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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47일간의 세계여행] 144. 천년 세월이 만든 프라하…자유와 낭만을 만나다
[헤럴드경제=강인숙 여행칼럼니스트] 여행이 길어지니 여행용으로 사가지고 온 물건들이 쓸모를 다하는 중이다. 빛바랜지 오래된 모자는 넝마가 되어가고 유용하던 여행용 손전등과 멀티탭은 5개월의 여행을 견디기엔 역부족이었는지 접촉불량이 되었다. 여행용으로 사서 차고 나온 손목시계의 배터리마저 닳아 이미 바르셀로나에서 무용지물이 되었다. 장기여행의 소모품들은 여행용이 아니라 일상용으로 준비해야 하는 거였다. 아이패드의 케이블도 어딘가가 접촉 불량이 되어 충전이 되다 안 되다 했는데 어젯밤 완전히 망가져버렸는지 아예 충전이 안 된다.

나흘 밖에 남지 않은 여행이라 다른 것은 견디면 그만인데 아이패드 연결 케이블은 당장 사야 한다. 고즈넉한 중세의 도시 어디에 최첨단의 아이스토어가 있기나 한지 리셉션에 물어보려 하는데 문득 머릿속을 스치는 장면이 있다. 어제 버스터미널이 있는 안델역 대형마트 옆에서 아이스토어를 본 게 기억이 나는 것이다. 일어나자마자 달려 나가 메트로를 타고 안델역으로 간다. 아이스토어를 본 건 환상이 아니었다.


오전 9시가 넘은 시각, 매장안은 환하고 직원도 이미 출근해 있지만 오전 10시에 문을 연다는 안내와 함께 문이 굳게 잠겨있다. 오전 11시에는 체크아웃이라 빨리 케이블을 사서 충전을 하고 싶은데 문을 두드려도 통유리 안의 직원은 안내문을 가리키며 어깨만 으쓱댄다. 문이 열릴 때까지 마냥 기다릴 수 없어서 계속 두드리니 귀찮은 듯 문이 열린다. 금방 떠나야 해서 급하다고 지금 케이블을 팔라고 사정사정하니 어쩔 수 없다는 얼굴로 매장 안으로 들어오라고 한다. 드디어 원하는 케이블을 찾아 돈을 지불하니 무표정한 얼굴의 직원은 A4용지 가득한 영수증을 인쇄해서 주고는 내가 나오자마자 다시 문을 걸어 잠근다. 융통성 없는 사회주의 국가의 잔재들을 만나는 게 답답하지만 일단 급한 불은 껐으니 다행이다.

호스텔로 돌아와 남은 한 시간 동안 충전하면서 부다페스트(Budapest)로 가는 버스표와 숙소예약까지 마친다. 생각해보면 무엇이건 필요로 했던 거의 모든 순간, 그것을 우연찮게 구했던 것 같다. 가벼운 마음으로 무거워진 배낭을 싼다. 여행이 막바지에 이르고 있어 이젠 소소한 선물용 기념품을 사는 중이라 배낭이 커졌다. 체크아웃 하고 리셉션에 짐을 맡기고 거리로 나선다. 부다페스트행 버스는 밤 11시에 출발하기 때문에 온전히 남은 프라하의 하루를 즐길 수 있다.


주말을 넘긴 월요일 아침의 카를다리는 의외로 인적이 없다. 며칠 동안 늘 인파 가득한 다리만 보았는데 오늘 아침의 느닷없는 고요가 너무 좋다. 체코의 세종대왕이라는 카를4세가 건설한 카를다리는 체코 전역에서 보내온 달걀노른자를 사암에 섞어 튼튼한 다리를 건축한 것으로도 유명하다. 사람이 별로 없는 덕분에 미술관의 조각품 관람하듯이 고딕양식의 다리 위에 놓인 바로크양식의 성상들을 감상하며 걸을 수 있다.

그 중에서도 유명한 것은 성 요한 네포무크의 성상이다. 네포무크는 왕비의 고해성사를 알려주지 않았다는 죄목으로 왕에게 죽임을 당한 순교자다. 그가 블타바 강에 수장된 다음 날 강 위에 다섯 개의 별과 같은 광채가 떠올랐다고 하여 조각상의 그의 머리 뒤에는 다섯 개의 별이 있다.

