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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술값 내준 여성에 건넨 기형도의 연시…“그리움이라 부르십시오”
[헤럴드경제=이슈섹션]고(故) 기형도 시인이 20대 초반에 쓴 미공개 연시(戀詩) 한 편이 처음 공개됐다. 이 시는 오는 10~11월 경기 광명시에 설립될 기형도 문학과에 기증될 예정이라고 19일 문화일보가 보도했다.

“당신의 두 눈에/ 나지막한 등불이 켜지는/ 밤이면/ 그대여, 그것은/ 그리움이라 부르십시오/ 당신이 기다리는 것은/ 무엇입니까,바람입니까, 눈(雪)입니까/ 아, 어쩌면 당신은 저를 기다리고 계시는지요/ 손을 내미십시오/ 저는 언제나 당신 배경에/ 손을 뻗치면 닿을/ 가까운 거리에 살고 있읍니다”

기 시인은 동아일보 신춘문예로 등단하기 3년 전인 1982년, 스물세 살에 이 시를 썼다. 대학을 휴학하고 방위병(단기사병)으로 군복무를 하던 기 시인은 문학모임인 수리문학회에서 여자 회원들이 술값을 내면 그 보답으로 시를 써주었다고 한다.

이 시는 기 시인과 문학회 활동을 함께했던 박인옥(한국문인협회 안양지부장) 시인이 최근 수리문학회 활동을 정리하던 중 한 여성 회원으로부터 건네받았다. 이 작품은 기자 출신으로 현재 캐나다에 거주 중인 성우제 작가가 지난 13일 자신의 인터넷 블로그에 공개하면서 알려지기 시작했다. 성 작가는 기 시인의 대학 동문으로 절친했던 소설가 성석제의 동생이다.

기형도는 같은 여성에게 두 편의 시를 더 선물했다. 세 편 모두 ‘당신’으로 시작하는 전형적 사랑시다.

“당신에게/ 오늘 이 쓸쓸한 밤/ 나지막하게 노크할 사람이/ 있읍니까/ 하늘 언저리마다/ 낮게 낮게 눈이 꽂히고/ 당신의 찻잔은/ 이미 어둠으로 차갑게 식어 있읍니다/ 그대여, 옷을 입으십시오/ 그리고 조용히 통나무 문을 여십시오/ (…)”

“당신이/ 외투깃을 올릴 때/ 무엇이 당신을/ 차갑게 하는지 두렵게 하는지/ 알고 계세요?/ 풀잎은 모두 대지를 향해/ 지친 허리를 누이는 밤/ (…)/ 나는 언제나 당신의 주위에서/ 튀어올라 물보라치는/ 물비늘임을 그대는 아세요?”

박인옥 시인은 “당시 시를 선물받은 여성 회원은 기형도보다 한 살 어린 문학소녀였고 지금은 50대 중반의 평범한 주부”라며 “광명에 곧 개관할 기형도문학관에 시를 기증할 계획”이라고 전했다.

한편 기 시인은 연세대학교 졸업 후 신문 기자로 일하며 시작(詩作) 활동을 하다가 1989년 서른 살의 나이로 안타깝게 생을 마감했다. 대표작으로는 ‘안개’ ‘빈집’ ‘질투는 나의 힘’ 등이 실린 유고시집 ‘입 속의 검은 잎’이 있다.

onlinenews@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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