 게 없는데, 세상 끝으로 밀려난 소녀는 몸과 마음을 닫아버리지만 친구들에게 조금 곁을 내보이기도 한다. 전학 간 곳까지 쫒아온 가해자 학부모들의 합의 요구와 폭력에 다시 벼랑끝으로 내몰린 소녀는 강물에 몸을 던지는데, 생명을 끝내려던 몸이 어느 순간 팔 다리를 움직여 헤엄치는 장면이 영화의 백미다.

노벨문학상 수상 작가 앨리스 먼로의 소설을 원작으로 한 캐나다 영화 ‘어웨이 프롬 허’는 한동안 스마트폰에 저장해 놓고 몇 번이고 봤던 영화다. 개봉 당시 전국 4개관에서 개봉, 1만 5000여명의 관객이 봤지만 작지 않은 영화다. 수시로 깜빡 깜빡하며 자신이 어디에 있는지 길을 잃고 마는 매력적인 초로의 여성 피오나. 교수 출신 남편은 아내의 곁을 지키겠다고 나서지만 피오나는 요양원을 선택한다. 말할 수 없는 자괴감에 빠진 남편 그랜트는 매일 요양원에 출근하다시피하지만 기억을 잃은 아내는 그곳에서 자기가 알던 고상한 아내와는 전혀 다른 모습이 돼 있다. 유치한 옷을 입고 다른 남자와 데이트를 하고 남자를 챙기는 모습에 화가 나지만 되돌릴 순 없다. 가끔 피오나는 멀쩡한 상태로 돌아와 그랜트의 과거를 꺼내 긴장시키는데, 지워지지 않는 그 깊은 상처를 아슬아슬하게 그려낸 데 이 영화의 묘미가 있다.

다양성 영화는 인생의 다채로운 결과 층을 독특한 시각으로 보여준다. 이를 통해 나의 상처와 만나기도 하고, 타인을 이해하고 공감하는 통로를 발견하기도 한다. 또한 일상에 묻혀 잃어버린 소소한 아름다움에 눈을 뜨고, 보이지 않는 세계로 통하는 문에 다가서기도 한다.

이런 다양성 영화는 평소 애써 관심을 갖지 않으면 놓치기 십상이다. 상영관수가 적다보니 대중과의 접점이 적을 수 밖에 없다. 멀티플렉스 시대지만 다양성 영화의 스크린 수는 늘지 않는다.

영화 ‘어벤저스:엔드게임’ 광풍으로 많은 영화들이 스크린을 잡지 못했다. ‘어벤저스’의 스크린수는 2800여곳으로 스크린 점유율이 57%에 이른다. 상영점유율로 따지면 차이는 엄청나다. 하루 1만3276회, 상영점유율 79.8%다. 박스오피스 3위에 올라있는 ‘생일’의 상영점유율 2.7%와 대비된다.

박양우 문체부 장관은 얼마전 기자들과 만나, 다양한 영화가 극장에 걸릴 수 있도록 특정 영화의 상영일수를 제한하는 ‘스크린 상한제’ 도입의 필요성을 언급했다. 현재 국회에는 스크린 독과점을 막는 관련 법안 4개가 올라가 있다. 복합상영관에서 같은 영화를 일정 비율 이상 틀지 못하도록 하거나 스크린 점유율을 40%로 제한하는 내용 등이다.

‘군함도’ ‘택시운전사’ 상영 때 제기된 스크린 독과점 문제가 문화 다양성을 확보하는 방향으로 제대로 논의가 이뤄져야 한다.
 
이윤미 라이프스타일섹션 에디터  meelee@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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