네포무크가 수장당한 곳을 가리키는 섬세한 표식에는 수장되는 네포무크의 부조가 있다. 이 부조를 손으로 만지면 행운이 찾아온다는 전설 때문에 부조 속에 누워있는 작은 네포무크는 언제나 금빛이다.

성 요한 네포무크 조각상에 손을 대면 소원이 이루어진다고 해서 이곳에도 늘 사람이 줄을 서 있었다. 특히 단체 관광객이 오는 시간은 줄줄이 손을 대고 인증샷들을 찍느라 항상 어수선하던 조각상 앞에 오늘 아침엔 아무도 없다. 수많은 사람들의 수없는 손길로 아예 칠이 벗겨져 금빛으로 보이는 부조 위에 살며시 손을 대본다. 부드러운 바람이 불어온다. 다시 불어오지 않을 이 순간의 바람을 들이킨다.


체코는 마리오네뜨 인형극으로도 유명해서 어디를 가든 피노키오 같은 마리오네뜨 인형들이 많다. 긴 봉에 반죽을 감아 직접 구운 트래들로라는 빵을 파는 가게엔 손님이 넘쳐나고 턱받이 같은 아기용품에 그 자리에서 재봉틀로 이니셜을 새겨주는 가게도 있다. 손재주가 뛰어난 보헤미안들은 유명한 보헤미안 글라스나 예쁜 책갈피, 벽걸이도 만들어 판다. 어느 매장에 들어서도 시간 가는 줄 모른다. 그냥 기념품 가게에만 들어가도 그 아기자기함에 매료되어 한참을 서성이게 된다.

이제는 색다른 곳으로 가본다. 프라하 구시가광장 근처에는 유대인 지구다. 유럽에서 가장 오래되었다는 구신 시나고그(Staronova Synagoga)로 가본다. 어디서도 본 적 없는 톱날 모양의 지붕이 뭐가 다른 분위기를 암시한다. 시나고그는 유대인의 예배당이다. 프라하의 유대인 지구에는 시나고그가 여러 군데 보존되어 있다.


사실 유대인이라는 단어에는 극히 얕은 지식만이 반응을 한다. 나치의 유대인 포로수용소, 홀로코스트, 영화 <쉰들러리스트>, 세계 경제력을 쥐고 있는 사람들, 책 <탈무드>, 통곡의 벽 정도가 아주 단편적으로 떠오를 뿐이다. 그러니 프라하에 머무는 동안에도 관심이 가지 않았는데 밤차를 타기까지 시간 여유가 생기니 한번 가볼까 싶었다.

프라하는 유럽에서도 유대인이 많이 살던 도시라고 한다. 과거 유럽에서는 유대인을 기독교인과 분리해서 게토라고 부르는 유대인 지역에서만 강제로 거주하게 했다. 프라하의 게토는 요제포브(Josefov)라고 부른다. 프라하의 유대인 지구가 보존된 이유는 기가 막히다. 나치의 만행으로 유대인들이 감소하자 히틀러가 이곳에 유대인 멸종박물관을 세우려 했다는 것이다. 유대인을 학살한 사람이 보존한 유대인의 박물관이라니... 생각만해도 히틀러의 잔인함에 치가 떨린다.

시나고그에 입장하지는 않는다. 입장료도 싸지 않긴 하지만 배경지식이 너무 없어서 시나고그를 보고 유대인 지구를 돌아다니는 것으로 만족한다. 유대인을 상징하는 별이 그려진 대문과 유대인 성직자의 인형을 파는 기념품 가게가 이곳의 정체성을 알려준다.

유대인의 유물이 전시되었다는 클라우스 시나고그 앞의 관람객들은 노인이 많다. 이곳에 들르는 사람들은 유대인의 후손인지 독일 사람이 많은지, 건물보다 사람들이 묘하게 더 궁금해진다. 


천년의 세월이 만든 아름다운 도시 프라하의 이면에는 슬픈 역사가 숨어 있었다. 왕자를 만날 공주가 잠든 동화 속에 화형당한 마녀도 살고 있었다는 것을 잠깐 잊었다. 배경지식도 없고 흥미를 끄는 것도 아니지만 프라하에 왔으니 요제포브의 존재는 알고 가야 맞다.

