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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50년만에 꺼낸…베트남 학살의 기억
‘시민평화법정’서 피해자 증언
“한국정부에 사과받고 싶다”


“피고 대한민국은 원고들의 존엄과 명예가 회복될 수 있도록 책임에 대해 공식 인정하라.”

22일 오후 5시 서울 마포 문화비축기지의 한 공연장. ‘시민평화법정’ 재판장인 김영란 전 대법관이 판결 주문을 선고하는 목소리가 강당 안에 울려퍼졌다. 베트남인 응우옌 티 탄(58) 씨는 손으로 연신 눈가를 훔쳤다. 그는 1968년 2월 12일 베트남 꽝남성 퐁니ㆍ퐁넛 마을에서 한국군 총에 맞았다고 주장하는 피해자 중 한 명이다. 50년 전 가족을 잃고 혼자 살아남았다. 그날 이후 ‘한국군에 의한 학살 피해자’로 인정받은 건 이날이 처음이었다. “너무 기뻐서 온몸이 떨립니다. 희생자 분들과 살아남은 많은 생존자의 아픔을 조금이라도 달랠 수 있지 않을까 합니다.”

21일과 22일 이틀에 걸쳐 베트남 전쟁 당시 민간인 학살 의혹을 규명하기 위한 ‘시민평화법정’이 열렸다.

정식 재판이 아닌 모의재판으로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과 ‘한국-베트남 평화재단’이 공동개최했다. 이번 재판 결과를 토대로 국가를 상대로 학살 피해를 배상하라는 진짜 소송을 시작할 예정이다. 시민평화법정은 학살 피해자인 두 명의 응우옌 티 탄 씨가 대한민국을 상대로 손해배상 청구 소송을 낸 상황을 가정했다. 74명이 숨진 퐁니ㆍ퐁넛 마을 사건과 135명이 무고하게 희생된 하미 마을 사건이 재판에서 다뤄졌다.

21일에는 같은 이름을 가진 동명이인인 두 명의 ‘응우옌 티 탄’ 씨가 나서 악몽 같았던 학살 장면을 증언했다. 여덟 살이었던 퐁니ㆍ퐁넛 마을의 응우옌씨는 “방공호에서 사람이 나오는 대로 한국군이 총을 쐈다”고 떠올렸다. 그는 “동생이 숨을 쉴 때마다 목에서 울컥울컥 피가 쏟아졌지만 도와줄 수 없었다”며 “오빠는 너무 지쳐서 방공호 앞에서 쓰러졌고 저는 목이 말라서 주전자를 찾아 물을 먹었는데 다친 상처에서 창자가 빠져나왔다”고 증언했다. 가족을 잃은 뒤에는 친척집과 식모살이를 전전했다. 그는 “너무 힘든 시간이었다. 한국군이 차라리 나를 죽였다면 이렇게 힘들게 지내진 않았을거라고 생각했다”고 했다.

비슷한 시기 하미 마을 학살을 겪은 또 다른 응우옌 씨도 방공호에서 수류탄을 맞았던 기억을 떠올렸다. 그는 “어머니가 저와 동생을 배 밑으로 넣고 저희 위에서 덮어줬다”면서 “동생이 울면서 ‘엄마 죽었어요?’ 라고 소리질렀다”고 울먹였다. 통역사도 목이 메어 말을 잇지 못했고, 방청석의 시민들도 함께 울었다.

재판에서 양측 모두 민간인 학살이 있었다는 사실은 인정했다. 하지만 한국군이 이들을 죽였는지를 두고는 치열하게 다퉜다. 정부 측 대리인 역할을 맡은 박진석 변호사는 “당시 해병 중대는 퐁니 마을과 정반대 방향에 있었다”며 “베트콩들이 위장용 군복을 입고 민병대의 가족을 죽인 뒤 한국군에게 책임을 돌리는 일이 종종 있었다”고 했다. 반면 원고 측 대리인들은 “‘주월 미군 감찰 보고서’와 ‘파월 한국군전사’ 문건 등을 보면 한국군이 해당 지역에서 작전을 하다가 민간인을 학살했다”고 반박했다.

김 전 대법관과 이석태 변호사, 양현아 서울대 로스쿨 교수로 꾸려진 재판부는 증거자료를 검토한 뒤 한국군이 학살을 저질렀다고 인정했다. 정부 측 대리인 역할을 맡은 변호사들은 “적군과 아군을 구별할 수 없는 게릴라전에서 의도치 않게 희생자가 발생한 것일 수 있다”고도 주장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피해자가 대부분 비무장 상태인 노인과 여성, 어린이였던 점을 감안하면 이를 의도된 학살로 봐야한다는게 재판부 결론이다.

재판부는 과거 베트남 전쟁 당시 민간인에 대한 또 다른 살인이나 성폭력을 저질렀는지 진상 조사하고 그 결과를 전쟁기념관 등 베트남전 참전 홍보 시설에 게시하라고도 권고했다. 구수정 박사의 2000년 연구 결과에 따르면 베트남 전쟁에서 한국군은 80여 건의 민간인 학살을 저질렀고 9000여 명의 사상자를 냈다.

고도예 기자/yeah@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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