요제포브를 돌아다니며 불편하던 마음은 아름답고 활기찬 구시가광장에 돌아오니 편해진다. 어제 비 내린 후에 활짝 갠 하늘에 핀 흰 구름은 더욱 풍성하다. 마차며 자전거며 음악을 준비하는 거리의 악사들이며 행인들, 노천까페에서 음식을 기다리는 사람들까지 모두 생기가 가득하다. 


햇빛에 쏟아지는 광장에서는 마차가 손님을 기다리고 커다란 비눗방울을 만드는 사람을 따라다니는 아이들의 얼굴에는 웃음이 가시질 않는다. 느긋이 점심을 먹고도 한참동안 광장의 풍경을 즐긴다.

각종 기념품을 파는 하벨시장을 지나니 바츨라프광장이 보이기 시작한다. 메트로 입구가 있는 현대적인 건물 끝에 보이는 국립박물관이 수채화 같은 풍경을 만든다. 하지만 지금은 바츨라프 광장이 아니라 나로드니(Narodni) 거리로 가는 중이다.

방금 다녀온 구시가와는 전혀 다른 풍경이다. 관광객이 아닌 현지인들이 여행이 아닌 일상을 사는 곳이다. 택시가 서고 트램이 다니고 서점과 빵집이 있는 거리에 무표정한 사람들이 지나간다. 그 무표정 뒤의 무엇을 발견하지 못하고 스쳐 지나가고 있는 프라하가 아쉬워진다.

테스코라는 대형 할인매장 옆의 트램정류장은 첫 날 프라하성으로 가는22번 트램을 탔던 곳이다. 이곳을 찾기 위해 헤매고 티켓을 사기 위해 헤매고 트램정류장을 제대로 찾으려 헤맸던 그 낯선 아침이 나흘 만에 추억이 됐다. 빨간 트램이 사람들을 태우고 천천히 궤도를 따라 움직이는 게 좋다.


바츨라프 광장에서 나로드니거리를 따라 걸으면 블타바강변으로 오게 된다. 강변을 따라 한 블록 정도를 걸으니 아름다운 건물과 대로를 달리는 자동차의 물결 사이로 희한한 건물하나가 돌출되어 있다. 이름하여 “춤추는 빌딩(Tancici dum)”이다. 왈츠를 추는 남녀의 모습을 모티브로 지었다는 1996년 건축물이다. 지극히 현대적이고 파격적인 건물임에도 옆 건물들과 은근히 잘 어울린다.

이렇게 옛 건축물과 조화되는 새로운 시도는 신선하다. 천년의 세월동안 프라하가 만들어 온 아름다움 역시 시대에 따른 온갖 건축 양식들이 어우러져 만들어졌다. 춤추는 빌딩도 몇 백 년 쯤 후의 미래에서는 관광지의 일부가 되지 않을까? 가로등의 아름다운 곡선을 바라보며 문득 그런 생각이 든다.

자동차가 씽씽 지나가는 다리를 건너 걷다가 공원이 있어 들어가 본다. 저 위쪽 카를다리와 프라하성의 경치는 아니지만 어디에서 바라보아도 프라하는 멋지다.

공원에 들어온 것은 앉아있고 싶기도 했지만 화장실이 있을까 해서였다. 잘 정비되어 있는 공원에 단정한 화장실이 있다. 어디나 10크로나를 내야 들어가는 화장실이라서 좋은 점은 어디에 가도 쾌적하다는 것이다. 여기 화장실에는 단정한 할머니 한 분이 책을 읽으며 자리를 지키고 있다.

월요일 오후의 공원에 아이들의 웃음소리만 울려 퍼진다. 벤취에 앉아 놀이터만 바라보고 있어도 저절로 미소가 피어난다. 저리도 즐거운 아이들은 아직까지는 이 세상에 소풍 나온 기분일 것이다. 날마다 새롭고 소소한 행복에 겨운 어린 아이들이 부럽다. 


강변을 따라 내려왔기에 카를다리 풍경을 바라보며 걸음을 옮긴다. 강가에 서 있는 사람들을 뺀다면 멀리 보이는 건물과 카를다리와 블타바강의 풍경은 13세기나 다름없을 것이다.

카를다리에 인접한 레기다리를 건너다보니 첫 날 프라하성에서 걷다가 모르는 사이에 왔던 그 마법의 캄파섬에 또 와 있다. 길이 연결되어 그런 것이지만 기대하지 않다가 들어오게 되니 더 반갑다.

수로가 흐르는 캄파섬은 작은 베네치아 같다. 사공이 노 젓는 곤돌라는 아니지만 작은 배들이 수로를 움직여 간다.


수로의 난간에는 어디서 많이 본 자물쇠들이 잠겨 있다. 사랑의 자물쇠를 아무리 열심히 잠가 놓아도 이미 변한 마음을 붙잡을 수는 없다는 걸 모르는 사람들만이 자물쇠를 달았을 것이다. 사랑의 맹세가 지켜질지는 미지수지만 알록달록 엉켜있는 자물쇠들은 여행자의 눈길을 끄는 데는 성공이다.

호텔과 레스토랑이 늘어선 거리지만 캄파섬의 거리는 어수선하지도 화려하지도 않다. 그냥 예쁜 그대로 거기에서 조용히 손님을 기다리고 있을 뿐이다. 그림자는 길어지고 구름은 점점 많아져 하늘을 덮고 있지만 캄파섬의 잔잔한 오후는 여유롭기만 하다.

캄파섬에서 이어지는 계단을 따라 다시 카를다리의 중간으로 오른다. 날마다 공연을 하는 할아버지 밴드 앞에는 단체 관광객들이 한바탕 요란스런 춤판을 벌이고 있다. 조금 떨어진 곳에서는 처음 보는 젊은이들이 경쾌하게 바이올린을 연주하고 있다. 다리 난간에 기대 연주를 듣는다.

저녁이 될수록 쌀쌀해지는 날씨에 몸을 덥히려고 까페에 들어가서 다리도 좀 쉬고 일정도 정리하고 카를다리로 나온다. 온종일 몇 번을 카를다리에 오게 된다. 불빛이 비춰지는 블타바강도 어두워져 가는 카를다리도 이젠 정말 마지막이다. 


모짜르트의 음악 <돈조반니>가 탄생했고 가장 많이 연주된다는 도시, 세계적인 작가 카프카의 고향, 영화 <아마데우스>와 <불멸의 사랑>, <프라하의 봄>의 배경, 아인슈타인이 재직하던 프라하 대학이 있는 곳, 밀란쿤데라의 소설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을 떠올리게 하는 곳이 바로 프라하다. 필스너우르겔이라는 라거맥주와 세계적인 맥주 버드와이저의 고향, 로봇과 골렘과 달러의 어원이 된 나라, 드보르작과 야나체크와 스메타나의 음악이 흐르는 체코.

알면 알게 될수록 더 많은 이야기가 넘쳐흐르는 유서 깊은 도시 프라하에서 나흘은 너무도 짧다. 오래전 유럽여행을 하며 들르지 않았던 후회 때문에 이번 여행의 마지막 일정에 억지로 끼워 넣다시피 방문한 프라하였지만 또다시 후회가 남는다. 다음에 프라하에 오게 된다면, 그 많은 이야기들을 포용할 수 있는 품위를 가진 나이에 오고 싶다. 지긋한 흰 머리를 부끄러워하지 않는 기품 있는 노인이 되어 여기 왔던 일을 추억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호스텔에 맡긴 배낭을 찾아서 메트로를 타고 플로렌츠 버스터미널로 간다. 배낭을 눕혀놓고 전원콘센트를 찾아 터미널 바닥에 철퍼덕 앉아 아이패드를 충전시킨다. 유럽의 어느 곳으로 떠나는 사람들이 짐을 끌고 들어와서는 몇 개 안 되는 의자를 차지하고 버스를 기다린다.

열한 시, 드디어 부다페스트로 향하는 버스가 온다. 친숙해진 도시를 떠나 생소한 도시로 향하는 복잡 미묘한 심정은 아직 익숙해지지 않는다. 버스는 나의 마지막 여정 부다페스트를 향해 출발한다. 수많은 밤차를 탔건만 이조차도 오늘이 마지막인 게 아쉽다. 자칫 지루해질 수도 있던 긴 여행의 끝자락에서 프라하에 머물게 된 것은 천만다행이었다.

정리=강문규기자mkkang@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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